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를 향하여(24강) “문이 닫혔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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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7-27본문
본문: 행16;6-10
사랑하는 여러분! 참 우리는 강한 것 같지만,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IMF가 한창이던 1998년 여름 조간신문에 한 남자의 자살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그는 한때 잘나가던 중견 사업가였습니다. 사업은 번창하고 아이들은 아무 탈 없이 대학에서 공부를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IMF가 찾아왔습니다. 부도로 사업을 포기해야 했고, 아이들은 학비가 없어서 다니던 대학을 휴학해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있던 집도 차압으로 넘어가고 달동네에 방 한칸을 겨우 구해서 몇 식구가 한방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기를 수개월째 드디어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시신이 놓여 있는 옆에 한 작은 종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아주 짤막한 그의 유서였습니다. ‘내 인생의 모든 문은 닫혀 버렸다. 어디를 가도 열려 있는 곳이 없다. 사방이 다 막혀 있다. 여보, 미안해. 하지만 이 길밖에는 내게 열려 있는 문이 없구려. 얘들아, 이 아빠를 용서해 다오.’ 이것이 그의 유서 내용 전부였습니다.
어느 인생이라서 닫힌 문이 없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과연 닫힌 문이 없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닫힌 문이 있을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때로 우리는 기대에 부풀어 계획을 세웁니다. 목표를 세웁니다. 출발이 너무나 좋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순풍에 돛단 듯합니다. 그러나 때로 아무 경고도 없이 폭풍우는 불어 닥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기대했던, 우리 앞에 그렇게 활짝 열려 있던 문은 아무 말 없이 “꽝!” 닫혀 버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일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생의 닫힌 문을 열고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바울도 자신이 가야 하는 일이 막혔습니다. 얼마나 난감하겠습니까? 6-7절의 상황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여기 보면 바울이 그동안 준비한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힘썼다는" 말은 우리말로 **'노력했다', '애썼다', '힘을 다했다', '간절히 노력했다'**는 뜻이에요. 단순히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가볼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아시아와 비두니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을 것입니다.
단순히 마음만 먹은 것이 아니라, 그곳으로 가기 위한 여행 준비, 이동, 사람들과의 접촉 등 여러 면에서 실제적인 노력과 수고를 기울였다는 뜻이에요. 마치 우리가 어떤 목표를 위해 밤늦게까지 공부하거나, 운동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매일 땀 흘려 훈련하는 것과 같아요.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전심을 다해 움직인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허락지 않으셨다’ 이 단어는 ‘칼로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그 원어적인 의미는 ‘잘라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이들 일행이 소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성령께서 그 길을 잘라 버리신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어디를 가든 길이 막히는 것을 쓸 때 이 단어가 쓰여 집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길은 가야 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하나님!” 하고 애를 썼는데 성령께서 그 길을 막아 버리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바울은 그 누구보다 복음 전파에 대한 뜨거운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성령님께서는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Ⅰ.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섯 절 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세계역사를 바꾸어놓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기독교 선교 역사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장을 열어 놓은 전환점(turning point)이 되는 사건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에 가고자 한 것은 돈을 벌거나 자신의 육신의 평안을 찾기 위해서나 어떤 세상 적인 목적을 위해서 가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가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막으셨습니다. 바울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과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것이 다릅니다. 사55:9절에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리고 잠 16:9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6절과 7절을 다시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만 비두니아로 애쓰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 비두니아는 지금의 터키입니다. 아시아입니다. 애를 쓴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거절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놀라운 순종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내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도 안 돼!” 라며 좌절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다른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비록 비두니아로 가려는 시도도 막혔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움직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바울의 태도입니다. 문이 닫혔을 때, 우리는 종종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리거나, 억지로 그 닫힌 문을 열려고 발버둥 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막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미련 없이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 또 찾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계획했던 일이 틀어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혹시 불평하고 원망하며 주저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내 의지와 고집만 내세우며 억지로 일을 추진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유연함과 순종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과감하게 방향을 틀고, 다른 길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닫힌 문 앞에서 절망하는 대신, 열려 있을 다른 문을 찾아보려는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위한 길을 예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안전한 삶의 비결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 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를 통한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과 같은 방향에 맞추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있는 것인가, 아니면 순전히 나의 생각인가? 지금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그것을 내어 맡기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Ⅱ, 우리가 어떻게 인생의 닫힌 문을 지나갈 수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 인생의 문이 닫힐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말씀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 여기 환상을 보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 동안 자신의 선교지에 대해 많은 연구와 준비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음성 앞에 자신의 계획과 의지를 겸손하게 내려놓습니다.
10절에 보면 우리가 두 가지 관심을 가져봅니다. 하나는 바울이 환상을 본 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환상을 본 후에 곧, 바로 떠나려고 힘썼습니다. 곧 바로 순종했다는 말씀입니다. 환상 본 후에,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서 준비하고 제 할 일 마칠 때까지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곧 바로 떠났습니다. 또 하나는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에 대하여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해석했습니다. 마게도냐가 지금 어디인지 아십니까? 지금의 유럽지역입니다.
‘역사의 연구’를 쓴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오늘 본문을 읽고 그는 외칩니다. - 드로아에서 바울을 태우고 마게도냐로 가고 있었던 이 이름 모르는 조그마한 배가 바로 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배였으며, 유럽의 문명사의 미래를 안고 가던 배였다고 증언합니다. 유럽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유럽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유럽과 서구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헬라 문화, 로마의 문화! 그 당시 모든 길이 로마를 통해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만일에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만 복음을 전했다면 이 복음은 세계를 장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유럽을 전도했기에 채 200년도 지나지 않아 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을 지배한줄 믿습니다. 사도바울 앞에 길이 닫혔을 때 성경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사도 바울 일행이 생각지 못한 놀라운 일은 결국 유럽의 복음의 문이 열렸고 그리스, 로마, 독일, 프랑스… 수많은 나라에서 부흥이 일어났고, 종교개혁이 있었고, 선교사를 전 세계에 파송하던 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문을 통해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Ⅲ. 우리의 마게도니야는 어디입니까?
작년 프랑스 올림픽 대회를 보면서 마음이 먹먹해 졌습니다. 여러분 혹시 2024년 프랑스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보셨습니까? 화려한 퍼레이드, 웅장한 연출, 세련된 기술력… 겉으로는 완벽했지만, 저는 그 장면들을 보면서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하며 조롱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희화화하며, 그 자리에 "성 혁명"을 외치는 모습이 등장했습니다. 온 세계가 지켜보는 그 자리에서, 프랑스는 예수님 대신 인간의 욕망과 성적 해방을 중심으로 개회식을 연 것입니다.
여러분, 유럽은 어떤 곳입니까? 바울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마게도냐로 건너가 복음을 전했던 땅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더 이상 복음은 그 땅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교회는 문을 닫고, 성경은 잊혀지고< /span>,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은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단지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언젠가 바라보았던 '선진국' 유럽은 지금 영적인 혹한기, 즉 겨울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느 교역자 분이 이야기합니다. 유럽은 교회가 텅 비었다. 한국 교회가 텅빌 것이다. 충격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마게도냐는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셨죠.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 누가 우리를 향해 그렇게 외치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마게도냐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있는 교실이 마게도냐입니다. 그 교실 안에서 성 정체성의 혼란을 배우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교육받고 있습니다. 오늘의 마게도냐는 인터넷 속 세상입니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쾌락과 허무 속에서 방향을 잃는 현장이 바로 마게 도니아입니다. 안탑깝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한 사람의 잃은 영혼을 찾기 위해서는 밤바다에 표류하고 있는 난파선에서 살려달라고 아우성하는 영혼의 절규하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곳곳에서 부르짖는 영혼들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소리를 듣지 않고서는 영혼을 결코 살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 “누가 나를 좀 도와줄 사람 없나?” 외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사탄이 그저 제철을 만난 듯 미친 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우상들이 판을 치고 있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는 영적 어두움이 우리를 덮으려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영혼들이 겉은 멀쩡한데 영혼이 병들어 있습니다. 이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는 절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영혼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만이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 무더운 여름에 우리는 다음세대를 위하여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교우들에게 간절함이 일어나야 합니다. 어제와 오늘 여름성경학교를 가졌지만, 우리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문제는 믿는 가정의 아이들중에도 교회출석하지 않는 비율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눈이 띠게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청소년시기에 접어들면서는 심각한 수준으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청년이 되면 이제 교회출석하지 않는 청년들이 훨씬 더 많아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이 현실 앞에 우리는 마냥 주저 앉을 수 없습니다. 지금 문이 막혔다고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 이 환상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시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애썼던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확한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 한마디는 바울의 모든 의문과 답답함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지체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이 사건은 정말 놀라운 사건입니다. 여러분,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순간입니다. 이 작은 사건이 전 세계 복음 전파의 큰 물꼬를 트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생각이 다를 때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우리는 눈앞의 현실만 보고 계획하지만, 하나님은 전체적인 그림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시야는 좁지만, 하나님의 시야는 무한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문이 닫혔을 때, 길이 막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우리의 계획이 틀어지고 문이 닫혔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닫힌 문 앞에서 좌절하지 말고 유연하게 대처하십시오. 바울처럼 고집하지 않고 유연하게 방향을 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닫힌 문을 억지로 열려고 애쓰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다른 문이 어디에 있을지 기대하며 찾아 나서야 합니다. 셋째, 끈기 있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종하십시오. 바울은 한 번 막혔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 명확한 지시를 주셨습니다.
이제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기뻐하는 것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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