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3.1운동 롬9:1-5. 2014년 3월2일. 주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3-02 |
조회: 1372
요즘 우리나라는 일본과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그런 고통과 아픔을 가지게 됩니다. 남의 집 가정에 들어온 강도가 안방을 차지하고 이 집은 내 집이라고 외치는 정말 분통이 터지는 일을 일본이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지난 날 이 땅을 찬탈하고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위안부 등으로 끌고 간 사람이 100만명 넘습니다. 지금도 일말의 양심을 버린 채 당시 조선인 희생자들에게 개별적으로 피해 보상을 해주기는커녕 사과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몇해전 부터 미 의회가 위안부 문제를 일본의 분명한 잘못임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법적 책임이 없다고 큰 소리를 치지 않습니까?
심지어 ‘역사를 왜곡해서 만든 교과서를 버젓이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니 정말 가슴이 미어지듯 통분하는 심정입니다. 거기에는 위안부 문제 같은 것은 아예 빼버렸고 대신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젠 아예 극우 보수 진영들이 나서서 다케시마 행사를 독려하는 후안무치한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이런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어제 95년 전에 빼앗긴 조국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우리 선조들의 피가 맺힌 3.1절을 가졌습니다. 오늘 교회도 3.1절 기념 예배로 드리는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라의 주권과 언어와 영토를 빼앗긴 그 아픔을 지난 36년간 정말 뼈가 저리도록 느끼며 살아 왔습니다.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 운동 당시 200여만 명이 참가하여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고 위키 백과사전은 삼일운동 전모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삼일독립운동이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 사랑한 애국애족운동의 정신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 1600만명의 국민 가운데 1.3%가 한 20만명 정도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수가 당시 민족을 일깨우고,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적 리더였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승훈과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삼일독립운동을 일으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특히 기독교인들은 이 운동의 준비과정과 조직, 그리고 온 민족이 참여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기록을 보면 우리 민족의 대표로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기독교인이 16명이었으며, 거사 준비 과정에서 중심되는 인물 48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24명 이었다고 문헌은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3·1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한국 초기 기독교는 소수였지만 이 민족을 이끌었습니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 절망 가운데 지쳐있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불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를 세워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배출했습니다. 병원을 세워서 죽어가는 이 땅의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키가 고장난 배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계 기독교 역사상 부흥의 기적을 이루었던 한국교회는 지금 선교 130주년을 맞이하여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을 다시한번 직시하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 기독교가 이 민족을 살리는 역할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바울에게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 불편한 심정은 1절에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그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큰 근심이 되었고, 그 근심이 지나쳐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육체가 아픈 것을 고통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아픈 것을 슬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아픔이 지나쳐서 그것이 바울에게는 육체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자기 동족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하는 걱정 때문에 큰 근심이 되었고, 이 근심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나중에는 큰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큼 고통했느냐 하는 것은 3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는 말씀에서 저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인데,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명령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물론, 그 성에 있는 물건 하나까지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불태워서 없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데마’가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리 없지만, 끊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형제, 나의 친척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열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와 같은 기도가 출 32:32에도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사하지 아니하시려거든,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려 주옵소서』 정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른 이의 영혼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를 드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 아침!! 여기 모인 우리에게도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 부르짖음이 있습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한 때 도움이라도 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이들은 바울에게 어떤 관계입니까? 바울이 피를 토하듯 끌어안고 기도하며 사랑했던 그들은 다름 아닌 바울을 배척했던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같이 바울은 일생동안 자기 동족으로부터 쉬지 않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바울은 평생동안 괴롭히고 해를 끼친 사람은 이방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 사람도, 태장을 때린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재판에 붙인 사람도 동족이요, 감옥에 가두어 놓은 것도 동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벌인 자도 동족이요, 사사건건 미움과 박해를 가한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어찌 이런 자들을 사랑할 수 있으며 기도할 수 있으며 자기의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생명을 바칠만큼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갈며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미워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핍박할수록, 견딜 수 없는 자리까지 고난에 빠뜨려도 오히려 바울은 자기 동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더욱더 간청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자리에 서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워해 달라고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그는 안타가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습니다. 10: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동족을 보면서 바울은 끊임없이 고통하고 괴로워했습니다. 바울의 고통에는 자기 민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원통해서 답답해하는 마음, 무엇이나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계란을 내 손에 아무리 오랫동안 쥐고 있어도 병아리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암탉이 계란을 품고 있으면 병아리가 태어납니다. 내 문제를 내가 끌어안고 있으면 여전히 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품에 안겨 드리면 주님께서 새롭게 바꾸어 주십니다. 내 자식의 문제를 내가 끌어안고 있으면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내 숙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내 자녀를 올려드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내 가정의 문제, 직장의 문제, 사업의 문제 모두 내가 붙잡고 있으면 여전히 내 문제가 됩니다.
이 민족의 앞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아시지 않습니까? 무너진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응답되어 성벽이 재건되고 백성이 소망으로 가득한 삶으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제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품에 올려 드리십시오.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고,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기도하는 손은 절망의 감옥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기도하는 손은 하늘의 능력과 기적을 가져옵니다. 기도하는 손은 치유와 회복을 일으킵니다. 기도하는 손은 모든 원수를 물리치는 능력을 가져옵니다.
지금 바울이 이처럼 자신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준 자신의 동족을 위해 이 몸부림치는 기도는 다른 데 있었던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인생인데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도까지 되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기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보았습니다. 견딜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이 얼마나 큰가를 보았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신을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였던 자기를 그 완악함과 그 더러움을 다 받으시고 십자가의 용서의 진액으로 사랑의 보혈로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가슴을 안고 자기를 핍박하는 동족을 향해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바울도 섬김과 희생과 봉사로 그들을 복음으로 끌어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95년이 지난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역사 이래 이렇게 잘 사는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역사 속에서 이렇게 평화롭게 살았던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굶주림으로 시달렸던 나라가 이제는 경제 규모가 세계 12위권에 진입하였습니다. 선교를 받던 나라가 지금 169개국에 2만 5665명을 파송하고 있습니다. 미국 다음으로 선교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평균 수명이 42년에는 45세였는데 지금은 여성은 84세 남성은 77세가 되었습니다. 대학교도 47년에는 학생수 2만, 학교 24개였는데 2012년에는 학교 251개로 대부분 대학에 다닐 수준이 되었습니다. 자동차도 48년에는 1만 5천대이었던 것이 지금은 가정마다 차가 있습니다. 세계 조선 산업 1위입니다. 세계 철광 제조 산업 1위입니다. 반도체 생산률 1위입니다. 컴퓨터 보급률 1위입니다. 초고속 통신망 보급률, OECD국가 중 초고속무선인터넷 보급률100%는 대한민국뿐입니다. 학교 정보화 시설, 대학진학률 세계1위입니다. 산업혁명으로 근대 지구촌 고도성장의 전형으로 꼽히는 영국은 170년간 9배의 GDP 파이를 키웠고 일본은 57년간 14배의 GDP 성장세를 보였지만, 한국은 1960년 이후 48년간 32배로 국부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는 8년째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가정이 중독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국민 8명 중 1명이 알코올이나 인터넷, 도박, 마약에 중독돼 사회경제적 비용만 연간 109조 5,000억 원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중독 전문가 단체인 ‘중독포럼’에 따르면 2011년 현재 알코올 중독자는 155만 명, 인터넷 중독자는 233만 명, 도박 중독자는 220만 명, 마약 중독자는 10만 명으로, 우리나라 인구 약 5,000만 명 중 618만 명이 4대 중독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인명을 경시합니다. 범죄 시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도 8시간 10분마다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점점 사람 생명의 존귀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명경시 풍조는 자연스럽게 황금만능주의, 쾌락 지상주의로 연결이 됩니다. 일 년 술값으로 14조, 성매매로 24조가 소비된다고 합니다. 성매매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수는 33만 명으로 이는 20, 30대 여성 취업 인구의 8%나 된다고 합니다. 쾌락이면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을 찾아가는 불나비처럼 쾌락의 불더미로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우리가 세계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다고 하더라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내일은 정말 암담해 질 수 있습니다. 기미독립만세를 부른지 95주년을 맞이한 오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3·1독립운동에는 유관순 열사와 같은 어린 여학생들까지 참여했습니다. 누가 시켜서 참여한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감옥에서도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습니다. 선조들의 애국정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 은 후손들에게 바른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후손들에게 건강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 고민하고 기도합시다. 지금 우리나라는 여기를 보나 저기를 보나 의지할 곳이 없어 보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침략성이 강한 일본과 중국, 러시아가 버티고 있는데다가, 남북이 양단된 채, 강한 무기로 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가장 든든하게 여기던 우방 미국도 이제는 점점 자국이기주의와 패권주의로 치닫고 있음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의지할 곳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어느 때 보다 한국교회의 책임이 너무나 큽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가장 필요한 것은 800만이다, 1000만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남은 자,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빛과 소금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숫자가 100만만 되어도, 아니 남은 자가 10만만 되어도 하나님은 이 나라를 강하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 때문에! 이 민족의 미래가 소망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물고기가 짠 바닷물 속에 있어도 생명이 있으면 마음껏 헤엄쳐 다닙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으면 허연 배를 위로 하고 둥둥 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시면 나 자신의 힘이 아니리 그분의 능력으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됩니다. 바뀌는 삶이 아니라 바꾸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물드는 삶이 아니라 물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동성의 성도들이 이 마지막 때에 아무리 사회가 도덕적으로 혼탁 할지라도,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다 넓은 길로 갈지라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보시에게 합당한 의인의 길로 감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들과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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