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혼을 사랑하십니까? 막2:1-12. 2015년 10월 25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10-25 |
조회: 1133
터치 153 새 생명 축제를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다음 주면 그 동안 기도해왔던 전도자들 , 태신자들을 교회로 초청하는 뜻 깊은 시간을 우리가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우리 모두는 '전도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간접적으로 들어왔습니다. 너무 자주 듣다 보면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열 번을 들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안 들은 사람과 같습니다. 1년 동안 배워 왔는데도 여전히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다시 배워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열정의 불꽃을 가슴에 안고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원칙적으로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실까요? 복음을 전함으로 구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선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보냄 받은 예수님께서는 공생 에 기간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씀 전하는 데 모든 시간을 투자하셨습니다.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하늘나라로 올리신 다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입을 열어 이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임하신 교회는 복음을 증거 하게 됩니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가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그리고 온 세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날이 올 때까지 복음전하는 일을 중단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본문 이야기의 핵심은 주님과의 접촉과 그 결과인 변화입니다. 주님과의 접촉이 없는 곳에는 영혼의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접촉이 있어야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태신자가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교회로 인도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자! 본문을 보십시요. 병이 들어 하루 하루를 절망 속에 보내야만 했던 한 중풍 병자를 침상 째 메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이 친구들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의 친구를 돕기 위해서 네 명의 사람이 이 한 생명을 위하여 펼치고 있는 사랑의 드라마, 한 영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이 사건에서 한 생명의 소중함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중풍병은 뇌일혈 등으로 인해 신체의 일부나 반신 또는 몸 전체가 마비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는 병이 아닙니까?
그래서 중풍 환자는 말하는 것은 물론 걸을 수도 없고 몸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도 없었기에 타인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남편을 죽이고, 군대에 안 가기 위해서 독약을 술에 타서 아버지를 죽이는 무서운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데 이 병든 친구를 위하여 배려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도와주려는 마음이야말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배려인 것입니다.
1. 그런데 주님은 이들의 이 헌신적인 사랑의 동기가 바로 믿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여기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 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친구를 고쳐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 확신과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그들을 절망의 자리, 체념의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수고로움과 번거러움을 무릎 쓰고, 친구를 들것에 메어 가버나움까지 온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한 여 집사님이 자기 남편의 구원을 위해 일년을 작정하고 새벽마다 기도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년이 지나가는데도 남편은 좀처럼 변화의 징조를 보이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한번만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교회 좀 나와 달라고 호소해도 요지부동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기도회에 가고자 막 집안을 나가려 하는데 현관의 남편 구두가 눈에 뜨이더랍니다. 그 순간 갑자기 한 영감이 스치더랍니다. 그날 새벽 그녀는 남편 구두를 싸가지고 교회에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당 제단 앞에 나아가 엎드려 이 부인은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 남편의 구두부터 당신 존전에 나왔사오니 이제 이 구두 주인이 나오게 하소서”
기도하면서 슬며시 자기 한 짓이 스스로도 웃음이 나오더랍니다. 그런데 그 순간 빙그레 웃으시는 주님의 모습이 떠오르며 주님이 자기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이 생기더랍니다. 집에 가서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당신, 단단히 미쳤군”하더니 그 다음 주일부터 남편이 교회 나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남편에게 “그때 어떻게 날 따라 나올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소원하는 당신의 바램을 외면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내의 믿음이 마침내 승리한 것입니다. 아니 주께서 그녀의 믿음을 보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내가 도울 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와야 할 그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데리고 가면 주님은 이 사람을 도울 수가 있지 않겠는가? 바로 여기서부터 그리스인들의 사랑의 사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도와 줄 수 있는 도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주님이라면 그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합니다. 이것이 이웃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의 출발점이 되어야 함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2. 여기 이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네 친구는 예수님께 혼자 오지 않고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까닭은 소문을 듣고 단지 구경 온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가지 이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픈 친구를 데리고 온 오로지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고침 받겠다는 것입니다. 들것을 메고 오는 그들의 마음 속을 지배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것은 새로운 기대이고 희망입니다. 그러나 들것을 메고 온 네 친구는 생각지 못한 일을 만났습니다. 몰려 든 사람들이 많아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갈 수도, 문 안으로 들어 설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 접근이 불가능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표현은 없으나 중풍병자 보다 더한 병자들도 와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다가 이런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계획을 멋있게 했는데 처음부터 막히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작심을 했는데 이런 저런 방해가 나타납니다. 인생의 가치 있는 일은 그냥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큰 축복은 그냥 굴러 오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가치 있는 일은 가치 있는 비전이, 가치 있는 계획과 목표와 합당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은 그 기적을 만날 만한 믿음이 그 뒤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는 응답은 그 응답을 만날 만한 기도가 그 뒤에 있어야 합니다. 난관에 부딪힌 네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습니다. 한 가지 선택은 사람이 많으니 문 밖에 들것 내려놓고 그 곳에 자리 펴고 앉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선택은 다음 기회를 기다리자는 말로 서로 위로 하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선택에 머물게 됩니다. 이 두 선택은 나중에 추억거리는 되지만 아무런 결과도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거리는 되지만 기대했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친구들은 누구도 생각지 못한 다른 일을 저질렀습니다. 지붕을 뜯기로 한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이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까요? 물론 당시의 팔레스틴의 지붕을 오늘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완벽한 현대 건축물의 지붕으로 연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평행으로 놓여진 목재들 위에 막대기를 엇갈려 놓고 그 위에 갈대, 나뭇가지 그리고 엉컹퀴등을 놓고 약간의 흙을 덮은 정도의 지붕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을 뜯는 것은 여전히 모험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붕을 뜯는 동안 흙 부스러기가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떨어졌을 것이고 사람들은 놀라며 이 웬 무식한 작태냐고 소리쳤을 것입니다. 무례하다고 비난받아야 마땅할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내 친구를 살려야 한다. 우리 친구 살려야 한다. 이 한 사람의 친구를 살리기 위하여 이웃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은 이 무모하기조차 한 이 행동을 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었어요. 행함이었어요. 우리 역시 태신자를 세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더 나아가 그들을 전도하는 모든 과정 속에 비로서 한 생명이 새로운 삶을 그리스도안에서 시작하게 될 때 그 보람, 그 기쁨은 경험을 안 해 본 사람은 알 길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네 친구들의 결단의 또 하나의 특성은 희생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일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냈습니다. 지붕을 뜯는 과정에서의 남들의 비난과 항의를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아마도 친구가 고침 받은 후 이들은 상당한 지붕 값도 보상의 차원에서 지불했을 것입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위대한 일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구원받기를 진실로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희생의 값 지불을 각오하십시오. 여러분이 전도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식사를 함께 하십시오. 약간의 돈도 쓰십시오. 그 정도의 희생으로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위대한 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을 들고 왔던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변에 성경을 들고 서서 복음을 전하려다 40대 젊은 나이에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희생되었습니다. 그의 주검이 장사나 제대로 치러졌겠습니까? 시체가 어디로 갔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는 인생을 미친 것처럼 살았습니다. 왜냐면 그 생명을 바칠 때 하늘로서 오는 놀라운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전라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해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익사했습니다. 세상 사람이 보면 미친 짓이라 했을 것입니다. 그는 유능한 의사요 학자였습니다. 그에게는 분명히 안전하고 편한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마다하고 성경을 들고 전도하러 다니다가 물에 빠져 허망하게 죽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이것이 단지 그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왜 우리는 내 한 목숨을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주를 위해 헌신하지 못할까요? 저는 우리의 구원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이면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희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은혜에 감동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조그마한 수고로부터 큰 희생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지 값을 치르려고 합니다. 바울도 그런 사람입니다. 행20:24절에 보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처럼 자기 자신 전부를 불태울 수 있는 열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어두움에서 깨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 앞에 환희하는 새 생명으로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3. 사실 본문의 네 친구들이 예수님을 통해 자기 친구 중풍병자에게 주어지기를 기대한 선물은 단지 중풍병의 치유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나아온 그에게 예수께서 첫째로 선언하신 말씀은 중풍병의 치유 선언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5절을 보십시오. 그의 제일성은 무엇이었습니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였습니다. 물론 이 대답은 중풍 병자가 기대 했던 대답은 아니었을 거예요. 중풍 병자가 기대한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네 병이 나았느니라'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것은 중풍병자가 기대한 대답은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중풍병자의 근본적 필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병 고침보다도, 육신의 병보다도 더 중요한 근본적 필요를 보신 것입니다. 그 필요는 죄 사함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무엇 때문에 오셨어요? 자, 그의 탄생을 예고하는 천사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뭐라고 하라? '예수라 하라'. 예수의 뜻이 뭡니까? 구원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구원. 그것을 위해 오신 거예요.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십자가로 가신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던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삶의 딜레마, 이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생은 성공하고도 마지막은 실패입니다. 파산입니다. 파멸입니다. 절망입니다. 심판입니다. 죄 문제 해결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침, 거기에 서기관들이 있었는데, 서기관들이 흥분합니다. “아니, 저 사람이 누군데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가 있단 말인가?”. 흥분했어요. 그 흥분은 어쩌면 타당한 것이 아닙니까? 이유 있는 흥분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죄를 용서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들이 모르고 있었던 한가지가 있었는데, 무엇을 몰랐습니까?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이시오. 우리의 죄를 사하실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모른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거예요. 예수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대신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받으시고 골고다의 언덕에 보배로운 피를 떨구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 이 없느니라." 그의 피 흘림으로 용서받은 사실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근본문제의 해결입니다.
노파심 같습니다만, 다시 물어봅니다. 아무리 물어도 해야 할 질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복음이 뭐죠? 복음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eujaggevlion)이데, ‘기쁜 소식’(Good News)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이 복음입니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바로 이 복음 전하여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사역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적 도움만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영적 도움만 베푸신 것이 아니라, 그는 육체적 도움도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너 죄 사함 받았다. 너 천당 간다. 가장 중요한 문제해결 했으니까 그냥 가라.' 그러시지 않았어요. 무엇까지 해결하셨어요. 자신의 그 아픈 고통인 질병까지 치료하신 것입니다. 먼저 죄 문제 해결해 주시고 그리고 어떻게 선포하십니까? 11절 보시기 바랍니다. 같이 읽겠습니다.?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일어나라. 일어날 수 없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 12절에 보면 "일어났어요? 못 일어났어요?" 일어났습니다. 일어나 상을 가지고 주님은 거기까지 도우셨어요. 육체의 필요도 그대로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복음 전하여 사람들이 죄 사함 받고 구원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육체적 필요를 절대로 간과하지 않습니다. 여기 기독교의 또 하나의 사명이 있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이웃들을 돌보는 일, 그들의 육체적 필요를 돕는 일입니다. 태신자를 교회에 데리고 나온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참 복된 기회입니다. 우리는 오늘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의 심정을 갖고 이 태신자를 데리고 와야 할 것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시류에 맞춰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 오스카 쉰들러는 유대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합니다. 그는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치 당원이 되고 뇌물을 바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냉혹한 기회주의자였던 쉰들러는 유대인 회계사인 스턴과 친분을 맺으면서 냉혹한 유대인 학살에 대한 양심의 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게 될 유대인들을 구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독일군 장교에게 빼내는 사람 숫자대로 뇌물을 주는 방법으로 유대인들을 구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스턴과 함께 구해낼 유태인들의 명단,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1,100명의 유대인을 구해냅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 쉰들러는 브린리츠 수용소를 탈출합니다. 차에 올라타기 전, 쉰들러는 그가 구한 천명의 유대인들과 작별을 나눕니다. 그 때 그를 도왔던 유대인 스턴으로부터 반지 하나를 건네받습니다. 그 반지는 쉰들러를 통해 살아난 유대인 중 한 명의 은 이빨을 녹여 만든 것으로, 그 안 쪽에는 탈무드의 한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자, 세상을 구하리라’ 쉰들러는 복받치는 감정에 반지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떨어뜨립니다. 반지를 주워든 그는 스턴에서 귓속말로 이야기합니다. “더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면 더 살릴 수도 있었을지도 몰라. 좀 더 구할 수 도 있었어...” 스턴은 고개를 저었지만 쉰들러는 계속 자책합니다. “사장님 덕분에 천 백 명이 살아날 수 있었어요.” “내가 돈을 좀 더 벌었다면... 너무 많은 돈을 낭비했어. 내가 만약...” “사장님 덕분에 후손이 이어질 수 있을 겁니다.” “충분하지 못했어.” “그 이상으로 하셨어요.” “이 차, 괴트한데 이 차를 팔수도 있었어. 그랬으면 열 명은 더 구했을거야. 이 배지 금이니까 두 명은, 아니 최소한 한 사람 몫은 쳐 주었을거야. 최소한 한 명을 더 데려올 수 있었어. 한 사람, 내가 최소한 한 사람을 더 살릴 수 있었는데 난 그렇게 안 했어. 네가 그렇게 안 한거야...” 쉰들러는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나는 전도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전도를 위해 시간과 재물을 아낌없이 투자하십니까? 나의 소홀함으로 혹시 지옥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의 게으름으로 혹시 영원한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질 사람은 없습니까? 누구도 복음에서 소외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야 합니다. 이제 내 가족 가운데, 내 친척 가운데, 내 이웃사촌 가운데 혹시라도 이 구원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없는가? 살피고 만일 소외된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나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내일부터 희생없이는 전도없다는 주제로 하나님 앞에 한주간 엎드려 온 교인이 나와 기도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생명을 끌어안고 우십시다. 반드시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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