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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보내신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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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10-05

본문

예수님이 보내신 명절 요 5:1-9. 2025. 10/5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추석은 민족의 가장 큰 명절로 시기적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은 서늘하며 들녘엔 오곡백과가 넘실댑니다. 추석은 우리나라 명절 가운데 가장 기쁜 명절입니다. 옛날에는 추석을 중추지절(仲秋之節)’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중추란 한 해의 가을 가운데, 곧 음력 8월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을의 한가운데이자, 곡식이 무르익어 가장 풍성한 절기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중추지절은 단순히 한 민족의 명절이 아니라, 힘겹던 시기를 지나 풍요와 감사가 절정을 이루는 때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예전에는 봄철 보릿고개라 불리는 험한 시기를 지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오곡백과가 익어 흔들리는 풍경 속에서 잠시나마 근심을 잊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와 경제가 어렵다 보니, 명절이 오히려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추석은 그런 현실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이번 추석을 맞이해서 그동안 헤어져 있었던 가족을 만나기도 하고, 친척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사랑과 은혜의 이야기, 감사의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면서 우리에게 가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가족 간에 함께 식사하면서 평범한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곳에서 사랑이 확인되고, 그곳에서 행복이 풍성해지고, 그곳에서 잃어버린 감사를 되찾아야 합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명절이 되자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을 가지 않으시고, 오히려 성전 주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베데스다 연못가로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무려 38년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 있던 한 영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잊혀진 존재, 절망 속에 버려진 생명이었지요. 주님은 바로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깊은 메시지를 줍니다. 명절이 단순히 풍성한 밥상을 즐기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소외된 영혼을 기억하고 우리를 보내시는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명절에도 잃어버린 자를 찾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명절을 통해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 어떤 영혼을 품어야 할지 다시금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베대스다로 가신 이유는

 

 

.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베데스다 행각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한 맹인들, 다리를 저는 사람들, 중풍병자와 같이 혈기 마른 사람들이 득실거렸습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모아놓은 임시 막사와 같은 처참함 모습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거나, 의사가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여 낙심한 채 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의 병자들이란 말은 약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몸이 병들어 아프기도 하지만,가진 것 없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는 온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가 건강하면 정신적으로 병들었고, 정신이 건강하면 육체가 병들었기도 합 니다. 멀리서 보면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모두가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경성 환자, 중독 환자들도 많습니다. 중독도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없는 불구의 몸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연못가의 사람들은 몸도 불편한데 가끔 물이 동할 때 먼저 뛰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언제 물이 동할지 알 수도 없고, 누군가 먼저 뛰어 들어가면 그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불투명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여기에 모여든 그 많은병자들은 당시 의술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저 못의 물이 솟구칠 때 그 물에 들어가 고침을 받을 것을 믿고 찾아왔습니다. 의술로는 안 되니, 그저 기적이 나타나 고침 받는 자비를 바라고 모여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곳에 자비는 없었습니다. 서로가 물이 솟구칠 때 먼저 못에 뛰어 들어가고자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배려하고 도와주기 보다는 적대시하고 다투는 전쟁터와 같은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자비의 집이지만 실상은 자비가 없는 무자비의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름만 자비의 집인 베데스다에 예수님이 베데스다로 간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 38년된 환자를 고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이 베데스다 연못에 주님이 찾아오셔서38년 된 병자를 만나주셨습니다. 5-6절입니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누구를 보셨다구요. 서른여덟 해된 병자를 보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 이틀, 12년이 아닌 38년 동안 병을 앓면서 차도가 없었다면 절망이 아닙니까? 38년이라는 숫자에서 주는 느낌은 불가능입니다. 혹시 병상에서 1년 정도 누워있어 본 경험이 있습니까? 병상의 1년도 굉장히 긴 시간인데, 38년은 엄청난 시간입니다. 이 병자가 38년을 그렇게 해 온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삶을 가까이서 살펴볼 때가 많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누가 나에게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야 묻는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가장 힘든 일은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짐을 지고 무너져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힘들어요.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어떤 사람은 관계의 아픔으로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불어 닦친 사고로어떤 사람들은 어느날 의사를 만나고 내린 진단 앞에 무너져 내립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무너져 내립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내 보내고 주저앉은 사람들, 얼마든지 내가 대신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그 자녀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는 사람들... 여러분, 누구라서 이 인생의 짐을 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니 누구라서 이 인생의 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의 인생입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그것이 우리입니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이 인생의 짐 앞에 사실은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 인생은 그리 수고로운가요? 왜 이렇게 살기가 빡빡한 것일까요? 그이유는 오직 한가지 우리에게 인생의 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여러분, 누구라서 이 인생의 짐을 져 보지 않았겠습니까?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 어깨에는 수많은 인생의 짐이 찾아옵니다.

 

 

설악산 마지막 짐꾼 임기종씨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158센티, 체중 62킬로 작은 체구로 100킬로가 넘는 짐을 지고, 하루에도 10차례 그 높은 설악산을 오르내립니다. 16세부터 벌써 45년을 넘게 짐꾼으로 살아왔습니다. 장애인 아내를 돌보고 생계를 꾸려가느라 그 짐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짐을 누가 대신 져줄 수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따지고 보면 우리가 다 저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생의 짐꾼들입니다. 누구는 질병의 짐을 지고, 또 누구는 생계의 짐을 지고, 또 누구는 자녀 양육과 부모 봉양의 짐을 지고, 또 누구는 사명의 짐을 지고, 또 누구는 죄의 짐을 지고... 그 짐을 내려놓고 싶다고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짐을 예수님께서 다 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연약한 인생들에게 절망하는 인생들을 향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보세요. 두 팔을 벌리시고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에게는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감히 절대적인 초청과 약속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 오라,내 가 쉬게 하리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인 초청이요 절대적인 약속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돈 많은 사람은 오라. 많이 배운 사람은 오라. 건강한 사람은 오라 하셨다면 어떤 사람은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주님은 이 38년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너무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은 얼핏 생각하면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가 38년 동안이나 병마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고 물으셨으니까요. 38년이나 병으로 누워만 있던 사람이 병 낫기를 바라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신 참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병이 나아 새로운 몸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낫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아주 단순하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런데 이 사람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 7절입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질문은 분명히 네 마음에 낫고 싶은 소망이 있느냐?”였는데, 대답은 저 사람 때문에, 저 환경 때문에라는 핑계와 불평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질병을 가진 자들 중 가장 무서운 만성 의욕 상실증입니다. 오랫동안 실패와 좌절을 겪다 보면, 마음속에서 의욕이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처음에는 나도 언젠가는 나을 수 있겠지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세월이 10, 20, 30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스스로 포기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물으신 겁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은 병자의 육체만 고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굳어버린 마음, 만성적으로 의욕을 잃어버린 영혼을 깨우시려 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주위에도, 또 우리 자신 안에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청년은 몇 년 동안 취업 준비를 하다가 계속 실패합니다. 처음에는 이번엔 꼭 될 거야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몇 번 낙방을 거듭하니까 이제는 나는 안 돼, 해봤자 소용없어하며 의욕을 잃어버립니다. 또 어떤 분은 오랜 병을 앓다가 낫지 않으니 처음에는 기도도 열심히 하고 믿음도 붙들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기도할 힘조차 사라집니다. 마음속에서 불평과 체념만 남는 겁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 관계나 자녀 문제로 계속 부딪히다 보면, ‘이제는 포기하자, 달라질 게 없어라는 마음이 자리잡습니다. 새로운 대화, 새로운 노력이 아예 시도조차 되지 않는 거죠. 이게 바로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환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그에게 주님은 무엇이라 말씀을 합니까?

 

 

. 일어나 걸으라

 

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도저히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으로 들어갈 힘조차 없는 자신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건 불가능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묻습니다. 오늘 이 절망촌에 오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분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지금 그 주님께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네 자리가 무엇일까요? 병자가 38년 동안 깔아뭉갰던 자리입니다. 원망과 탄식이 베여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 자리를 치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하신 말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건 단순한 치유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건 새로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의 인생은 늘 누워 있던 자리였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비가 와도, 명절이 와도 그 자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지나치며 불쌍하다고 했지만, 정작 그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왜요?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38년 동안 눕던 그 자리는 그에게 안식처 같으면서도, 동시에 감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이건 주님의 명령이자 초대입니다. ‘이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라!’ “네 자리를 들라그건 과거를 정리하라는 뜻이에요. 더 이상 불쌍한 자로, 피해자로 살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걸어가라주님이 주신 길로 나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명절을 마무리하며 주님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네가 눕던 자리에서, 멈춰 있던 곳에서,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일어나라.” 그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 속에도 38년 된 자리가 있지 않습니까? 낙심의 자리, 상처의 자리, 실패의 자리그곳에서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명절이 지나도, 우리의 인생은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내신 명절은 바로 새로운 출발의 명절입니다.

 

이제는 명절을 끝내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시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늘도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 붙잡고 믿음으로 일어나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 발걸음 위에 주님의 능력과 은혜가 함께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추석에 만난 가족들에게, 그리고 여러분 자신에게 이 당당한 고백을 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다시 일어난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걷는다. 나의 기쁨은 세상에 있지 않고 주님 안에 있다.” 이번 명절, 세상이 주는 웃음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새 힘과 기쁨으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 명절이 여러분이 가는 곳에 복음의 향기가 퍼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명절 문화를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주 앞으로 인도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행복을 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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