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함께한 사람들 롬16:1-5. 2020. 9/27.
오래 전에 단기 선교차 인도네시아와 말레지아에서 사역을 마치고 한국에 오기 전에 싱가폴에 머문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CCC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의 소개로 우리 청년들이 아름다운 해변에 있는 숙소에 묶게 되었습니다. 해변에서 청년들과 야영을 하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해변에 야자나무 숲이 길게 형성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나무들 크기가 거의 비슷합니다. 튀어나오게 큰 나무나 또 지나치게 작은 나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야자나무 아닌 다른 나무도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나무들이 서로 엉켜있다는 것입니다. 뿌리가 서로 엉켜있고 줄기들도 많은 부분 엉켜있었습니다.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일부러 야자나무만 이곳에 심어 놓은 것이냐고? 크고 작은 나무들은 다 베어버렸냐고?’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워낙 태풍이 많은 지역입니다. ‘나무들이 서로 기대고 있어야 버틸 수 있습니다. 너무 큰 나무들이나 작은 나무들, 다른 종류의 나무들은 서로 기댈 수 없어서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위기가 다가오면 서로 기대야 합니다. ‘나’는 약하지만 ‘우리’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야 합니다. 그러면 위기를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전 4: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이제 우리는 로마서의 마지막 장인 16장으로 들어 왔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의 생애의 유일하고 최고의 비전이었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기 위해 자신과 함께 더불어 수고하고 있는 일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들의 수고와 희생이 없었다면 아마 수많은 난관 앞에서 좌절하고 쓰러졌을지도 모릅니다. 성령의 인도로 나선 이 사역의 현장에 이 무명의 사람들과 함께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나아갔을 때, 여기 등장하는 33명의 일꾼들은 정말 잊어서도 안 되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생애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겠습니까? 그러데 그 가운데 33명의 사람들만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우리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울까요? 하나님이 이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물론 이렇게 성경은 끝났지만, 지금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열심히 헌신하고 사역하는 자들의 이름을 그 책에 빠짐없이 기록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보고 우리는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이 나를 위해 희생하신 그 희생에 걸맞게 내가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은 자답게 이 땅에서 주님이 기억하는 성도가 될 수 있을까 도대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인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들은
Ⅰ. 주안에서 하나 된 사람들입니다.
본문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16절까지 보면 ‘주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이 9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주님 때문에’라고 표현해도 되는 단어입니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 새로운 영적자세를 가지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회심’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 속에, 또 믿음의 전통과 믿음의 영적 거장들이 늘 붙잡았던 주제가 바로 ‘회심’이었습니다. 회심은 과거의 죄의 삶을 뒤로하고 새로운 삶으로 진입하게 하는 출발 지점이 되고, 죄에 대한 심각한 통회와 각성이 일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삶이 BC와 AD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무언가 깨지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됩니다. 어제와 오늘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마음이 완전히 바뀌는 회심의 경험은 구원의 사건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회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즘에는 이것이 교회에 잘 나가고 있다는 정도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것과 회심의 문제는 전혀 다릅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녔어도 회심의 분명한 경험이 있지 않으면 그냥 교회만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은 중요합니다. 회심의 사건은 구원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삶과 신앙에서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는 헌신, 봉사, 선교는 자기 열심과 사회적 위치에서 하는 연약한 노력일 뿐 한순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큰 뼈대 속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이 표현이 될 때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어떤 환란과 유혹이 와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하나 되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붙들고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오늘 제가 여기 나온 분들 이름을 한분한분 다 소개해야겠지만, 이분들의 공통점을 가지고 살펴보려고 합니다. 10절에 보면 ‘아리스도불로’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사람은 헤룻대왕의 손자였습니다. 사회적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11절에 ‘나깃수’라는 클라우디오 로마 황제의 개인적인 비서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뵈뵈, 브리스길라, 마리아, 유니아, 드루보사, 버시, 드루배나, 루포와 그 어머니, 그리고 율리아와 자매 등으로 11명이나 되는 여자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여자도 사람인가?"하며 아예 여성들을 짐승 취급하는 여성차별이 심한 그 시대에 로마 교회의 일원으로 함께 주님께서 맡긴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서로 다름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은 이 구성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는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종의 다양성과 신분의 다양성, 그리고 이들 중에는 너무도 큰 상처를 가진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가 될 수 없는 현실을 이렇게 멋지게 하나로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은, 고난의 한 복판에서 그들 속에 역사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버린 자신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치료하신 그 은혜 앞에 자신들을 세우시고 불러주신 사명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이해하며, 격려하는 예수 안에서 하나 됨을 통하여 고난도, 핍박도 넉넉히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Ⅱ. 위로와 격려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여기 1절에 뵈뵈가 나옵니다. 1절을 보면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뵈뵈는 “빛을 발하다”라는 뜻인데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이 뵈뵈를 천거한다고 했습니다. 이 천거는 추천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속히 로마를 가려고 했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아 가지 못하고 먼저 뵈뵈를 보내면서 그 편에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2절)고 당부하였습니다.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개종한 유대인들로 이방인에 대해서 배타적이었습니다. 뵈뵈는 이방 여인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이라 하여 소홀히 하지 말고 정중히 영접하라고 당부하고 또 그에게 소용되는 물품을 도와주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왜 그토록 뵈뵈를 자상하게 배려하였을까요? 그 이유가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보호자’(프로스타티스)는 후원자를 나타내는 말로 큰 도움을 주었음을 말합니다. 그녀는 고난과 궁핍에 처해 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크게 도와주었음을 말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여러 계층의 성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냥 스쳐가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성도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떠난 후에도 잊을 수 없는 분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뵈뵈 집사는 그렇게 잊을 수 없는 집사였습니다.
3절을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브리스가와 아굴라 이들은 부부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동역자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어떤 이권적인 사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동업자라고 말하고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을 동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숭고한 목적을 위해 함께 희생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로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 두 부부를 이렇게 챙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4절을 보면 “저희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자기의 목이라도 내 놓았나니”라는 표현은 사형집행자의 도끼 밑에 자기 목을 대신 내놓는 상황을 표현한 말입니다. 즉 이는 바울이 전도하다가 극심하게 핍박을 받을 때에 그를 구하고자 이들이 극단적인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 브리스가(부리스길라)라는 이름은 본래 로마식이었기에 그녀는 로마인 여성으로 유대인 천막업자로 로마에 와서 거하던 아굴라와 국제결혼을 한 가정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글라우디오 황제 시절 유대인 추방명령이 내리자 그리스 고린도로 이주해 와 살다가 거기서 제2차 전도여행중인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행18장) 아마도 아굴라가 바울과 같이 천막을 깁는 동종의 직업을 가지고 있어 접근이 쉬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만남으로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제자요 동역자가 되어 함께 복음전도에 헌신하게 됩니다. 그후 바울이 에베소로 옮겨가자 이들 부부는 다시 에베소로 이주하여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합니다. 여러분, 이사 많이 해 보셨지요? 그런데 복음 때문에 이사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저는 자녀들의 학교 때문에 이사 가는 분들은 많이 보았습니다. 남편의 직장 때문에 이사 가는 분들도 많이 볼수 있습니다. 아파트 당첨으로 이사 가는 분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때문에 신앙 때문에 아니 전도 때문에 이사해 보셨습니까? 요즈음은 신앙 때문에 이사가는 것이 아니라 돈 때문에 이사 가고 교회도 오히려 쉽게 떠나지 않나요?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는 바울 사도를 도와 선교할 목적으로 적어도 두 번이나 그것도 나라를 바꾸면서 이사를 다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더욱 놀라운 헌신은 그들의 집을 교회로 오픈했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 교회도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고 에베소 교회도 한때 이들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후 로마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그치자 이들 부부는 고향과도 같았던 로마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고향이 그리워서 로마로 간 것이 아닙니다. 이번엔 자신들의 고향과도 같았던 로마, 그리고 세계의 중심도시인 로마를 복음화할 선교적 목적으로 돌아 간 것입니다. 자신의 목이라도 바칠 만큼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이 사람들이 그립지 않습니까?
Ⅲ. 여기 나와 있는 한사람, 한 사람이 다 바울의 사역에 인생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 33명의 일꾼들을 쭉 소개하면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성도의 교제가 아름답고 견고하고 영광스럽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안하라’의 의미는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격려하라, 위로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격려의 한마디가 고난의 현장에서 믿음을 가지고 산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한마디의 격려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비판과 정죄가 난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들리는 소리가 온통 비판과 정죄하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학생들은 교사를 비판하고, 고용인과 고용주들은 서로의 잘못을 비판합니다. 국민들은 지도자를 비난하고, 지도자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뜻하게 위로해 줄 사람이 참으로 없는 세상입니다. 사람과 이 사회를 세우는 격려의 사람은 더욱 찾아보기가 어려운 세대입니다. 누가 이 척박한 세상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정죄의 화살을 맞고 남몰래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 치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우리가 바로 격려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안에 잠겨 드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생명이 흘러넘치면 우리를 불행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확인하면 우리는 절대로 연약한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강력한 역사 안에서 구원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구원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구원의 장엄함, 풍성함을 알아갈수록 우리 삶에 활기와 감격과 당당함이 살아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수많은 절망 가운데에서도 위축되거나 우울할 일이 없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위기와 환란 중에서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날마다 일어나게 했던 것은 예수의 생명 안에서 흘러넘치는 생명의 파워가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한 해의 봉사가 끝났을 때, 아니면 나의 일평생의 봉사가 끝났을 때 나에 대해 주변은 어떤 평가를 내릴까요? ‘비록 세상적인 삶이 화려하진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잘했다고, 너 수고했다고, 너 애썼다고 인정받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 이제 내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너무 많이 지었기에 그 빚을 갚는 심정으로 섬겨야 합니다. 잠언 25:13절 말씀처럼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제 우리 모두 여러분의 처한 자리에서 일어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의 구원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한 생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