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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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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4-17 시험하여 보라- 십일조 (말3:7-12)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6-04-17 | 조회: 1471


꿈을 잃고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도전을 주는 책이 있습니다. 좀 오래된 책인데 아들아, 머뭇거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라는 책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프랑스 요리 가운데 삶은 개구리 요리가 있다고 합니다. 이 요리는 손님이 앉아 있는 식탁 위에 버너와 냄비를 가져다 놓고 손님이 직접 보는 앞에서 개구리를 산 채로 냄비에 넣고 조리하는 것입니다. 이 때 물이 너무 뜨거우면 개구리가 펄쩍 튀어나오기 때문에 맨 처음 냄비 속에는 개구리가 가장 좋아하는 온도의 물을 부어 놓습니다. 그러면 개구리는 따뜻한 물에 아주 기분 좋은 듯이 가만히 엎드려 있습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약한 불로 물을 데우기 시작합니다. 아주 느린 속도로 서서히 가열하기 때문에 개구리는 자기가 삶아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기분 좋게 잠을 자면서 결국은 뜨거운 물에 삶아져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여러분을 조금씩 삶아가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지금의 내 삶을 불행과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흔히 어려운 문제가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어떤 상황이 나를 불행으로 몰고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개구리를 죽게 만드는 것은 뜨거운 물이 아닙니다. 개구리가 가장 좋아하는 온도의 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불행의 늪으로 몰아가는 것은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어떤 문제나 감당할 수 없는 큰 문제가 아니라, 아무런 감각도 없이 현실에 안주하려는 삶입니다. 지금의 물이 너무 좋다고 거기에 안주하는 순간 물은 조금씩 데워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나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러 온 우리 역시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이 정말 문제가 없는지를 깊이 고민하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대하는 말라기서를 보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적인 회의론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들 그것이 자신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 슬프게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민감하게 여기며 철저하게 회개하는 그런 행동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봐야 자기만 손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무슨 말입니까? 악을 행하며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더 잘 삽니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에게 사기치며 사는 사람들이 더 형통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안하무인처럼 살아도 뭐, 꺼떡없이 살아갑니다. 이런 일들을 보다보니깐, 신앙인들 역시 삶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나도 그들처럼 살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답습하며 살기도 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그런 갈등이 없었나요? 누구보다 헌신과 섬김의 희생이 있었는데 나에게 돌아온 것이 아무것도 없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부터 회의가 들어옵니다. 하던 일을 하다가도 손을 놓고 봉사하다가도 더 이상 봉사하지 않습니다. 물질생활도 더 이상 드림의 삶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봐야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풍조가 말라기 시대에 만연되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은 한마디로 총체적인 부패에 빠져 있었습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수술을 하려고 배를 갈랐는데 속에는 이미 암세포가 전이가 심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돼버린 상태입니다. 지금 이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돌아오라 돌아오라말씀하십니다. 유턴(U-turn)해서 오너라. 지금 같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간곡하게 돌아오라 돌아오라! 오늘 시작하는 7절에도 세 번씩이나 돌아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7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에게 돌아오라 말씀하신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시는 것입니까? - 여기에 살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뭐라고 말씀을 합니까?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겠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이 말은 이스라엘의 타락과 부패의 원인이 하나님을 떠나 물질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일조와 헌물을 도둑질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살길은 너희들의 삶을 거머리처럼 물고 있는 물질의 노예에서부터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돈을 잃는 것은 무엇보다 인생의 안전장치가 제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악착같이 물질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인생의 안전을 보장하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물질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가가 폭락하고 환률이 폭등하는 오늘의 현실은 우리에게 다시 ��메시지를 확인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의 경제위기 속에서 주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물질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질은 필요한 것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인정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물질은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야기를 풍자한 꽁트가 있습니다. 어떤 결혼 시기를 놓친 청년이 무엇이든 들어주는 요정이 들어 있는 요술 항아리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청년이 요정을 불러내자, 요정이 주인님, 무슨 소원을 들어 드릴까요?”하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청년은 지체 없이 저는 돈과 여자와 결혼을 원합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요정은 곤난한 듯 꼭 세 가지를 다 원하시나요?”하자 다시 청년은 , 저는 돈 여자 결혼 세 가지가 다 필요한데요했답니다. 그러면 할 수 없지요. 소원대로 해드리지요 그래서 그 청년은 얼마 후 돈 여자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돈 여자와 결혼 안하시고, ‘돈 인간으로 살지 않으시려면 돈에 대한 바른 생각, 돈에 대한 바른 헌신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요즘 온통 세상이 돈 이야기뿐입니다. 하루에 성인의 70%가 돈에 대해서 생각하고, 60%가 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고민하는 사람들 90%가 돈을 생각합니다. 돈은 사람의 행동과 시간과 삶을 지배합니다. 현대인의 우상()은 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돈 버는 것을 금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저축하는 것을 금하신적도 없습니다. 우리가 얻은 재물을 소유하는 것을 금하시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정말 중요합니다. 재미있는 조사가 있는데


기독교 교인들의 의식을 조사하는 연구 보고서들에 의하면 교인들이 목사님들이 설교에서 언급하지 말았으면 하는 주제 중에 1위가 돈(헌금)이야기이고, 2위는 정치 이야기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칼빈 당시에도 그런 문제의 제기가 있었던지 오늘날의 교회의 문제는 돈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돈에 대하여 바르게 말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말했다고 알려 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설교에서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많은 비유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대략 38개의 비유가 기록되고 있는데 그 중에 16개가 재물에 대한 비유라는 것을 아십니까? 거의 예수님의 설교의 절반이 돈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달란트이야기, 데나리온 이야기, 청지기, 과원지기, 품군, 부자이야기등은 다 물질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아닙니까. 약성경에 평균 10구절에 한번씩 물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복음서에만 288구절이 물질에 관한 이야기이고, 성경 전체에 무려 2300구절 이상이 돈과 재정에 관한 구절입니다. 성경은 돈에 대한 관심을 피해가지 않습니다. 돈은 삶의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돈을 피해서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돈은 삶의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돈을 피해서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필요한 것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인정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물질은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질이 목적이 되는 징후가 무엇일까요? 물질을 쌓아두는 그 자체에서 보람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서서히 물질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물질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닌 물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이 맘몬주의의 우상에 빠진 삶의 모습입니다.


마태6:24을 읽어 보십시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여기 재물이란 단어가 원어에 바로 맘몬(mamonas)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본래 우상 신을 뜻하는 말입니다. 재물이 내 인생의 목적이 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미 우상 숭배에 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경계할 것은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상 숭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은 악이 아니지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근원이라고 가르칩니다. 딤전6:10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


여기 지금 돌아오라는 것은 너희들이 집착하는 삶 - 물질만능의 삶을 떠나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 회복의 첫 단추가 바로 십일조와 헌물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냥 십일조 떼먹었다 그러지 않고 도적질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너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너 시간의 주인이 누군지 아느냐? 너 직업의 주인이 누군지 아느냐? 너 사업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생명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너희 나라와 온 백성 교회와 우주 삼라만상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나다. 하나님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청지기다. 너희들이 청지기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는 징표가 있어야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십일조다.' 그것을 선언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십일조는 돈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의 원리요 축복의 원리입니다. 이 십일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나의 생명, 직업, 물질, 건강, 자녀들까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소득 중 10분의 1은 축복의 종자 -하나님께 드릴 seed 씨이고 10분의 9 는 내가 먹을 food 음식입니다. 종자를 내가 먹어버리면 그 다음의 양식을 먹지 못합니다. 양식은 씨를 심어 거둡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둡니다. 믿음이 없으면 십일조 종자까지 먹어버립니다. 믿음이 없으면 10분의 110분의 9보다 크게 보이고 아까운 마음이 들어 드리지 못합니다.


신앙 생활하는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사실 십일조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드리는 것이지만 믿음이 어느 정도 자라지 아니하면 참 어렵습니다. 10만원 중에 만원을 떼는 것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천만 원에서 백만원을 떼서 십일조로 하나님 앞에 기꺼이 드리는 것은 그만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부자가 십일조 내기가 더 어렵습니다. 성교회에서 십일조 제일 많이 낸 분 몇 분을 제가 알고 있는데 1억을 내는 것을 제가 몇 번 보았습니다. 부동산을 팔았는지 모르지만 한 10억 중에 일억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곡간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상당한 수준의 믿음 없이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십일조 헌신이 어렵게 느껴집니까? 결국 돈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닙니까? 이것이 어떻게 번 돈인데--하는 생각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 모두가 한 생을 보내면서 돈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갖게 됩니다. 인간의 희로애락이나 오욕칠정이 대부분 돈으로 인해서 발생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늘도 돈 때문에 울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돈으로 인해 웃고 있습니까? 돈에 대해 남의 이야기처럼 말하고 인생을 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든 자기의 삶이 어떠하며 자기의 신앙이 어떠한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돈 앞에 서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돈 앞에 설 때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납니다. 돈 앞에 섰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돈이라는 것은 우리를 시험대에 올려놓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요즘 태양의 후예라는 프로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시청률의 광풍을 불게 했습니다. 40%가 넘는 시청률, 막장 드라마에 식상하던 우리에게 모처럼 좋은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거기에 보면 가끔 헬기를 타고 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특전사들이 배행기에서 낙하하는 모습이 멋있게 보이지만, 그런데 이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훌렁 몸을 던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지상에서 피 눈물 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제일 공포를 느끼는 높이가 11미터라고 합니다. 그래서 특전대원들을 훈련시키는 곳에는 10미터 높이의 점프대가 있습니다. 10 미터짜리 점프대 위에 딱 서면 눈 높이가 11미터가 되는 것입니다. 내려다보면 아찔하죠? 거기서 계속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 무섭지 아니할 때까지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 10미터 점프대가 두렵지 않고 맘대로 뛰어 내릴 수 있으면 그 다음에는 비행기에서도 뛰어 내립니다. 왜냐하면 그 이상 아무리 높아도 무섭기는 똑같으니까요. 어디든지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고 어느 목사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십일조가 무엇이냐면 교인들이 돈에 대하여 가장 공포를 느끼는 10미터 점프대라고. 그러니까 십일조에서 겁 없이 뛰어 내릴 수만 있다면 그 다음에 헌금에 대해서는 자유 합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 드릴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쌓아 놓을 수가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한번 물어 보십시. 헌금 앞에, 돈 앞에 여러분을 세우고 하나님에게 내가 누군가를 물어 보십시오.


여러분, 헌금하기가 왜 어렵습니까? 아깝죠, ? 왜 아깝습니까? 이 돈이 어떤 돈인데 내가 어떻게 땀 흘리고 내가 어떻게 열심히 일해서 벌었는데 그런데 내가 일할 수 있었던 건강, 누가 주셨습니까? 나의 지혜,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주께서 건강을 주시고 주께서 지혜를 주시고 주께서 여건과 환경을 마련해 주시고 주께서 도와주셨다면 나의 삶은 전적으로 그 분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나의 성공의 원인, 나의 성취의 원인,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 이 사랑을 상실하면 우리는 말라버립니다.


여기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당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을 한 이스라엘의 삶이 어떻습니까?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슨 저주를 받습니까? 무슨 저주를 받았는지 11절을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이 축복의 이야기를 뒤집어 놓으면 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함으로 말미암아 황충이 생겼다는 것 입니다. 황충이 무엇입니까? 곡식 가운데 날라 다니는 무서운 메뚜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십일조 생활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바치느냐 병원에 바치느냐, 교도소에 바치느냐, 경찰서에 바치느냐, 자동차 공장에 바치느냐, 그 차이 뿐 입니다> 십일조 드리지 않으면 황충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십일조 액수 이상이 병원비로 나가고, 어떤 사람은 사기 당해서 십일조 이상을 손해 봅니다. 그것도 아니면 도둑이 들어와서 십일조 이상을 털어 갑니다. 아니면 차만 세우면 티켓을 땝니다. 자녀들이 여러가지로 사고 치므로 말미암아 뒷처리하느라고 돈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바쳤든 간에 십일조는 다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토지의 소산이 없습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아무리 뿌려도 뿌린 만큼 다 거두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과실이 기한 전에 다 떨어집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 중간에 다 망칩니다. 그것이 저주 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거지꼴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철저하 게 십일조 생활 하면서 주의 복음을 힘 있게 증거 하는 교회는 날마다 힘차게 부흥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10절을 보십시오. 선지자는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하나님을 축복을 시험해 보라고 초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기 '나를 시험하여...' 이 말은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했는데 여기에서는 시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시험하라'는 말을 '증명하여 바라, 확증하여 바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나그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게 주신 재물은 나만을 위한 소유가 아니라 잠시 맡겨두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나만을 위해 땅에 쌓아두면 곧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주신 재물을 선하고 아름답게 사용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만을 위해 쌓아두고 즐기려다가 그 생명을 거두어가면 그것이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1858년 영국에서부터 독일로 건너와 유학하고 있었던 여학생 하나가 있 었습니다. 22살 먹은 여학생, 목사님 딸이었어요. 이 자매도 소위 nominal Christian 명목상의 기독교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별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공부하다가 병이 들었어요. 자기 친구가 초청을 했습니다. 독일의 뒤셀도르프라는 친구의 별장 같은 저택에 초청을 받아서 왔을 때 친구의 집 복도를 걷다가 그림 한 장이 이 자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유명한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 에크 호머, ‘이 사람을 보라.’ 빌라도의 법정에서 채찍을 맞고 가시의 면류관을 쓰고 고난 받고 모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받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던 그림입니다.


갑자기 그림이 자매를 잡아끌고 있었습니다. 얼어붙듯 그 그림 앞에 섰습니다. 그림 아래 글귀 하나가 있었어요. 이 글귀가 자매의 가슴을 확 사로잡았습니다. 이 글귀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나 너를 위해 이렇게 고난을 받았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주느냐? 갑자기 자매의 눈에서는 눈물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잊어버리고 나를 위해 희생하시고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망각하고 살았구나. 주님 이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드리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날 밤 집 에 돌아온 자매는 붓을 들어서 그 그림에서 받았던 감동과 자기 헌신의 결심을 한 편의 찬송시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찬송가 311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을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을 주느냐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생명 그 자체를 주셨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 앞에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시험하여 보라!! 책임져 주시겠다. 이제 우리의 몫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드려지는 전체에 대한 헌신, 그 헌신의 시작은 십분의 일에 대한 헌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 이 헌신을 주님께 드리셨습니까?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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