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을 향하여(4)- 하나님이냐, 바로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4-02-25 |
조회: 239
서점에 들렸다가 우연히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유발 하라리’가 쓴 책 가운데 『호모데우스』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호모’(Homo)는 인간이란 말이고, ‘데우스’(Deus)는 신,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유발 하라리 교수는 이 두 개의 단어를 합성하여 현세대의 인간을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 ‘하나님이 되어 가는 인간’이라고 정의하고 이 책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유발 하라리 교수는 지금까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가 세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기아(굶주림)와 전염병과 전쟁(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적은 기아(굶주림)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1692년과 1694년 사이에 계속된 흉년으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당시 인구의 15%인
280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이듬해인 1695년에는 에스토니아에 기근이 닥쳐 인구의 5분의 1이 죽었습니다. 그 다음해인 1696년에는 핀란드에서
인구의 20%가 죽었고, 1695년과 1698년 사이에 스코틀랜드에서는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어느 곳에서는 거주자의 20%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비만으로 죽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2010년에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100만 명 정도였는데, 같은 해에 비만으로 죽은 사람은 그 3배에 달하는 30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인류의 두 번째 적은 전염병입니다. 이 전염병은 1330년대에 흑사병이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휩쓸었는데, 그 전염병으로 인해 7,500만 명에서
약 2억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 자는 유라시아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넘는 수입니다. 잉글랜드에서는 흑사병으로 열 명 중 네 명이
죽어 흑사병 이전에 인구가 370만 명이었는데 흑사병 이후에 인구가 220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10만 명의 시민 가운데그 절반인
5만 명이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의학이 발달하면서 전염병으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었고, 21세기 들어와서도 몇 년마다 한 번씩 사스, 조류독감,
메르스 신종플루, 에볼라 그리고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도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사망자를 내게 했지만, 인간은 여러 치료제를 만들어
그 전염병의 두려움에서 벋어나게 했습니다.
인류의 세 번째 적은 전쟁입니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사망 원인의 약 15%가 전쟁과 같은 폭력이었는데,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비율이 5%로 줄었고,
21세기로 들어와서는 1%로 줄었다고 합니다. 2012년 한 해 동안 전세계의 사망자 수는 약 5,600만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12만 명,
폭력과 같은 범죄로 죽은 사람이 50만 명인 반면, 자살로 죽은 사람은 80만 명이고, 당뇨병으로 죽은 사람은 150만 명이나 됩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전쟁에
이는 화약보다도 당뇨병을 일으키는 설탕이 생명에 더 위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테러와 같은 폭력으로 인해 살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긴 하지만,
21세기에는 전쟁은 곧 모두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에 서로가 전쟁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류의 최대 적들을 극복한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예전에는 기근이나 전염병 등을 하나님의 심판이나 벌로 여겼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하나님
의 심판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의학적 기술로 인간 수명이 100세 시대에서 200세
시대로 옮아가고 있고, 예전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나 천재들이 수많은 시간을 노력해서 이룰 수 있었던 일을 이제는 인공지능인 AI가 순식간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 세계는 누가 정보를 지배하느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점점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인간이 원하는 것을 거의
다 누리며 살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인간사회에서 신은 더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까? 오늘날 엄청난 속도로 과학이 발전하고, 삶의 환경이 좋아지면서 사람들의
인식 속에 굳이 하나님의 자리, 전능자의 자리를 내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이나 문명의 발달이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
가 없게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약4: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시39:4-5절에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이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지난주도 보셨지만, 한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했던 모세는 드디어 바로에게 나아갑니다.
출애굽기 7장부터 12장까지는 모세가 애굽왕 바로와 대결을 하는 흥미진진한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모세는 바로왕과는
대결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게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막대기 하나 가지고 양을 치는 목자에 불과합니다. 40년 동안 양을 쳤습니다. 그러나 바로왕은 누구입니까? 세계 최강대국의
최고 권력자요, 천군만마를 소유한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모세하고 바로왕의 싸움은 표면적으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정도의 싸움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세가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어떻게 바로왕을 이기겠습니까? 목자가 왕을 이깁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7장부터 12장까지의
스토리를 읽어보면 모세는 대승리를 거두었고 바로왕은 처절한 패배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입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달랐다 하는데 있었습니다. 바로왕의 마음은 강퍅한 마음이었고 모세의 마음은
부드러운 마음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달랐기 때문에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모세는 승리하였고 강퍅한 마음을 가진 바로왕은 패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강퍅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 '굳어진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완전히 말라서 수분도 하나도 없는, 완악하고 완고한 마음, 고집 센 마음이
강퍅한 마음입니다. 본래 ‘강퍅하다'의 헬라어 ‘스쿨레뤼노’는‘말라서 단단해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강퍅하다는 말은 우리의 심령이 말라서
단단해진 것처럼 완악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심령을 강퍅케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은, 스스로 그 머리에 타는 숯불을 얹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강퍅한 마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진단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시간 강퍅한 마음의
증세를 진단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증세를 가지고 있을 때에 마음이 강퍅하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먼저, 출애굽기 7장3-4절을 봅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마음이 강퍅하게 되면 말씀을 듣지 않는 증세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적도 보여
시고, 표징도 보여주시고, 살아계신 증거도 많이 보여 주셔도 하나님 말씀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마음이 강퍅한 마음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애굽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립니다. 애굽왕 바로가 선선히 이스라엘백성을 놓아주지 않자 하나님께서 이 10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치신 것입니다.
바로가 통치하던 지금부터 약 3, 4천여 년 전 고대 애굽은 풍부한 노동력으로 대제국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피라미드나 룩소의 신전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짓고, 나일강의 홍수와 맞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풍부한 노동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바로 시대에 이 노동력은 주로 장정만
6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백성이 담당했습니다.
바로는 만일 이 엄청난 규모의 노동력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다면 나라를 지탱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을 놓아주지
못하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9번이나 되는 재앙을 당하고서도, 놓아줄 것처럼 하고 다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 장자재앙을
당하고 나서야 손을 들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10가지 재앙들은 점차 그 강도가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재앙을 당하고서도
버틴다면 다음 재앙은 당연히 앞의 재앙보다는 강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재앙들은 점점 더 강도를 더 해가다가, 마지막 장자재앙에 와서는
더 버티지 못하고 손을 든 것입니다. 오늘은 9번째 흑암 재앙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애굽의 고센 땅에 함께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 땅 전체에 흑암이 뒤덮여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러 있던 고센 땅에만 흑암이 드리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당시 고센 땅에 있었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됐을까요?
자기들이 머물러 있는 땅 밖에 울타리를 두르듯 짙은 흑암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그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애굽사람들은 모두가 그 흑암 속에서
두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흑암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하셨다는 아주 특별한 은혜의 체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흑암재앙은 어떤 신을 심판한 것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당시 애굽사람들이 섬기던 신들 가운데 최고봉인 태양신에 대한 심판입니다. 애굽은
사막의 나라입니다. 애굽에서 태양처럼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대시대부터 이 태양은 애굽사람들에게 신으로 추앙받아왔습니다. 이 9번째
흑암재앙은 이 태양신들과 바로에 대한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흑암을 보내시자 그들이 신중의 신이라 믿었던 아몬도, 가장 강력한 태양을 뜻하는
정오의 태양라도, 그 흑암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태양신의 아들이라는 바로도 흑암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들이 모두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데 위세를 떨던 바로도 연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백성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신이 누구신가 자기들이 믿고 섬겨야 할 신이 누구신가를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말대로 참 신이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이 애굽 땅을 떠나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가나안 땅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 이 시대에도 본문의 애굽시대처럼 영적으로 혼란한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참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교가 있고 참
다양한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종교다원주의 시대’입니다. 모든 종교를 존중해야 하고, 다른 신들도 인정하며 더불어 살자는 영적 분위기입니다.
최근에 바로를 신으로 추앙하듯 사람을 신처럼 부르는 일들도 생겨났습니다. 국민 MC라 불리는 유재석씨를 ‘유느님’이라 부르며 신과 동급이라고 부릅니다.
‘트롯신’이니 ‘장사의 신’이니, ‘투자의 신’이니 하며 이런 저런 사람들을 신의 반열로 높이기까지 합니다. 정말 영적으로 혼미한 시대입니다.
무엇이 신인지 분별할 줄 모르는 영적 분위기입니다.
사 45:5-6을 보면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외에 신은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흑암재앙은 바로 하나님께서 영적인 혼란 가운데 살고 있던 이스라엘백성에게 하나님만이 신이시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신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외에 신은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그 많은 신들 그리고 신이라 불리는 사람들 모두가 참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흑암재앙과 같은 과정으로
우리에게 이점을 알게 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 깨달아서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직 우리가 믿고 섬겨야 할 신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점을 깨닫고 고백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발하라리가 이야기한 호모 데우스는 인간 스스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지혜롭게 앞길을 모색해 가면,
신처럼 될 수 있다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바벨탑을 쌓고, 신에게 도전하자는 선동처럼 들립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교만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이번에 코로나 바이러스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우리가 새삼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기가 힘들 뿐 아니라, 더더욱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는 결코 자기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우리를 힘들게 하는 주변 여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안에 열정도 헌신도 점점 무뎌져 가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주저앉고 싶습니다. 자신감은 점점 없어지고 불안해지고 두려워집니다. 사는 것이 겁나고 무능한 자신 남처럼 앞서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힘이요. 힘입니다. 세상에 살게 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내 삶에 성령 충만이 없는데 어떻게 성령의 역사를 나타낼 수 있습니까? 내 안에 하늘의 생수가 말라버렸는데 어떻게 세상에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를 흘려 보낼 수 있습니까? 어디서 이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디서 회복이 되고 다시 부흥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나의 타성, 옛습관을 벗어버리고 십자가를
향해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을 의지하고
나갈 때, 새롭게 될 때 반드시 이 시대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역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가진 우리들도 죽음에 이를지라도 다시 부활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마귀의 권세를 이기신 것처럼, 자녀됨의 권세를 가진 우리에게도 마귀를 이기는 권세를 주셨으니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병들어 고생하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승리가 있기에 담대하게 병마와 맞서라는 것입니다. 때론 병들어 죽음에
이를지라도 우리는 병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가졌기에 승리는 우리의 것이니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결코 내 마음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기 바랍니다. 강팍해서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말씀을 마음에 잘 박힌 못처럼
받아들이는 삶이 우리 안에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마지막 까지 붙들어야 할 우리 시대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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