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로16:25-27. 2020. 10/11
‘미래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과거 또는 현재의 상황을 바탕으로 미래사회의 모습을 예측하고, 그 모델을 제공하는 학문입니다. 1960년대부터 학문적 연구가 본격화되었고 오늘 정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가 되었습니다. 하도 세상이 빠르게 변하다 보니 앞으로의 미래사회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증폭됐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도 관심을 가지고 이 분야의 책도 많이 보고, 자료들도 검색해 보면서 나름대로 도움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깊은 회의를 갖게 됐습니다. 온통 세상을 이토록 뒤집어놓고 있는 이 코로나19사태를 예측한 미래학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코로나19사태가 언제 어떻게 극복될 것이라는 것을 명료하게 예측하고 있는 미래학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코로나19사태의 위기는 오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 끝이 날 것인지, 과연 끝은 있는 것인지, 끝나고 난 뒤는 또 어떻게 될 것인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겪는 어려움이 점점 더 심해져서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돼서 사람들이 흔들립니다. 마치 태풍 속에 나무 잎이 흔들리듯 점점 심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많은 어려움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함께 모여 예배를 마음껏 드리지 못하는 오늘의 상황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교회는 모여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성도들은 함께 모여 예배해야 힘을 얻고 성도들이 함께 교제할 때 얻는 기쁨과 위로가 있어야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데 소모임까지 꽁꽁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영적 전쟁이 치열합니다. 불확실한 상황은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상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무릎을 꿇는 일입니다.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긴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코로나가 끝나면…”이 아니라 코로나와 함께 일상을 지혜롭게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어려운 시기에 터치 153 새 생명 축제를 다음 주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모두가 아는 바이지만, 코로나를 겪으면서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너무나도 부정적으로 굳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모습에 실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가 끝난 이후 나타날 현상에 대해서 걱정가운데 첫째는 코로나가 잠잠해진다 하더라도 이전처럼 교인들이 모일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조차도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이 많기에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 아닌 초신자들 같은 경우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도 또 하나의 걱정은 코로나 이후 전도의 문이 막힐 것이라는 걱정입니다. 이제 코로나가 끝난다면 그렇지 않아도 전도가 쉽지 않은 시대에 더욱 전도하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심스럽지만, 우리가 마냥 주저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고후 13:5절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했습니다.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 힘든 시기에 전도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믿음에 대한 시험입니다.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심으로 세상을 이기게 될 줄 믿습니다. (요일5:4).
지금 바울은 로마서를 마지막 써 내려가면서 자신의 삶과 사역에 대해 이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씀을 마치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끝맺는 오늘 본문은 일종의 송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송영은 한 문장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 속에 복음의 핵심이 다 녹아 들어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계획이 웅장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지금 바울은 이 마지막 말씀만은 대필로 부탁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불편한 몸을 움직이며 그 하나님의 신비한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마지막을 써내려 갔다고 표현합니다. 저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 위대한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을 기록하면서 교회를 교회 되게하는 가장 위대한 비밀인 복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백함으로서 로마서를 맺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로마서 전체를 기록하면서 바울이 줄기차게 강조하고 가르치고 선포해 왔던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는 이유, 그리고 삶의 최종적인 목표가 바로 이 복음 때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왜 나의 복음이라고 했습니까?
Ⅰ. 복음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25절부터 27절까지는 길게 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한 문장입니다. 복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영세 전부터 세상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시고, 그것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알리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것을 온전히 알게 하시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 모든 민족에게 알게 하신 것이 모두 오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일이었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 지리를 깨달은 바울은 25절에서 자신이 믿고, 자신이 증거하고,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이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경험하고 체험한 이 복음 앞에 선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1절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삶의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자신이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남들이 비참하게 여기는 종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지성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가 있습니까? 바울 시대에는 ‘종’은 아주 경멸스럽고, 말하는 짐승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뿐만이 아니라 서신서 곳곳에서 자신을 종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냥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 것은 더 충격적인 일입니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의 반란과 신성모독의 죄로 사형당한 청년입니다. 결코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자기소개는 너무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의 종’.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삶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자신을, ‘사도로 부르시고 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의 소명의식이 넘쳐흐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밀착 되어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자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떼어내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바울 안에 넘쳐 흐르는 열정과 생명을 건 투지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요?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의식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소명감에서 나오는 힘은 대단합니다. 소명이 뚜렷할수록 선명한 인생이 됩니다. 선이 굵고 선명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확실한 소명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초점이 잘 맞춰진 렌즈로 사물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삶의 시작은 소명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신적 소명에 근거한 삶은 생명을 거는 삶입니다. 부르신 분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삶이 단순합니다. 부르신 자에게 집중하고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부르신 분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삶의 근거가 바울의 삶을 변화하게 하고 자기 삶을 바치게 한 것입니다.
Ⅱ. 그러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본문 2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영원 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부터 존재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때가 되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이 예수의 탄생은 인류의 최고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눅2: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 우리에게 오신 예수의 탄생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가 되는 것입니까? 마1: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무슨 말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자기 백성을 위해 희생양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서 세상에 오신 속죄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내가 받아야할 그 죄의 값을 그가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지난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수없이 많은 사연들을 보면 꼭 예수 이름 때문에 복 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름과 고통의 한 복판에서 이 이름 하나 때문에 위로 받고 용기를 얻었고 힘을 얻었던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떤 분은 병상에서 그 예수를 그 이름을 부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형수로 죽어가면서 뒤늦게나마 그 이름 예수를 믿은 것에 너무 감격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은 건축자가 내버린 돌맹이처럼 하찮게 내버렸지만 어떤 사람의 가슴속에는 그 것이 어느 보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귀한 보석으로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복음을 우리가 체험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문제를 만나도 흔들릴 수 있지만,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일상의 평범한 삶을 잃었고,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경제력도 잃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건강을 잃기도 하고, 어떤 분은 마음에 여유와 행복을 잃어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잃어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갖고 싶어 안달하는 그것들이 우리에게서 조금씩 사라질 때 우리는 조금 더 불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의 은혜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잃어도 복음의 은혜로 가득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 여기 본문 26절 끝부분 말씀입니다.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우리 인생은 복음으로 견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복음 안에 살면 인생이 흔들이지 않습니다. 복음 위에 세워진 인생은 마치 반석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복음 위에 세우지 않은 인생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복음 위에 사는 인생은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섭니다. 모든 것들은 각기 가는 길이 다릅니다. 배는 뱃길이 있고, 비행기는 항로가 있고, 차는 차도가 있고, 기차는 철길(레일)이 있습니다. 그 길을 갈 때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 길에서 벗어나면 불행해 집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생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갈 길은 오직 한 길 뿐입니다. 복음의 길입니다.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인생길입니다. 복음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마지막에 이렇게 찬양합니다.
Ⅲ.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27절에 보면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합니다. 이 모든 구원의 계획과 성취는 하나님의 일하심이었습니다. 몇해전에 백두산을 끼고 몇 군데를 잠시 다녀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백두산은 해발이 2744m 미터로, 우리나라에서 최고 높은 산이 아닙니까? 그런데 안내를 하던 선교사님이 천지에서 내려오다 길을 잃었는데 차로 밀림을 뚫고 나오는데 하루가 걸렸습니다. 초조하기도 했지만, 뭐, 조금도 지루하지가 않아요. 원시림으로 빼곡이 둘러 쌓인 길을 따라 끝도 끝도 없이 달렸는데도 여전히 그 산의 봉우리가 보였던 것입니다. 저는 백두산을 보면서 우주 만물 가운데서 가장 높고, 크시며, 영광스러우신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야, 백두산이 높은 산인 줄은 알았지만 진짜 높구나. 산도 높으니 몇 시간을 가도 그 밑에서 빙빙 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거늘, 이 우주 만물 가운데서 가장 높으시고 크시고 영광스러우신 주님이야 오죽하겠는가? 어디를 간다고 주님의 눈을 피하겠는가? 어디로 간들 그 크신 영광에 서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
자! 지금 바울은 감격에 벅차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메시지를 말씀합니다. 솔라 그로리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그렇습니다. 롬11:36절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로마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 바울이 참수형을 당해서 죽을 때, 그가 로마에서 가시적으로 이룬 업적이라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겨우 감방의 죄수들과 감옥 간수등, 지극히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한평생 애써 살아온 결과가 고작 그것으로 끝났다면, 바울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인생실패자와 같습니다. 겨우 그 정도의 삶을 위해 참수형까지 감수했다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가 참수형을 당한지 300년 만에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에 의해 로마 제국의 역사가 새로워졌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믿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변화의 역사를 믿습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면 나라가 새롭게 되고, 가정이 회복되고, 사람들이 변화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을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가능했습니다. 복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복음으로 우리는 자유를 누립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보고 낙심만 하지 하십시오. 불평만 하지 마십시오. 전도하는 삶은 복음의 빚진 자가 그 은혜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제 10/18일 우리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한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