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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주일- 잃어버린 복음을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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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10-26

본문

잃어버린 복음을 회복하라 갈1:6-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드리고 성경을 손에 들고 읽을 수 있는 것도 508여 년 전 한 수도사의 눈물과 외침 덕분입니다. 16세기 유럽 교회는 겉으로 보기엔 화려했습니다. 성당은 웅장했고, 미사는 장엄했고, 신학은 풍성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복음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인데, 그 시대의 교회는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돈을 내면 죄가 사해진다.” “면죄부를 사면 연옥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복음이 장사 수단으로 바뀌고,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계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루터라는 한 사람의 양심을 흔드셨습니다. 그는 수도원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하나님, 어떻게 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눈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평안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루터는 성경을 읽다가 로마서 117,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붙잡게 됩니다. 그 순간, 그의 영혼은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그래,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그때부터 루터는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 참된 복음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로부터 508년이 지난 오늘, 우리 시대 역시 루터의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의 절대가치가 사라지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사사기의 시대처럼, 사람들은 진리보다 감정을, 말씀보다 유행을 따릅니다. 교회도 점점 세속의 물결에 떠밀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복음 위에 서 있느냐?” “너희의 신앙은 여전히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냐?” 세속의 가치가 우리의 삶에 영향력을 주는 현실에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16절부터 10절 말씀은 바울이 복음을 떠난 교회를 향해 던진 절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말씀이 오늘 종교개혁 508주년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함께 잃어버린 복음을 회복하라는 바울의 외침 속에서 오늘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이 다시 세워야 할 신앙의 중심이 무엇인지 살펴보려 합니다.

 

 

본문에 소개되는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교회입니다. 그가 처음 이 갈라디아 지역에 와서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 그는 당시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 짐이 되는 자신의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4:14절에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여기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바울에게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 병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 때문에 바울에게 몹시도 큰 고통을 주었음에는 틀림이 없었고 또 성도들에게 시험거리가 될 수도 있었지만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울을 거절하지도, 업신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하나님의 천사같이, 바울의 약함을 감싸주었고 오히려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 줄만큼 바울을 사랑하는, 어떻게 보면 사제지간의 사랑이 담뿍 담긴 아름다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다음 그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간사한 것입니다. 바울이 떠난 2,3년 후 이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이 아닌 거짓 진리를 가지고 들어와 대 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아픔입니까? 이 얼마나 큰 충격입니까? 자신의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로 사제지간의 사랑이 넘쳤던 교회, 가르침의 열정 앞에 단순히 배우는 자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성장하던 교회가 이젠 변질된 타락의 길로 가게 될 때 가르치는 자의 그 고통을 여러분, 그 심정을 아십니까 ? 바울은 이 충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 복음을 떠난 신앙 (6)

6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히 여기노라.” 여기서 이상히 여기노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단순히 놀랐다가 아니라 믿기 어려울 만큼 충격을 받았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놀랐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왜 충격을 받았습니까? “내가 그렇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렇게 은혜를 체험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복음을 떠날 수 있느냐!” 그의 놀라움은 분노가 아니라 슬픔의 표현입니다. “너희가 복음을 모르는 게 아니라 복음을 잃어버렸다.” 3:3절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느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려 하느냐라고 호되게 닦아 세웁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놀랐습니까? 본문에 보면 속히 떠났다고 합니다. ‘속히’(타케오스)는 시간적으로 빠르다는 뜻뿐 아니라 가볍게, 쉽게 변했다는 뜻이에요. , “너희가 그렇게 쉽게 마음을 바꾸다니!” 은혜로 시작했지만, 세상의 말 한마디에, 다른 교훈에 너무 쉽게 흔들려버린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은혜받고 결단하지만, 세상 말 한마디에 쉽게 흔들립니다. “요즘 시대에 그런 믿음은 너무 보수적이야.” “교회 다니면 뭐가 좋아?”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복음의 중심에서 멀어집니다. 이들이 속히 떠난 이유는 다른 복음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τερος(헤테로스), 즉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 안에는 예수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행위가 필요하다.” 이런 가르침이 퍼져 있었습니다. 겉보기엔 경건해 보이지만,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건 복음이 아니다! 복음에 무언가를 더하는 순간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99% 은혜 + 1% 행위가 아닙니다.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에 인간의 조건이 섞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거래가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피의 복음을 외쳤던 중세 말기, 교회는 영적 권위보다는 세속적 권력과 재정적 이익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 교황청의 막대한 건축 비용과 전쟁 자금이 큰 부담이 되었지요.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면죄부였습니다. 원래 면죄부는 초기에는 회개한 성도에게 형벌의 감면을 의미하는 참회의 보조 수단이었습니다. ,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에게 교회가 그 형벌을 덜어줄 수 있다는 신학적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개념이 돈으로 죄의 형벌을 사는 제도로 변질되었습니다. “돈을 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 “돈을 내면 연옥(천국 가기 전 정화의 장소)에 있는 가족이 해방된다.” 이런 식의 가르침이 민중의 불안한 마음을 이용한 종교 장사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한 테첼이라는 도미니코 수도사입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동전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 영혼은 연옥에서 하늘로 올라간다!” 이 말은 당시 신앙을 완전히 타락시켰습니다. 복음의 은혜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구원이 거래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 없는 구원, 믿음 없는 용서가 팔려나간 시대 그것이 바로 루터 시대의 현실이었습니다.

 

 

루터는 원래 로마 가톨릭 신부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교회의 전통을 사랑했고, 순수한 믿음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결정적인 말씀 앞에 멈춰 섰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17) 이 한 구절이 루터의 인생을 뒤집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죄의 용서는 인간의 행위나 돈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교회는 면죄부 판매를 통해 구원을 팔고 있었고, 사람들은 십자가 대신 동전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그 부패에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15171031,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여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내걸었습니다. 그 첫 번째 문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 주님과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신자의 온 삶이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뜻하셨다.” 루터는 회개가 거래가 아니라 삶의 방향임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면죄부가 복음을 왜곡시키고, 사람들을 은혜가 아닌 두려움과 계산의 신앙으로 몰아넣고 있음을 통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황청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붙잡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출발점입니다.

 

 

. 복음의 본질로 돌아 오라 7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지 않으면, 교회는 빠르게 변질되고, 복음의 영광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가 이렇게 속히(ταχέως) 떠나느냐!” 그의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도 울리고 있습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라!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께 돌아가라!” 하지만 십자가가 빠져 있고, 회개가 사라진 복음은 가짜 복음입니다. 바울은 너무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기서 저주라는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명령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물론, 그 성에 있는 물건 하나까지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불태워서 없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주가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굉장히 무겁고 단호한 선언입니다. 그는 누가 전하든지, 심지어 천사라 할지라도, 복음을 바꾸는 자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1521, 루터는 성직자로서 파면을 당하고 보름스 회의에 끌려갔을 그는 거기서 죄인으로 선포가 됩니다. 그때 그는 수많은 신학자들과 제후들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입장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라톤처럼 달려가는 인생길에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있는지 모릅니다. 늘 순조롭지가 않습니다.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이 생깁니다. 이럴 때 갈등이 생깁니다. 오스 기니스가 쓴 저항이라는 책을 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 시대를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는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날의 신앙의 선배들이 살았던 시대는 신앙의 포기를 요구하는 시대였다면, 오늘은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지키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복음은 바뀌지 않습니다. 은혜의 본질은 시대의 유행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 (10)

사도 바울은 갈1: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만일 아직도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말씀은 결코 사람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에게 시선을 더 두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당시 바울은 다른 복음, 예수 믿음 외에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거짓 복음이 교회 안에 퍼질 때,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눈치를 보는 대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루터가 교황과 제국의 압력 앞에서도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입장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그렇게 외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은 단지 508년 전의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오늘 우리 교회와 우리의 신앙 안에서도 계속되어야 할 영적 운동입니다. 루터가 외쳤던 개혁의 중심은 단 하나였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가라.” 사람의 전통이 아니라 말씀으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거래가 아니라 은혜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루터가 붙들었던 그 복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여전히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복음 위에 서 있느냐입니다. 오늘 이 예배가 단순한 기념 예배가 아니라, 다시 복음 앞에 서는 예배가 되길 바랍니다. 세상이 변해도, 사람들의 생각이 흔들려도, 우리는 오직 복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은 교회의 생명입니다. 복음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복음이 살아야 우리의 신앙도 삽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믿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변화의 역사를 믿습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면 나라가 새롭게 되고, 가정이 회복되고, 사람들이 변화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을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가능했습니다. 복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복음으로 우리는 자유를 누립니다.

 

 

루터의 외침은 어둠을 깨뜨린 복음의 새벽종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의 믿음의 외침이 교황의 권세를 흔들고, 복음을 다시 세상 속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다시금 루터의 고백처럼 외쳐야 합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종교개혁의 정신을 마음 깊이 새기며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저를 다시 복음 위에 세워 주옵소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게 하소서.” “날마다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참된 개혁자가 되게 하소서.” 이 고백이 우리의 결단이 되고, 우리 교회의 방향이 되고, 한국 교회를 살리는 새 불길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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