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사40:27-31 2023. 7/30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모두들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이런저런 이유들로 사람들은 그 마음마다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살아가면서 생기는 문제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능력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내 자녀가 어떻게 될지, 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내 남편의 회사는 어떻게 될지 짐작하기 어려운 내일을 걷고 있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면 불현듯 엄습하는 공포가 우리를 덮습니다.
어떻게 하면,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의 쳇바퀴를 멈춰 세울수 있을까요? 멈추고 싶다면, 정말 그것을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의 깊게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평안', 즉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눌리지 않던 그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이사야 40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노래하는 장입니다. 이사야는 총 66장으로 이루어졌는데 사1-39장까지는 주로 심판과 징계에 대한 메세지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40장부터는 바로 이런 징계와 심판을 벗어나 하나님이 회복시키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0장은 1절부터 “내 백성을 위로하라”하고 외치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리라”하고 위로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사실상 힘이 없습니다. 황폐화 된 땅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솔로몬이 지었던 화려한 성전은 무너지고, 히스기야가 견고하게 했던 성벽은 불탄 채로 그대로 남아 있었고 군대는 물론 만드는 것이 허락도 되지 않았고, 그럴 인구나 젊은이도 많지 않았습니다. 부도 없었고 그나마 포로지에서 이루어 놓았던 재산은 다 버려두고 오직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해서 돌아온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은 많고, 예전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사명도 느끼겠는데, 지금은 힘이 없는 것입니다.
Ⅰ. 지금 이스라엘의 처지가 절망 중에 있습니다. 27절
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여기 ‘어찌하여’란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답답해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원망과 불평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스라엘에게 이것을 깨우쳐줍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야곱아’ ‘이스라엘아’라고 두 번 부릅니다. 왜 이렇게 똑같은 사람을 두 이름으로 부를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위대하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상처와 오해가 있는 것을 본 이사야의 애절하고 가슴 아픈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하나님께서 수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 사정이 여호와께 숨겨졌다’는 것은 길이 막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사정을 알았다면 길을 뚫어주셔야 할 텐데 길이 막혀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 원통함을 풀어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 말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포로생활을 하게 된 이유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했고, 음란했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차례 경고하고 또 경고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경고마저 듣지 않았습니다. 그 일을 그들은 까맣게 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가 당한 것만 원통하고 억울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이 민족이 갖고 있는 고통과 아픔에 대한 원인은 규명하지 않고 결과만으로 상처를 받습니다. 왜 선하신 하나님이 악을 만드셨습니까? 기근과 지진과 태풍과 재앙ì �€ 하나님이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은 전쟁을 허락하셨습니까? 하나님께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굉장히 그럴듯한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노아시대에 홍수로 전 인류가 심판받은 것도 하나님께서 잘못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죄악이 심판을 몰고 온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것도 하나님의 실수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그런 심판이 온 것입니다.
오늘 이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는 기가 막힌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지구촌이 열대아로 고통을 당하고 빙하가 계속 녹아서 인류를 위협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환경을 관리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려서 이런 결과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자연이 신음하고, 태풍이 몰아치고, 쓰나미가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이 저지른 죄악과 전쟁과 욕심이 낳은 결과입니다. 지상의 식량은 모든 인류가 다 먹고 살만큼 충분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식량을 독점합니다. 하나님은 이 환경이나 우주를 부족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욕심이 전쟁을 일으키고, 독점을 만들고, 인간의 욕심이 극도의 빈부차이를 만든 것입니다.
지난 2015년, 코스타리카 연안에서 코피와 눈물을 흘리는 거북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코에 플라스틱 빨대가 박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별 문제의식 없이 플라스틱 빨대와 컵을 수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버려진 쓰레기가 수많은 피조물을 탄식하며 죽어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플라스틱 빨대 하나를 분해하는 데 50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1997년, 미국의 해양 환경운동가인 찰스 무어는 해류에 휩쓸려 다니는 쓰레기 섬을 발견했는데 대한민국 면적의 약 15배 정도의 크기이고 무게는 8만 톤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거대한 쓰레기 더미 때문에 수많은 해양 생물들이 먹이로 잘못 알고 먹었다가 죽게 되거나 피해를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쓰레기 섬 주변 지역에서 잡힌 어류를 조사한 결과 35%의 물고기 뱃속에 미세 플라스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전세계가 고통하는 이 열대아 현상은 인간이 환경을 관리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려서 이런 결과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자연이 신음하고, 태풍이 몰아치고, 쓰나미가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이 저지른 죄악과 전쟁과 욕심이 낳은 결과입니다. 이것을 이사야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의 사명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주저 앉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누구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 낙심과 고통 속에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복입니다. 우리가 바뀌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더 실감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모든 오염과 파괴를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복과 부흥을 원한다면 이사야는
Ⅱ. 참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28~29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여기서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는 뜻은 하나님에 대한 너희 지식이 일방적이고 너무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첫째,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만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계신 분입니다. 둘째, 그분은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셨고, 통치하고 다스리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지치거나 피곤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고 그 힘이 날마다 새롭기 때문에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도중에 포기하는 분이 아닙니다. 넷째, 하나님의 명철은 한이 없습니다. 그의 지혜와 그의 지식은 무궁하며 그의 분별력과 통찰력은 완벽합니다.
욥기서에 보면 이 사실을 잘 이야기합니다. 욥33:14절에 보면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한번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15,16절을 봅시다.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주님은 고통중에 있는 자를 찾아오십니다. 대낮에 찾아와서 말씀하실 때 그 사람이 잘 듣지 못하면 밤에 졸 때도 찾아오십니다. 밤에 졸 때 찾아와서 말씀하시는데도 그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꿈 속에서까지 나타나셔서 그를 교훈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특별히 찾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중에 어떤 고통을 안고 아픈 가슴을 억누르면서 살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은 남달리 당신과 대화를 나누려고 다가오십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불신앙을 쫓아 버리고 원망을 잠재우십시오. 성경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보세요.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조용히 기다려 보세요. 당신만이 들을 수 있는 기막힌 음성이 있을 것입니 다. 그것은 위로의 속삭임일 수도 있습니다. 깨닫게 하는 교훈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축복의 노래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고통을 대화의 통로로 이용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29절을 보십시오.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시고, 병든 자에게 건강을 주시고, 길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보게 하시고, 죽은 자에게 부활을 주실 것입니다. 크신 하나님을 보십시오. 왜 이제껏 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관점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관점을 바꾼다면 여러분의 삶에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축복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고, 더 이상 미래가 없던 사람도 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만났다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관점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음의 대상을 바꾸십시오. 그 생각을, 관점을 바꾸지 않는 한 삶의 고통과 저주는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하나님에 대해서 계속 기도하고 있으니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것입니다. 경험하지 못했고, 동의할 수 없더라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으로 생각을 바꾸십시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바뀌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28절을 보십시오.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시고, 병든 자에게 건강을 주시고, 길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보게 하시고, 죽은 자에게 부활을 주실 것입니다. 크신 하나님을 보십시오.
Ⅲ.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
사40:30-31절은 고백합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런 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 앙망이라는 말은 주님만을 믿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기대를 걸어본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여호와를 앙망함으로 나오는 이러한 새로운 힘입니다. 이 힘은 세상적인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힘으로서 영혼의 만족을 얻게(시 63:15) 하는 힘입니다. 소년들도 청년들도 피곤하여 지쳐 쓰러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는 주님이 새 힘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힘차게 올라가는 것 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 힘이 넘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독수리의 서식처가 몇 군데 있습니다. 독수리를 관찰하다 보면 놀라는 것은 그의 날아오르는 힘에 대하여, 그 힘찬 모습에 놀라지 않습니다. 실제로 높이 힘차게 날아올라서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일은 좀처럼 없습니다. 두어 번 날개 짓 해서 조금 올라가서는 그냥 날아 다닙니다. 놀라운 것은, 오랜 비행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긴 비행 시간 동안 거의 날개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땅에 서 날아오를 때와 먹이를 쫓을 때만 퍼덕이고 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날개와 몸무게의 비율도 한 역할을 합니다. 즉 양쪽 다 펴면, 큰놈은 거의 3미터 가까이 되는데, 몸무게는 기껏해야 3-5킬로그램 정도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잘 날지 않겠는가?
더 중요한 것은, 독수리의 날개의 깃털에 있습니다. 모든 깃털과 함께 특히 날개 끝에 있는 갈라진 깃털의 역할은, 날개 아래위의 바람의 속도를 다르게 만들어서 자연 상승력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작은 회오리바람을 만들어서, 독수리의 비행을 거의 무한대로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너무나 신기한 이것이 바깥으로 보기에는 독수리의 무슨 날개 근육의 힘 같이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바로 이 독수리의 날개 같은 힘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주의해서 볼 것은, “새 힘”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시편 103장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놀랍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독수리는 “강하게 되는 것”보다는 “새롭게 되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독수리는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 힘의 강력함보다도, 결코 지치지 않는 새로운 힘과 비행 능력을 매년 새롭게 함으로 여전히 하늘 동물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 곧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독수리의 날개 깃털 갈 듯이 결코 지치지 않고 새 힘을 얻으며, “달음박질을 할 때나, 걸어갈 때에,” 인생의 그 어느 때에라도 지치지 않고 승리하게 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특징이요, 특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회복을 넘어 부흥을 경험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봅시다. 성경은 아무나 이런 독수리의 날개 같은 저력을 주시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분명하게 언급하기를,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곧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자”만이 이 독수리 날개의 끊임없이 새로와지는 능력을 얻을 것입니다.
이제 폭염 속에서도 우리의 그늘이 되시고 이 무더운 여름 우리는 목장 연합 예배, 그리고 이번 주 학생, 청년들이 수련회를 갑니다. 바라는 것은 이 속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이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요6:29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그 은혜 앞에 설 때 회복 넘어 부흥을 맛볼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쳐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