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판단하는 자 롬2:1-11. 2019. 3/24. 주일 설교
우리는 비판과 정죄가 난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이나 신문을 펴면 온통 비판의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어떻게 같은 사건을 가지고도 그렇게 다른 해석이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국민들은 지도자를 비난하고, 지도자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뜻하게 위로해 줄 사람이 참으로 없는 세상입니다. 사람과 이 사회를 세우는 격려의 사람은 더욱 찾아보기가 어려운 세대입니다. 누가 이 척박한 세상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정죄의 화살을 맞고 남몰래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 치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그렇다면 여기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은 누구를 말하고 있습니까? 여기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 우월감이 매우 강했습니다. 이것이 너무 지나쳐서 사람을 구분할 때도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사 람으로 구분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당시 이방인은 지옥의 불쏘시개감이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특권으로, 언약의 증표로 삼아 그것이 구원의 보증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 구원의 진리를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예수를 믿은 이방인이라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는 - 사도 바울을 죽이기 위한 40인의 결사대가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여기 ‘그러므로’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이 1장 전체의 말씀을 받고 있습니다. 풀어 말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이야기 합니다. 거기엔 자기 의를 드러내는 유대인도 포함이 됩니다. 저들은 지금 가장 무서운 ‘내어버려 두사’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죄와 무관하다’며 남의 죄를 지적하고 그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콩이야 팥이야 하지 말고 입 다물고 있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옛말에 "네가 한 손가락으로 남의 죄를 지적할 때 나머지 세 손가락은 네 죄를 가리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입 다물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서 어떤 허물이나 죄같은 것이 보이면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판단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남을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겠습니까? 여러분, 요즘 인사 청문회가 열리지 않습니까? 청문회에서 증인을 앞에 두고 호통을 치는 의원들에게는 아무 죄가 없습니까? 피고인을 앞에 두고 형량을 선고하는 판사나 검사는 아무 죄가 없습니까? 또한 교인들 앞에서 죄에 대하여 지적하고 설교하는 목사는 죄가 없는 목사입니까?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남을 판단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을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분이라면 특히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바라보는 일에는 밝지만, 자기의 문제를 보는 것에는 어둡습니다. 이것은 죄인의 특성입니다. 남의 죄는 잘 보지만 자기의 죄는 보지 못합니다. 죄인은 자기 눈이 가려졌기 때문에 자기 죄를 성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는 들보가 있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봅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도 나쁘지만, 더 나쁜 것은 자기도 그 죄와 동일하거나 더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판단하지만 그들이 이방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을 향해 비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자신 안에는 더 심각한 죄를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문제를 변호하고 합리화하려고 다른 사람을 더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남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한 후에 다윗이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단 선지자가 그를 찾아와서 어느 부자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부자집에 손님이 찾아왔는데 부자는 자기 집에 그토록 많은 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앞집의 양을 잡아다가 손님을 대접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다윗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당장 그 부자를 잡아 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선지자는 그 부자가 바로 당신입니다. 남의 가정을 쑥대밭으로 만든 당신입니다.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런 다윗처럼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남보다 더 의로운 척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아침, 묻습니다. 왜 판단합니까? 만약 주님이 나의 허물과 죄악을 따진다면 도대체 그 앞에 누가 서겠습니까?
Ⅰ. 은밀한 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3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십니까? 3절에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죄를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 중심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13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고 출소하는데, 교회 성가대가 와서 축하해주고 전도사가 두부를 주면서 이제 새로운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때, 금자씨가 한 말이 유명합니다. “너나 잘하세요!” 풍자적인 말입니다.
‘너나 잘 하세요’ 참 충격적인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은 들킨 죄인, 밖에 있는 사람은 안 들킨 죄인일 뿐입니다. 사람은 겉모습을 가지고서는 잘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가 아무리 언변이 좋고, 세상적인 명예를 가지고 있다 할찌라도, 그것은 겉모습뿐이지, 그 속을 들어가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당황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몇 년 전에 몇몇 노회 목사님 내외분들이 함께 삼척에 있는 환선굴에 가서 겪은 이야기를 간증삼아 한것이 생각이 납니다.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는 환선굴을 구경하고 마지막 지점쯤 이르렀을 때에, 옛날에 스님이 제자를 가르친 장면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는데 그런데 그 모형물 앞에 사람들이 동전이며 1000원짜리 지폐를 많이 던져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옆이 이런 경고 문구가 씌여 있었습니다. "가져가지 마시오. 촬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난기가 많은 어떤 사모님이 스님들 앞에 돈을 던져 놓은 것이 볼상 사나워서 그랬는지 장난으로 그랬는지, 거기에 있던 1000원짜리 지폐를 몇 장 주워 가지고 나왔습니다.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양쪽 호주머니에 지폐를 넣고는 나오는데, 입구에서 관리인이 조용히 부르더랍니다. 그리고는 사무실로 데리고 가더니 돈을 내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모님이 시치미를 뚝 떼고 '무슨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냐'고 반색을 하자, 모니터를 켜더니 사모님이 돈을 주워간 모습을 촬영한 것을 그대로 보여 주면서 '이래도 시치미를 떼겠느냐'고 다그치더랍니다. 하는 수 없이 한 쪽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 주었더니 다른 쪽 호주머니에 있는 것도 내 놓으라고 해서 양쪽 호주머니에 넣어왔던 돈을 다 돌려주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챙피하고 부끄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두침침한 동굴 안에서 한 행동도 다 카메라에 기록되어 변명할 수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도 우리의 죄가 그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나 감출 것이 없을 때가 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마치 아무런 죄를 짓지 않는 것처럼 시치미를 뗀다 하더라도, 또 완전 범죄에 성공해서 아무도 자신의 죄를 눈치채기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할 수도, 감출 수도 없는 그 때가 꼭 올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혹 남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죄를 범하거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판단을 받을 것 같습니까?
Ⅱ. 참고 계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은밀한 죄를 짓고도 그 죄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니까 반복적으로 같은 죄를 짓습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은밀한 죄를 짓고도 그 죄가 폭로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참으시는 것도 모르고 지속적으로 범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5-6절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도 기다리심의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무풍선은 산소가 충분한 곳에서는 터지지 않지만, 공중으로 올라가다 보면 어느 지점에선가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갈기갈기 찢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께 진노를 쌓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풍선이 압력에 의해 터지는 것처럼 진노를 쌓는 사람도 뭐,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같지요. 무서울 게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터져 산산이 부서지게 되어 있습니다.
Ⅲ.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야 합니다.
7절에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무슨 말입니까? 여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을 갈망하며 은혜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깨닫는 것은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소망이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쓴 바울도 자기의 의를 가지고, 그 열심가지고 교회를 핍박하고 수많은 성도들에게 고통을 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하는’ 그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순간 자신의 죄가, 자신의 그 교만함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는 평생 빚진 자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성도는 성전에 올라가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한 채 오직 자기 가슴을 칩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남의 눈에 있는 티만 보던 자가 자기 눈에 밖혀 있는 들보를 보게 됩니다.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나신 한경직 목사님이 기독교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 상을 수상하고 그 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여 예배를 드린 후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인사를 하기 위해서 나온 한경직 목사님의 입에서 갑자기 엄청나게 충격적인 말이 나왔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님들 가운데에 이 상을 받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나 한경직입니다. 이 상을 받아야 될 사람은 한국교회 성도님들입니다. 공산당이 싫어서 목숨을 걸고 내려왔던 우리교인들, 시간과 자기 재물을 아까와하지 않고 바치면서 한국교회를 일으킨 사람들, 그들에게 이 상을 돌립니다. 저는 이 상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사참배 앞에서 당당히 목숨을 던질 때에 감옥에 뚜벅뚜벅 걸어갈 때에 나는 부끄럽게 몰래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신사참배를 한 죄인입니다. 나는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서 자기 가슴을 치며 회개 한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던 입술로 자기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을수록 우리가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 안에서 겸손한 자가 되어 가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눈곱만큼도 구원을 얻을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고 남을 평가할만한 실력도 없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왜 그토록 십자가를 강조하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여나 자신에게서 자랑거리를 찾고 자신을 더 멋진 모습으로 포장하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삶을 산다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임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외모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든 잘못된 의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게 하신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삼십년을 믿었든 이제 믿기 시작했든 동일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줄에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끊어지면 살 자가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고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실패와 연약함을 보면서 판단하기 보다는 나도 저 자리에 있었다면 실수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자기 겸손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인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입니다. 깨달은 죄인과 깨닫지 못한 죄인인 것입니다.
저는 이 1장과 2장을 보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복음의 능력을 의지 하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도 흉몰스러운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알긴 알지만,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돌아서서 자신을 볼 때,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바울을 보세요. 어느날 이런 고백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와 같은 고백을 했겠습니까?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기독교역사상 가장 주님을 사랑했고, 그 말씀을 신뢰했던 그 말씀을 붙잡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 앞에 서면 설수록 느끼는 좌절감이 있습니다. ‘나는 선을 행하고 싶은데 행할 능력이 없구나! 어쩌면 이렇게 나는 좌절된 인간이냐? 어쩌면 이렇게 거꾸로 된 인간이냐?’고 고민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자기를 ‘죄인중의 괴수다’라고 까지 말합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존경과 칭찬과 신앙이 좋다는 말을 하지만 나는 나만이 아는 절망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 무력감, 육체로서는 도무지 주의 계명을 따를 수 없는 좌절감, 그리고 애쓰면 애쓸수록 고통이 더해지는 이 아픔이 바로 바울의 고민이었습니다. 뭐, 우리라고 다릅니까?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주저앉고 싶지 않겠어요. 자신감은 점점 없어지고 불안해 지고 두려워지고 사는 것이 겁나고 무능한 자신 남차럼 앞서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나중에는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붙들어 주는 손도 없고 기댈만한 것도 없고 결국은 우울증에 빠지는 비참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힘이요. 힘입니다. 세상을 살게하는 힘이요./ 벌떡 일어나게 하는 힘이요./ 자존심을 살려주는 힘이요, 절대로 기죽지 않는 힘이요, 비틀거릴 때마다 붙들어 주는 강한 손이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면서 살 수 있는 감사하는 만드는 힘입니다. 힘이 필요해요, 세상에 살게 하는 힘이 필요해요, 내 안에 없는 힘이 필요합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힘이 필요해요,/ 어디서 이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향해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붙들고 그 분의 그 놀라운 사랑을 내 마음에 다시 한번 체험할 때, 힘이 생깁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알아요? ‘너는 니가 똑똑하지도 못하고 머리도 둔하고 경쟁에도 뒤처지고 쓸모없다고 ,그래서 살고 싶지 않다고 그러지?’ 그러나 ‘야 나는 네가 얼마나 좋은지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네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었다. 너 그것을 잊어버렸니?/ 내가 이만큼 너를 사랑하는데 만족하지 못하겠니?/ 내가 너를 이 만큼 사랑해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 말하지 못하겠니?/ 너 인생의 짐이 무겁다고? 나는 너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세상을 살았어!!/ 그러나 다 지나가는 거야 나중에 내거 너에게 안겨줄 하늘의 영광은 세상의 고난과 비교가 안돼!!’
하루 10분만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10분만 묵상하십시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 앞으로 다가 가세요. 하루 십분만 그분 십자가 밑에서 흘러내리는 피에 여러분의 손을 담그고 세상 사는 것이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에게 자존심을 심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복음의 능력으로 주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주께서 나를 인내하며 허물을 들추어 내지 않고 기다리시며 나를 세우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도 일어 설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판단하는 정죄가 아닌 십자가의 그 사랑으로 주님이 나를 받으신 것처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강이 흐르는 은혜의 역사가 예배하는 자마다 이 보혈이 가득 채워 질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