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우리 인생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과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말은 내 말이 아닙니다. 이오니카 선교사로 떠났다가 꽃 한번 피지 못한 채 순교한 짐, 엘리어트의 이야기입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에 인생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도, 부도, 명성도, 성공도, 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설령 내가 그것을 누렸다 할찌라도 바닷물을 들이키듯 갈증만 더 날 뿐입니다. 그러나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붙잡고 계신 예수 바로 나의 주님입니다. ‘젊음’은 지나갑니다. ‘명예’도 지나갑니다. ‘인간적인 야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주 앞에 마지막에 순결하게 서기 위해,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으로 주 앞에서는 놓칠 수 없는 마지막 영광을 위해 세상 적인 잣대를 포기하는 자, 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공생애를 시작을 하시기전에 광야에서
성전에서 뛰어내리고 천사들이 와서 발을 붙들어 주는 일은 신기한 일이기는 하지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을 해서 얻어지는 영광은 헛된 영광으로 끝까지 붙잡아 둘 수 있는 참된 영광은 아닙니다. 사탄은 끝까지 붙잡아 둘 수 없는 헛된 영광을 예수님으로 하여금 붙잡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십자가를 놓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끝까지 붙들 수 없는 헛된 영광을 버리고 결코 놓칠 수 없는 십자가를 붙잡으심으로 사탄에 대하여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과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것에 인생을 투자하십니까? 오늘 본문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영어 성경에 보면 “I must on my way!" 이는 꼭 하시겠다는 강한 사명의 의지가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결코 이 일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앞에 단락을 보면, 일단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까 빨리 떠나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헤롯’은 ‘헤롯 훈셕캭’를 가리킵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 대왕의 아들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자기 동생 필립의 부인이었던, 헤로디아와 눈이 맞아서 그를 자신이 아내로 빼앗았습니다. 이것을 세례 요한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자, 헤로디아의 딸의 요구로 세례 요한을 처형을 시켰던 인물입니다. 그가 이제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참 고마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미리 알려주고 빨리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십자가의 길을 버리고 잠깐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그 일을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면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모하리만큼 그 길을 가시려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바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이것은 피한다고 숨는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해결하고 구원의 자녀로 삼기위해 이 값비싼 희생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만큼 내 가 과연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까?
저희 가정이 한번은 식사를 하러 나갔는데 그 식당에 천방지축처럼 뛰노는 아이-,, 4살이 채 안된 어린 아이를 야단치는 엄마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들은 그 어머니의 말 “난 너하고 다니면 굉장히 창피해, 왜 밖에만 나오면 엄마말도 듣지 않고 네 맘대로 하려고 그러니? 너하고 있으면 너무나 창피해!”가 제 가슴속에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하나님 앞에 제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일을 잘하지 못합니다. 실패도 자주 하고, 하라고 명하신 일을 거역하기도 잘합니다. 심지어 사탄이 보기에 죄를 행하고 나아가서 사람들 보기에도 부끄러운 일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사탄이 주님께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안두익이라는 저 친구, 저렇게 퍼주어도 퍼주어도 소용없는데 왜 사랑하시지요? 죄 짓고 회개했으면 그만해야지 늘 같은 생활 반복하는 어리석은 저 인간을 왜 그토록 사랑하죠? 하나님 실수하셨어요. 저 보세요! 오늘도 하나님 것보다는 자기 것 찾는 저 비뚤어진 마음 좀 보세요. 투자가치가 있나요? 하나님 실수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두익! 난 너를 보면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해. 내가 너를 얼마큼 사랑해야 네가 정신을 차리니? 내 아들까지 주었는데 너는 아직도 그 옛날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니? 옛날 회개했던 것을 오늘 또 회개해야 하는 네가 나는 정말 역겹고 지겨워! 너를 보면 정말 천사들과 마귀 앞에서 부끄러워 죽겠어!”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난 네가 죄를 지을 때 슬퍼하면서 너를 사랑해! 난 네가 믿음 안에서 살 때 기뻐하면서 너를 사랑해! 난 한번도 너를 버린 적이 없고, 한번도 너를 귀찮게 여긴 적이 없고, 한번도 너를 무시한 적이 없고, 한번도 너를 모른 척 한 적이 없단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도 무덤덤해요. 별로 감동도 받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연약한 질그릇 같은 존재라는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큰 죄인임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34절을 보면 주님의 마음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백성들을 향해 주님의 그 심정이 어떤가를 보여주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여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암탉이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에 품듯이, 얼마나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고 했느냐! 그러나 너희들은 원하지 않았다.’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본능입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는 것은 그 새끼가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내가 몇 번이나 너희를 모으려고 했는데, 너희를 지키려고 내 한 목숨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너희를 사랑했는데,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 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절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에게 거절을 당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호의를 거절당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진심을 거절 당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자식에게 거절당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사람에게는 거절당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거절당하는 것처럼 참담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은 자신의 그 사랑을 거정하는, 받아들이지 않는 그 도성을 향해 가십니다.
눅 19:41절에 보면 마침내 주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막상 멸망당할 예루살렘이지만 당신의 눈으로 보니까 가슴이 미어터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우신 것이 3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한 번, 그리고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있는데 그 때에 통곡하며 우신 것으로 증거합니다. 그리고 여기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는 장면입니다. 여기 ‘우시다’라는 헬라어는 ?클라이오(κλαιω, klaiw)'인데?“소리를 내어서 울다”, “통곡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죽음과 관련이 있을 때 흘리는 눈물입니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흘리는 눈물을 우리가 압니다. 주님께서 그런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깨우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저들을 보고 우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나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신 분입니다. 하늘 영광을 포기했죠. 이 땅에 오셔서도 재대로 된 방에서 태어나지도 못한 채 구유에 나셨고, 어릴 때부터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고 지내셔야 했습니까? 어찌 그뿐입니까? 공생애를 감당하실 때 한번은 제자들에게 이런 탄식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쏟으신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사랑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도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당신의 백성을 품으려해도 거절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과가 어떤 것입니까? 35절 상반절을 보세요.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예수님의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30여 년이 지난 후, 66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쳐들어 왔습니다. 그 때가 마침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주민들과 순례자들로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디도 장군은 3일 만에 예루살렘 주위에 토성을 쌓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망을 가지 못하고 갇혔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무려 4년 동안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요세프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 당시 로마 군인의 잔인함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당시 성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아사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내 바닥에 패대기를 칩니다. 이 때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약 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고 합니다. 또한 도망간 유대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살던 장소를 찾지 못하도록 성전을 비롯한 전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 로마 군인들 사이에 돌과 돌 사이에 보물이 숨겨있다는 소문이 돌아 성전의 돌 하나 하나를 철저하게 들어내서 70여 차례에 걸쳐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예루살렘은 파괴되었습니다. 이런 미래의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우시지 않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I must on my way!’!는 나는 가야할 길을 간다는 그 십자가는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오직 주님만이 감당할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너무 고독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주님이 공생애 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지켰나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에 예수님 주변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늘 예수님과 함께 하던 제자들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벳새다 광야에는 남자만 5천명이 모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군중들이 몰려들었고, 가버나움에서는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환자를 데려갈 수가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병자를 달아내려야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 리고에 들어가셨을 때에는 삭개오가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 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야 겨우 예수님을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타나시자 수 뮌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도 했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며 예수님을 주목하여 관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 십자가의 길에는 어느 누구도 함께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되도록 기도하셨지만 제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민하시고 슬퍼하시며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하셨건만, 제자들은 모두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마26:38절에 ‘내가 지금 고민되어 죽을 지경이 되었노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어느 누구도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종교지도자들이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예수님을 몰아붙였지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위해서 항변 한 번 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조차도 멀찍이 예수님을 뒤따라 가다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아무도 ‘우리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고, ‘우리가 3년 동안 겪어본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성전을 모독할 분이 아니고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노라.’고 예수님을 위해서 변호해 주지 않았습니다. 심문을 받으실 때에도 예수님을 철저히 외톨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실 때,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풀어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살인자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 누구를 풀어주기를 원 求윰?’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살려주어야 한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안 된다.’고 소리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고독하게 십자가를 향해 가셨고,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 없었고,아무도 예수님의 편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오직 홀로, 고독하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올라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의 길입니다.
어제 국민일보에 나온 글을 보니까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한생을 믿음으로 산 분들의 이야기를 특집으로 실었습니다. 그 중에 한분인 ‘바보의사’ 안수현의 글이 실렸습니다. 이 분은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병원의 내과 전문의로 일을 하면서 틈틈히 ‘스티그마’(Stigma, 흔적)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던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서른 셋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유행성출혈열 이라는 병으로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남겨두고 급작스럽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33세의 한 젊은이의 장례식에는 4,000명이 넘는 조객이 몰려들었으며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그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는 접속이 폭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분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일까를 신문에 그 내용을 잘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치료하던 환자가 숨지면 그의 장례식에 가 유족을 위로하고, 퇴원한 환자의 생일에 집을 찾아 선물을 전하는 의사였습니다.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2000년 의약분업으로 의사들이 전면 파업을 했을 때도 그는 환자들을 위해 병실을 지켰습니다.
그를 생각하는 분이 ‘그 청년 바보의사’란 책을 썼는데 거기에 보면 안의사는 그리스도인을 혈관(Vessel)에 비유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의학적으로 혈관이다.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그리스도인을 통해 흐르기 때문이다. 혈관인 그리스도인이 더 많이 나누고 베풀수록 더 많은 생명의 피가 흐르게 된다.’ 점점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 이 세상 앞에 요즘처럼 빛을 잃고 맛을 잃은 우리 성도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흔적이 없는 정말 부끄러운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무언가 이분의 삶은 깊은 의미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어떤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자기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이 고난 주간에 ‘십자가와 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왔습니다. 이 주제는 우리 믿는 자에게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사는 사람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식 없이 사는 사람과는 그 삶에서 엄청난 차이가 생겨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갖고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까?’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 문 都求. 이제는 ‘어떻게 사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일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인식을 하고 사는 자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 사명을 흔들림이 없이 감당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의 신앙의 진위를 확인해 보십시오. 교회라는 곳에서 기독교의 문화를 익히고 봉사하기 이전에 반드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이 농축된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것 없이 교회에 다니고 봉사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길에서, 우리의 삶에 수많은 사건과 계획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붙들고 있는 이념도, 철학도, 사상도, 내가 가진 경험도 시간이 지나면 낡아 버립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영원합니다. 아무리 깨어지고, 망가지고, 상했어도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가 다가가면 다시 살아나는 대반전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진지하게 십자가 앞에 서 본 적이 있습니까? 그때 내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아직도 거리끼고 미련하게 보입니까? 십자가가 부끄럽습니까? 이 세상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그 십자가가 자랑스럽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복음이 아니라면 그 신앙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곳에 임하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나라의 평화, 그 나라의 사랑, 그 나라의 용서, 그 나라의 능력, 그 나라의 사유함, 구원이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은혜의 샘이 솟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복음의 출발은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축복이 일주일 내내 아니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