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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시대를 향하여 (31)- 오해를 당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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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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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를 당할 때 행21:30-36 (31)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문제를 만나고 살아갑니다. 그런 문제 가운데 정말 힘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오해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한자로 뜻을 찾아보니까 오해(誤解)''그릇될 오()''풀 해()'가 결합된 단어로, 어떤 사실이나 행위를 실제와 다르게 잘못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오해는 단순히 사실을 잘못 아는 것을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기도 합니다.

 

 

가족 안에서도 오해가 생기면, 부모와 자식 사이에, 형제와 자매 사이에 작은 말 한마디가 삐딱하게 들려서 몇 년 동안 관계가 멀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친구 사이에도, 직장 동료 사이에도 오해가 쌓이면 신뢰가 깨지고 갈등이 깊어집니다.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상대방을 향한 사랑보다 오해가 앞서면 마음이 멀어지고 가정이 무너지는 일까지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 오해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사실은 아닌데 사실처럼 굳어지고, 한 번 생기면 풀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실이 신발을 신고 나가기 전에, 거짓은 이미 세 바퀴를 돈다.” 그만큼 오해는 빠르게 퍼지고 사람을 무너뜨립니다.

 

 

오해는 사람의 마음을 닫게 하고, 믿음을 깨뜨리며, 불필요한 고통과 갈등을 초래합니다. 오해가 커지면 서로를 향한 불신은 더욱 깊어지고, 결국 진실을 마주할 기회조차 잃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이 바로 그 오해의 늪에 빠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선한 동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사람들의 오해 때문에 붙잡히고 매를 맞으며 죽음의 위기까지 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오해의 늪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그리고 오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선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오해는 찾아온다 (27-29)

먼저 왜 바울은 왜 예루살렘에 올라갔을까요? 지난주 보셨지만, 바울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길을 만류했습니다. 제자들이 붙잡고, 동역자들이 눈물로 막았지만, 결국 그 길을 갑니다. 20:22-23을 보면 이제 나는 성령께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한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하신다.” 성령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 그런데 바울은 기어코 이것이 나의 사명의 길이라 고백하며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교회가 모은 연보를 예루살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하기 위해 갔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섬김과 사랑의 마음으로 간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꼬리표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라는 오해를 풀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실 바울로 인해 고통 받은 사람들은 바울이 예수 믿기 전에 어떤 자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8:3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여기 잔멸이라는 말은 씨를 말린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거듭나기 전 바울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누구 바울이 변했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그의 인생은 어쩌면 억울한 일이 계속되는 삶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아니었기에 사도가 아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16개월 동안이나 복음을 전하며 세운 고린도 교회에서는 자기들의 문제를 믿음으로 잘 풀어가도록 편지를 보낸 사도 바울의 권면을 곡해하여 네가 뭔데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고 반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던 사도 바울은 눈물로 편지를 써야 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가 그토록 신뢰했던 사람들중에 사도 바울이 죄수로 잡히게 되자 그를 버리고 떠나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어떤 죄를 지어서 죄수가 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가 오해를 사서 죄수의 몸이 되었는데, 그의 제자요 동역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를 외면한 것입니다. 외로울 때 곁이 있어 주어야 할 사람들이 떠나버렸을 때, 사도 바울은 얼마나 힘들고 억울했을까요? 이런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도착을 했지만, 상상도 못했던 폭동이 일어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30절에 온 백성을 가르치되 율법과 이곳(성전)을 거스른다”. 이게 소문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율법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자유를 곡해했습니다. 게다가 바울이 드로비모라는 이방인과 함께 다니는 것을 보고, 29절에 저 사람을 성전에 끌고 들어갔다고 떠들었습니다. 사실 확인도 안 된 가짜뉴스가 삽시간에 폭동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여기 보세요. 30절을 보십시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니라." 여기서 중요한 게 있습니다. 성경은 온 성이 소동했다고 말합니다. 원어의 뜻을 보면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줍니다. κινέω라는 말은 단순히 웅성거렸다는 게 아니라, “도시 전체가 흔들렸다, 요동쳤다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오해가 예루살렘 전체를 뒤흔든 겁니다. 이건 마치 작은 불씨가 산불로 번지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오해 하나가 성 전체를 흔드는 대혼란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울을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28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이 백성과 율법과 이곳 성전을 비방하는 그 사람이라!" 소위 군중심리를 동원한 것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실이 신발을 신고 나가기 전에, 거짓은 이미 세 바퀴를 돈다.” 그만큼 오해는 빠르게 퍼지고 사람을 무너뜨립니다.

 

 

여러분, 이들은 바울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성전을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율법의 정신을 존중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비방하는 자'로 규정했습니다. 왜입니까? 바로 오해로 인한 편견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진심을 보려 하지 않았고, 진실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마음속에 '바울은 나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들의 편견에 맞는 행동만을 보려 했습니다. 오해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보게 만듭니다.

 

 

여러분, 성문을 닫았다는 건 이제 성전 안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일은 다 차단하고, 폭력과 살인이 일어나는 공간으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바울을 향한 오해는 한두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온 성에 퍼져나간 군중의 광기로 변질됩니다. 32절을 보면 로마 군인들이 왔을때 처참한 광경이 보입니다.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냥 한두 대 맞고 끝난 게 아닙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τύπτω(튑토)’, ‘즉 마구 때리다, 구타하다라는 뜻입니다. 현재분사로 기록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계속해서 바울을 때리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집단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이는 바울 시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위 가짜뉴스로 진실이 가리워지고 서로 불신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 무섭습니다. 예전에는 폭력이라고 하면 주먹이나 물리적인 힘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주먹보다 더 무서운 게 있습니다. 바로 말의 폭력, 언어의 폭력입니다. SNS나 인터넷 뉴스를 열어보면, 섬뜩한 기사들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지 모릅니다. 더 큰 문제는 사실 여부를 떠나 상대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채 이것을 즐기는 오늘의 현대인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죄의 오염 속에 빠져 살아가는가를 실감을 하게 됩니다.

 

 

죄인은 자극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죄인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죄인은 남의 이야기, 험담을 즐깁니다.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한두 사람의 악의적인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가 한 사람의 인격을 무너뜨리는 것을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견디다 못해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 소식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이로 인해 피해를 본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과 친척들은 한 생을 씻지 못할 오명(?)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 31-32

바울이 오해의 벽에 갇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과연 모든 소망은 사라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31절과 32절을 함께 보십시오.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예루살렘의 온 성에 소요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즉시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바울이 폭력을 당할 때 이 지역을 관할하는 로마의 천부장이 이 폭동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기 달려갔다는 말은 그냥 천천히 걸어간 게 아니라, 급히 뛰어내려갔다는 뜻입니다. 상황이 너무 급하니 지체할 수 없었던 거죠.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로마 군대의 신속한 대응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살리시려고 천부장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여기 34-35절에 보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군사들에게 들려 갔다라고 표현합니다.

 

 

원어로 보면 바스타조라는 말인데, 몸을 들어 옮기다라는 뜻이에요. 군중이 너무 거세게 밀치고 폭행하니, 바울이 스스로 걸어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억지로 바울을 들어서 계단으로 옮겨갔다는 겁니다. 이 장면은 바울이 얼마나 극심한 위기 속에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로마 군인을 도구 삼아 바울을 보호하신 놀라운 섭리이기도 합니다. 인간 눈에는 수치스럽게 들려가는 모습 같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로마까지 복음을 보내는 첫걸음이었습니다.

 

 

. 반전 하나님의 섭리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보기엔 끝났다, 이제 소망 없다싶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전혀 다른 통로를 준비해 두십니다. 믿는 사람들이 버린 바울을, 오히려 믿지 않는 이방 권력이 보호하는 역설적인 장면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만약 그날 천부장이 없었다면 바울은 군중에게 맞아 죽었을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은 군중의 손도, 살인 계획도 다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 권세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종을 보호하셨습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한 방법과 사람들을 통해 우리를 지켜내십니다.

 

 

지난날 다윗도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절망의 상황에 부딪힐 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시편 37:7절에 여호와를 잠잠히 바라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억울함은 내가 푸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풀어주십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질 그 절망의 순간에 바울은 이 사건을 통해 로마 군인들의 호송을 받아 그가 그토록 가고 싶아한 로마로 가게 됩니다. 만약 그날 천부장이 없었다면 바울은 군중에게 맞아 죽었을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은 군중의 손도, 살인 계획도 다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 권세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종을 보호하셨습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한 방법과 사람들을 통해 우리를 지켜내십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우연이 없습니다. 우연이라고 여겨지는 그 모든 것 속에는 필연이 있고, 그 필연 속에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절대로 의미없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한가지 한가지가 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섭리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이 사건을 통해 매를 맞고, 결박당하고,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끌려갑니다. 겉으로 보면 실패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과정 속에서 바울이 결국 로마 군인의 보호를 받아 로마로 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가기를 원했던 로마,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황제 앞에서까지 증언하게 되는 길이 열린 겁니다. 겉으로는 억울한 결박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로마행 티켓을 끊어주신 것이죠. 이게 바로 로마서 828절의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바울이 지금 그 말씀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로부터 오해를 받고 고통 속에 있는 분들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 가운데 누구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십니까? 혹 오해 때문은 아닌가요?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인간의 눈으로, 인간의 잣대로 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해로 인한 편견 때문에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며, 함부로 미워하며, 함부로 정죄하며, 함부로 비판하며 살아왔다면 회개하면 나의 굴절된 시선 나의 잘못된 마음, 내 고갈된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오늘 우리 마음에도 말씀해 주심으로 이 무서운 오해의 죄악을 범치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해의 굴레에서 해방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용서를 구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생에서 오해를 피할 수 없습니다. 바울도 그랬고, 예수님조차도 오해를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우리가 그 오해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입니다.

 

1. 오해는 사실 왜곡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말을 조심하고, 진실을 붙들어야 합니다. 2. 오해는 폭동처럼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해가 생기면 즉시 풀고, 서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3. 무엇보다 오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상황까지도 사용하셔서 복음의 길을 여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억울한 오해를 당할 때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며 담대히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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