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향하여- 26강 [ 말씀만이 세상을 바꾼다. ]
페이지 정보
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8-17본문
새 시대를 향하여 (26) – 말씀만이 세상을 바꾼다. 행17:1-9, 살전 2:13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모든 시간이 다 똑같은 가치는 아닙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특별히 주시는 기회의 시간이 있습니다. 바울은 엡5:16절에 보면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월'은 단순히 흐르는 시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회의 순간”, “결정적인 때”를 의미합니다. ‘아끼라’는 말은 ἐξαγοράζω (엑사고라조)라는 말인데 ‘완전히 사들이다, 값을 주고 건져내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시장에서 좋은 물건을 발견했을 때 망설이지 말고 즉시 값을 주고 사들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붙잡으라는 강한 명령형입니다.
'우리 교회는 8/15-16 이틀 동안 “청년의 삶속에서 오는 하나님의 시그널”이라는 하나님의 신호라는 제목으로 중.고.청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여러분, 요즘 청년으로 산다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이들의 삶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휴대폰을 켜면 세상 소식이 쏟아집니다. 여기엔 청년들의 고민이 다 담겨 있습니다.
취업 경쟁률, 집값, 경제 불안, 사회 문제… 그리고 SNS에 들어가 보면 여행 가고, 맛집 가고, 연애하고… 근데 나는 늘 같은 자리에서 허덕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작아지고 현실 앞에 주저앉습니다. 지금의 선택이 내 인생을 좌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대한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착각 말입니다. 그러나 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입니다. 잃어버린 돈은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잃어버린 시간은 결코 되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으로 돈을 버는 것은 가능하지만
돈으로 시간을 살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시간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잘못 쓴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도,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합 니다.
기회는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입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 사랑을 나눌 기회, 회개할 기회, 헌신할 기회는 기다려주지 않고 지나가 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영적으로 때가 악한 시대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도 도덕과 가치가 무너지고, 영적인 무관심이
만연해 있는 “악한 때”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하나님의 기회를 사서 붙잡는 결단이 필수입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사건들은
정말 어려운 삶의 현장에서 새시대를 펼쳐나갈 때 얼마나 힘든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지를 피부로 느낍니다. 바울은 우리가 알다시피 참 변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자신이 예수를 만나지 못했을 때,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보면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었습니다." 바울은 그냥
교회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그래서 그 교회 안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내가 교회를
핍박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1:13절에 "핍박자, 포행자요 훼방자"라는 말도 썼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자신을 자격이 없다고 보는데
하나님은 자격 있다고 하시고, 그는 자신을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삼지 않으신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함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먼저 자기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바울의 크게 빚진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나서 죽는지 사는지 모르게 일했습니다. 마치 하루종일 놀다가 오후 5시에 일당 받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어 가서 일하게 된 노무자의
심정으로 헌신했습니다. 감지덕지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전혀 준비 못한 유럽지역에 복음을 전하려갑니다.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에 가서 그는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을 알고 이제 데살로니가 지방으로 갑니다. 그런데 여기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난히 환난이나 고난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자주 등장합니다. 살전1:6절에 보면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 많은 환난 속에 있었다.
살전2:2절에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살전2:14절에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3:7에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Ⅰ. 왜 박해를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3절에“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 예수가 곧 너희가 전하는 그리스도라” 이 말은 바울 일행이 전한 복음은 단순히 사람 마음을 위로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 되신다는 선포였는데, 이 말은 곧 로마 황제가 주인이라는 세상의 가치관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기존 생각과 질서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 입장에서는, 바울이 와서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메시지를 전하니, 마치 세상을 뒤흔드는 소란꾼처럼 보였던 겁니다. “저 사람들 때문에 동네가 시끄럽다, 사회 질서가 깨진다” 이런 느낌으로 말한 거예요. 하지만 사실은 소란을 피운 게 아니라, 죽은 세상을 깨우고 어둠 속에서 잠든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진짜 생명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두 가지 반응을 보여줍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새 생명과 기쁨을 주지만, 세상의 가치관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고 위협적인 메시지로 들린다는 겁니다. 바울은 "세상을 소란케 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불과 3주의 짧은 기간 동안 제대로 증거도 못한 채, 마치 광야로 피신한 만삭이 된 여인이 아이를 낳고 탯줄을 짜르고 아이를 광야에 버려두고 간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린 소식은 바울 일행을 충격속에 빠뜨립니다.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문과 연관된 살전 1:8절에 보면 “주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가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노라” 여기서 “들릴 뿐 아니라”라는 단어는 ‘메아리치다’, ‘울려 퍼지다’, ‘멀리까지 전해지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삶이 단순히 한 번 알려진 것이 아니라, 마치 종소리가 산을 넘고 계곡을 지나 울려 퍼지듯 계속해서 퍼져나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마게도니아와 아가야는 지금의 그리스 전지역을 말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겉으로는 선교가 막힌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유럽 선교의 물꼬를 트는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기회는 때로 시련의 옷을 입고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믿음으로 붙잡는 자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문을 열어주십니다. 문제를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오늘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오늘 붙잡은 그 한 번의 기회가 영원한 변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엄청난 역사를 일군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 성령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역사가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고난의 현장에서 제대로 배우 못한 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도대체 그 환란의 현장에서 흐트러지지 않고 고난과 환란 앞에서도 당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Ⅱ. 이들이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 것인기를 알아야 합니다. 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여기 보면 이들이 말씀을 듣는 태도가 나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목회하면서 가끔 신앙 상담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듣는데 안 들린다는 것입니다. 참 목사로서 난감할 때입니다. 초신자라면 몰라도 교회 오래 다닌 분이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때 목회자로서 큰 고민이 생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목회자로서 제일 먼저 해야 할 건, ‘왜 이런 말을 할까?’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겁니다. 공감해 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물론 듣는 분의 문제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가끔 저도 제가 한 설교가 너무 길거나, 너무 어려운 신학 용어가 많을 때, 성도들이 집중하기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내 설교가 이해하기 쉽게 전달되고 있는가?’, ‘예화와 적용이 구체적인가?’ 이런 부분을 점검해 보는 게 필요합니다. 이건 절대로 자존심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를 사랑하고 오히려 더 나은 목회를 위한 하나님의 피드백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설교가 들리지 않는 문제의 해답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있습니다. 설교자는 말씀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고 말씀을 깊이 연구하며, 청중은 닫힌 마음을 열고 간절한 태도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말씀이 들리고, 그 말씀이 삶을 변화시키는 신앙의 기쁨을 경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똑같은 말씀을 받는데 어떤 사람의 인생은 변하고 어떤 사람의 인생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이 능력이 없어서일까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예배 시간에 청중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늘 말씀이 들립니까? 그러면 당신들은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 들립니까? 심판의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이야기합니다.
Ⅲ. 말씀을 받은 성도들의 삶의 현장은 어떻습니까? 살전 1:3
살전 1:3절에 보면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여기 믿음의 역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 “역사(ἔργον, 에르곤)”라는 말은 ‘행동, 일, 열매’를 뜻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말뿐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지키고, 우상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열매가 나타났습니다. 자기 앞가림도 힘든 처지였지만, 믿음은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순종으로, 변화된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믿음의 역사”가 우리 가정과 교회 속에서도 드러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수고입니다. 여러분, ‘수고’라는 단어는 피곤하고, 땀 흘리고 때로는 고통을 동반하는 수고를 말합니다. 그냥 편한 사랑이 아니라, 희생을 각오한 사랑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고, 장사도 안 되고, 이웃에게 배척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서로를 돌보고, 나누고, 세워주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자기만 살려고 발버둥치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땀 흘리고 희생하는 사랑이 그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이 사랑 아닐까요? 내 편한 것만 챙기고, 내 가족만 챙기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랑의 수고”는 때로는 내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고, 내 돈을 나누는 것이고, 나의 체면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수고가 있을 때 교회가 살아납니다.
셋째는 소망의 인내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쉽지 않았습니다. 박해와 고난, 삶의 불안정함이 계속됐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버티게 한 힘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인내라는 단어는 단순히 참고 기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게를 견디며 버티는 힘’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뿌리를 깊게 내리고 버티는 나무처럼, 성도들은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왜요? 예수님 다시 오신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바보 같은 삶이었지만, 소망이 있는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버티며 웃을 수 있습니다.
이 소식 앞에 바울은 마음의 부담을 가졌던 교회가 너무 근사하게 세상에 영향력을 끼친 것에 전율을 일으킵니다. 바울은 살전1:9절에 보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바울은 자신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감사의 마음을 느끼며, 그 마음을 "어떠한"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어떠한"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바울이 인간으로서 느끼는 깊은 감사와 그 감격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려야 할지를 고민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고난과 핍박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바울은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꼬"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다음 주 터치 153 새생명 축제 발대식을 가지려 합니다. 그리고 전반기 새신자를 축하하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이는 분명 하나님이 우리 교회 주신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붙잡으십시오. 바울은 고전 2:4-5절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육의 것은 무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내가 할려고 하니까 방법을 찾고 시대를 탓하고 이제 전도는 다르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의 전도 계획을 쓴 로버트 콜만 – 방법이 없다. 성령의 인도입니다. 여기에 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역사가 있습니다. 성령의 생수가 흐릅니다. 짧은 만남이 한 도시를 바꾸어 놓았듯이, 우리의 작은 수고와 헌신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위대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 하루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