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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사랑이 없으면 고전 1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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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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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없으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기도와 뜨거운 섬김을 통해 우리 청년들이 은혜 가운데 선교가 잘 마쳐짐을 감사드립니다. 특히 출국하는 날 우리 신장로님 내외분이 새벽에 인천 공항까지 나오셨는데 우리 일행을 만나지 못했지만그 먼길을 오신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귀국할 때도 비가 내리는 그 현장에 이재승 장로님이 공항까지 마중 나오는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 나가사끼 선교를 다녀오면서 제 마음에 계속 일어난 단어가 있다면 바로 사랑이라는 단어입니다.

  

이번 일본 선교에 우리 청년들과 함께 34일 짧은 시간이지만, 나가사끼에 다녀오면서 제 자신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정말 부끄럽게 여긴 것은 고난 앞에 그들의 태도 였습니다

나가사끼에 복음이 들어오면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그들이 나가사끼 기독교 500년 역사 속에서 그들은 꼭 예수 때문에 복 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출세해서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고통의 한복판에서 예수 때문에 그 이름 예수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드립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이 배교하지 않고 그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까? 바로 십자가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는 조선교사님의 안내를 받으며 나가사끼 언덕에서 26명의 순교자들에 설명을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임진왜란 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 명령으로 도꾜에서 나가사기까지 800Km를 개처럼 끌려 다니면서 26명이 순교에 자리에 서 있는 모습 앞에 통증이 일어 났습니다. 거기엔 13살짜리가 배교의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잠깐의 위기를 모면하기보다 고난을 택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들이 얼마든지 목숨을 부지 할 수 있는 여건에서도 예수를 부인하면 살 수 있는 그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배교하지 않고 죽어가는 그 이유는 바로 십자가의 사랑에 메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이기에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아낌없이 바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까? 여러분, 요즘 세상에 사랑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듣지 않습니 까? 노래 가사에도 사랑이 넘치고, 드라마 속에서도 사랑을 외치고, 심지어 광고에도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많은 사랑 속에서 왜 사람들은 더 외롭고, 더 상처받고, 더 힘들어지는 걸까요? 사랑이 넘쳐야 할 세상인데, 왜 진짜 사랑은 사라져 가는 걸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딤후3:1-2절을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사랑하며라는 말은 건강하고 바른 자기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이기적인 사랑, 자아 숭배, 자기밖에 모르는 사랑입니다. ,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자신을 존중하고 돌보는 게 아니라,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고, 상대방의 아픔에는 무관심한, 자기중심적인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대하는 본문에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표현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이 사랑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 합니다. 지금 고리도 교회는 사랑이 충만해야 할 교회가 사랑이 없어서 갖가지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 병든 교회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교회에 사랑이 없게 된 것일까요? 고린도 교회에는 외형적으로 너무나 탁월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말이 탁월했습니다. 방언도 하고, 천사의 말처럼 유창한 사람들. 둘째, 지식이 탁월했습니다. 깊은 비밀을 깨닫고, 믿음으로 산을 옮길 만큼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 셋째, 헌신이 탁월했습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기까지 내어주고, 전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다 소용없다.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성도님들, 우리도 신앙생활 하면서 말 잘하고, 지식 쌓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사랑이 빠지면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님입니다. 사랑이 없는 이야기들, 사랑이 없이 믿음으로 산을 옮길 만큼 강한 믿음을 가져도 그리고 구제는 오히려 교회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분쟁과 다툼, 그리고 교회가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나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도, 더 나아가 구제가 약해도 십자가의 사랑이 스며들면, 거기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우리 몸에는 우리의 목숨에 치명적 결과를 주는 것이 암이 아닙니까? 지금까지 발견된 암이 무려 200,300종류라고 합니다. 엄청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인체내에서 암이 안걸리는 부위가 바로 심장입니다. 심장은 우리 몸에서 쉽게 암이 발생하지 않는 곳입니다. ‘심장암이라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는 심장에 다른 장기보다 열이 많기 때문이고, 염통으로 염분이 높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편 생각하기로는 쉴 틈도 없이 격하게 일하고 있는 그곳에 암세포가 발생하기 쉽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뜨겁게 뛰는 심장과 견줄만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나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하기를 단 1초도 멈출 수 없습니다. 사랑이 멈추는 것은 곧 죽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삶의 모습은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고, 사랑이 의미가 되지 않는다면 능력도, 지식도, 심지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준다 할지라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기까지 인생은 이 사랑을 배우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C.S.루이스는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인간은 남녀의 사랑 에로스로 태어나고,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스토르게로 양육되고, 친구들 간의 사랑 필리아로 성장하고,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 아가페로 완성될 수 있다. 그리고 마땅히 아가페의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사랑을 라틴어로 아모르라고 합니다. 여기서 모르는 죽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는 부정을 뜻하는 말입니다. 곧 희생이 없이는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러한 희생적 사랑 곧 아가페 사랑으로 확증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울은 롬5:6-10절에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말씀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6, 8, 10절을 보면 “6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여기에서 우리가 어떤 상태였을 때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상태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6절에 연약한 상태였고, 8절에 죄인이었고, 10절에 원수 되었을 때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인간인데 나를 위해 엄청난 희생의 댓가를 치르므로 죄로 막힌 담을 헐어내셔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고 이제 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프러포즈인 것입니다. 그냥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여기엔 조건이 없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으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 체험을 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시고, 그 위에서 쏟으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신 사건입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죄사함의 은총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을 지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주의 영원한 나라에 면류관의 주인공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이것을 요한 사도는 요일3:1절에 보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여기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어떠한 사랑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 말은 작은 우리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십자가에 아들인 독생자를 내준 그 사랑을 말로 담아 낼 수 없었기에 어떠한 사랑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 사랑을 주었다,-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주셨다'라는 이 말은 엄청난 의미가 담긴 메시지입니다.

 

 

요즘 열대아 기류로 인해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릴 때 어떻습니까? 폭우가 쏟아져 내릴 때 바깥에 나가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그 때는 비옷이나 우산이 비를 막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온몸이 흠뻑 젖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폭우와 같이 우리에게 쏟아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 발버둥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 아닙니까?

 

 

이 사랑 앞에 바울은 자기를 완전히 맡깁니다. 고후5:14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여기 강권이란 말은 둘 사이에 꼭 끼여서 꼼짝할 수 없는 것으로, 헬라어로는 힘 있게 꽉 잡힌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랑하는 주님께서 나를 아주 꽉 잡아 주셨습니다.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나를 붙드셨습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구속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나를 붙드시고,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는 것은 주님이 나를 엄청나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행복한 고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주님의 사랑이 꽉 잡으셔서, 이제 바울은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나를 꽉 잡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대로 끌려 다닐 뿐입니다. 그분이 가자하시면 가고, 머물자 하시면 머무는 것뿐, 나의 의지는 이제 다 그분께 맡겨 드렸습니다. 사랑의 포로가 되어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행복했습니까? 사랑하는 그분께 꽉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또한 그분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십자가의 사랑을 져버리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너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 나는 내 생명보다 너를 더 사랑하노라. 십자가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이 너를 사랑하노라."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 각자에게 쏟아 부어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얼마나 피부로 느끼며 감사하고 살아갑니까?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을 때가 있죠. 배신당하거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거나, 사람의 악함에 질려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난 절대 저 사람을 용서 못 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우리 일행이 나가사끼 침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갔던 곳이 나가사끼 원폭 기념관이었습니다. 194589,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거예요. 75천명이 죽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핍복자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희생자 중 한분이 나가사끼 노래를 쓴 의사 출신인 나가이 다카시의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보여 주는 현장입니다. 이 분은 방사선학을 연구하던 의사였입니다. 원래는 무신론자였지만, 병든 환자들을 돌보며, 또 사랑하는 아내 미도리의 믿음을 보며 조금씩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러다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끔찍한 사건이 닥쳤습니다. 194589,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거예요. 그의 집도 폭발에 휩쓸려 아내가 그 자리에서 죽고, 가족과 이웃, 동료 수천 명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됐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치료하고, 죽은 사람들을 수습해주고, 불타버린 땅에 다시 집을 지어 나누어주고, 굶주린 이들에게 자기 몫의 음식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이 재앙 앞에서 서로를 증오하거나 복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사랑으로 섬기고, 서로를 안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는 그의 기도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상처 입은 손으로 누군가를 위로하게 하시고, 이 아픈 마음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덮게 하소서.” 여러분, 우리가 상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 상처를 움켜쥐고 살아가죠. 하지만 그는 그 상처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쓴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마음에도 용서하지 못한 상처가 있습니까? 누군가가 한 말, 한 행동이 아직도 가슴에 박혀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 상처를 안고 원수를 갚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5:44절에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가이 다카시는 그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해자를 향해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한 게 아니라, 더 크고 깊은 방법으로, 아픔을 사랑으로 바꾸어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반드시 자기희생이 들어갑니다.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바울은 고전 13:4-7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 말씀합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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