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예수 믿게 되었는가? 사도행전 22:1-9 새시대를 향하여(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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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9-29본문
나는 어떻게 예수 믿게 되었는가?
저는 자서전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한두 권의 자서전은 다 읽어보셨을 겁니다. 우리 교회 어느 권사님이 자신의 자서전을 쓴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서전이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진솔하게 써 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중에 ‘프랜시스 탐슨’이라고 하는 사람의 인생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쳐 왔습니다. 그는 영국의 시인이자 작가입니다. 그가 쓴 자서전은 그의 인생이 상당히 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일찍이 목사로 만들려고 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공부를 중도에서 그만두고 맙니다. 그러자 교육열이 높은 아버지가 다시 그를 설득해서 의대를 지원하게 했습니다. 의사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도 중단해 버립니다. 결국 그는 런던 시내 한가운데 노숙자가 되어버리는데, 거기서 마약을 하고 성냥과 신문을 팔며 하루 하루 살아가다가 급기야는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생활을 하며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순간 순간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그의 재능을 윌프레드 메이넬이라는 한 출판사 사장이 발견하고 그를 돕기 시작합니다. 병원에 데리고 가서 마약을 끊게 만들고, 사랑으로 용납하고 품어주며, 인내하며 그를 결국 문학가의 한 사람으로 올려놓습니다. 그가 훗날 유명한 시집(詩集)을 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집의 제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천국의 추적」, 재미있는 제목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하나님을 사냥꾼으로 묘사합니다. 사냥꾼을 주제로 한 '헌터'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사냥꾼이 얼마나 끈질기게 인내하며 동물을 쫓아가는지, 그리고 사냥을 하면서 동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영화에서는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아름답게 그려 놓았습니다.
그가 왜 그 시집에서 하나님을 사냥꾼으로 묘사했을까? 그는 새사람이 되어 어느 날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집요하게 추적하셔서 기어코 자기를 변화시킨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자신이 잘나서 변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의 자기를 만든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음을 깨닫고 그 은혜를 자신의 책에 썼으며, 그 제목을 「천국의 추적」, 이 얼마나 멋있는 제목입니까?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본문은 너무도 유명한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삶에 너무나도 중요했기 때문에 아마도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배 시간마다 자신의 간증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행전에만 해도 똑같은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이 세 번이나 나타나 있는데, 오늘 본문과 9장, 그리고 26장에 누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입성을 했고 그는 요주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긴급 체포됩니다. 죄목이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억지스럽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그를 체포한 로마 장교가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천부장의 재량권으로 바울에게 변론할 기회를 줍니다.
지금 그는 자신을 소개하는 너무 중요한 시간을 갖습니다. 1절입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간증 형식으로 되어 있는 바울의 연설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부형들아’라는 말은 친근감을 표시하기 위한 히브리 방식의 수사법입니다. 청중은 바울을 향하여 매질하고 고소했던 분노로 들끓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떠한 적개심도 갖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친근한 어조로 다가갑니다. 분노한 청중들은 그가 히브리어로 말함을 듣고 조용해졌습니다. 당시 흩어져 살던 대부분의 유대 사람들은 헬라어를 썼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해외에 입양되었던 사람이 한국말로 연설을 시작한 것과 같습니다. 순간 생경함을 느낀 청중들이 잠시 잠깐 머뭇하면서 조용해졌습니다.
자신도 한때는 예수라면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 정도로 예수를 싫어했던 그가 어떻게 사도로서 복음의 증거자가 되었는가를 간증합니다. 그런데 간증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그렇게 많은 간증을 하지만, 간증의 뜻을 정확하게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간(干)'자는 범할 간(干) 자를 씁니다. 이 의미는 내가 무슨 잘못을 범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나의 허물을 다른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좀 더 풀어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을 만난 후에 발견한 자신의 허물과 잘못됨, 그리고 그 이후에 그 잘못을 어떻게 고쳐 나갔는가 하는 변화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간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 만나기 전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이만하면 돈도 꽤 모았고, 공부도 할 만큼 했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왔고, 특별히 그동안 나쁜 일을 한 것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괜찮은 인생이었습니다. 자기의 인생이 남보다 못하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부러운 인생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그게 아닌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무 잘못 없는 줄 알았는데, 허물투성입니다. 어둠에 있을 땐 못 봤는데 밝은데 나오니 자기의 얼굴과 온 양복에 먼지투성이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도저히 감추고 있을 수 없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이야기하는 그것을 간증이라 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과거의 잘못된 생활을 버리고 이제는 새로운 삶을 찾았습니다. 내 생각이 달라졌고, 내 삶의 자세와 인생철학이 달라졌습니다'라고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믿기 전에 어떤 사람인가를 이야기합니다.
Ⅰ. 믿기 전의 바울 -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
여러분, 3절부터 보면 바울이 자기 신분을 밝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단순한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이 성에서 자라나, 가말리엘 문화 아래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 이렇게 소개합니다. 당시 가말리엘은 최고의 율법 교사였어요. 말하자면 오늘날로 치면 서울대 법대, 혹은 하버드대학 박사 과정 같은 명문 코스를 밟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지식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열정도 남달랐습니다.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겠다는 열심이 불타올라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이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단이라고 확신했어요. 그래서 스스로 앞장서서 그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넘기고, 심지어 스테반을 죽이는 일에 증인으로 나설만큼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당시 그는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충성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스펙이 화려하고 열정이 강해도, 진리를 보지 못하면 그 열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거예요. 바울이 바로 그랬습니다. 최고의 엘리트, 가장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Ⅱ.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6-9절을 보면, 사울이 예수 믿는 자,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칙령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이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약 230km, 그 당시 상당히 먼 거리인 예루살렘부터 다메섹까지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 다메섹에 가는 모습을 행 9장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위협과 살기의 마음이 등등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에 살기가 있었습니다. 미움이 있었고 분노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야 되겠다’라는 미움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살기 등등한 마음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향할 그 때에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얘기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때가 정오라고 얘기합니다. 낮이 얼마나 밝습니까? 태양이 얼마나 밝은가요? 그러나 놀랍게도 그날 이 태양보다도 몇 십 배, 몇 백 배 더 환한 빛이 사울에게 쏟아졌습니다. 홀연히 쏟아졌습니다. 그 빛을 받은 사울이 도저히 견딜 수없어 그 자리에서 시력을 잃어버리고 땅에 고꾸라집니다.
그리고 사울이 가장 먼저 한 말이 무엇입니까? "주여! 뉘시오니까?" 옛날에 예수가 나타났으면 이렇게 물었을 겁니다. "너, 누구냐?"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부릅니다. "주여!" 부활의 경이로움 앞에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죄인인가를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던가, 내가 얼마나 교만해서 내 지식에 미쳐서 살았던가,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여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며 살았던가를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그후, 날마다 날마다 간증하기를 "죄인 중에 내가 죄수니라." 남은 인생을 그는 이렇게 간증하며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여! 뉘시오니까!" 여기서 내 과거가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내 과거를 올바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를 잘못 해석합니다. 그래서 부모를 원망합니다. 자기 환경을 탓합니다. 내가 왜 이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나, 나는 왜 키가 이만한가, 나는 왜 돈 없는 부모를 만났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사람들이 교만한 줄 아십니까? 자신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왜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못 보는 이유는 하나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도 저 멀찌감치서 만났어요. 여기에 아무리 환한 빛이 있어도 100미터 정도 떨어져서 반짝거리는 불빛 아래 깜깜한 밤에 옷을 보십시오. 아무런 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밝은 빛에 오면 올수록 깨끗해 보이던 옷과 얼굴이 더러워져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던가, 내가 얼마나 교만해서 내 지식에 미쳐서 살았던가,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여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며 살았던가를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그후, 날마다 날마다 간증하기를 "죄인 중에 내가 죄수니라." 남은 인생을 그는 이렇게 간증하며 살았습니다.
Ⅲ. 만난 이후 바울의 삶: 박해자에서 증인으로 21절
행 22:21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직접 주님께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받았고, 또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받은 사명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바로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받는 사명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분노하고 죽일려고 달려드는 사람들 앞에 하나님이 주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이 만난 예수를 전하는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사명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줍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고 살던 사람이 분명한 살아야 할 이유를 알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일(work)은 의미 없는 노동이요 먹고 살기 위한 호구지책이지만, 그 일 가운데서 사명을 발견하게 되면 그 일은 더할 수 없는 축복이요 기쁨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자식들은 자기를 힘들게 하는 골칫거리요 짐이지만, 양육의 사명을 발견하게 되면 그 자식들은 보배가 됩니다. 누군가에게 가사노동은 도망치고 싶은 무거운 짐이지만, 가족들을 섬기는 사명을 발견하게 되면 그 일은 사랑의 일거리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명은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습니다. 의미 없는 삶을 의미가 가득 담긴 삶으로 바꿔놓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가 넘치는 삶으로 바꿔놓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명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명을 알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성령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해 주십니다. 때로는 설교말씀을 들을 때, 때로는 성경을 읽고 기도할 때, 때로는 어떤 사건을 경험하면서 내 마음 속에 깨달음이 생깁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어떤 결심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결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우리는 ‘성령의 감동’이라고 부릅니다. 이 성령의 감동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그 은혜를 깨닫고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사랑 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속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있는가?” 우리 한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주님은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빨리 가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잃은 양들을 찾아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손가락하나 까딱하려 들지 않으면서 이웃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내 가족이 구원받기를 원합니까? 이 부패한 한국사회가 치료받기를 원합니까? 희생 없이 말입니다. 친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하는 것은 보통 큰 희생이 아닙니다. 제가 몇 사람을 놓고 시간을 내어 기도해 보니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쁜 일과를 끝내고 피곤에 지쳐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시간인데, 몇 사람을 생각하면서 계속 엎드려 기도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만한 대가도 치르지 않고 어떻게 죽은 영혼이 살아나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인격적으로 멸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돈을 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돈을 쓸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이 들 것입니다. 바쁜 시간에 중요한 약속이나 스케줄을 뒤로 미루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만나 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의 형편을 이해해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조그마한 수고 하나하나가 희생의 제물이 되어 활활 타오르며 향기를 토할 때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사랑의 빚을 갚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진 빚을 이번 기회에 갚아봅시다. 성령이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 바로 나에게 주신 사명을 가지고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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