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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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8-10본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특별히 우리 민족에게 정말 의미 있는 날을 앞두고 있습니다. 바로 광복 80주년입니다. 이 80이라는 숫자가 주는 울림은 참 큽니다. 구한말 조선은 힘을 기르지 못했고 주변 강대국은 우리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도 나라의 문을 열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지만, 조선을 붙잡아줄 신앙과 교육과 국민적 정신의 버팀목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기기 전, 조선 말기의 현실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양반들은 타락했고, 백성들은 주색잡기에 빠져 살았다. 그래서 나라가 망했다.” 저도 어릴 때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절반은 사실이고 절반은 왜곡입니다. 조선 말기는 고종 황제가 나라를 다스리던 때입니다. 이 19세기 후반 조선은 여러 면에서 힘들었습니다.
당시 양반층의 타락과 무능은 뿌리까지 병들어 있었습니다. 과거제는 형식만 남고, 벼슬은 돈으로 사는 ‘매관매직’이 성행했습니다. 일부 양반은 백성을 돌보기보다 사치와 향락에 빠졌습니다. 세도정치로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개혁은 있었지만, 보수파의 반대와 외세의 간섭으로 번번이 무너졌습니다. 백성들의 고단한 삶이었습니다. 세금과 부역이 과중했고, 흉년이 들면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이 현실을 의도적으로 부풀려 우리를 식민화 하려는 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조선은 썩어서 스스로 설 수 없는 나라다. 우리가 도와 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신문, 교과서, 보고서마다 조선을 무능하고 게으른 나라로 묘사”했습니다. 이것이 정한론과 식민 지배 정당화 전략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왜곡된 이미지를 우리가 스스로 믿게 된 겁니다. 마치 우리가 내부 부패로만 망한 것처럼 우리의 역사를 왜곡한 것입니다.
1905년 11일 한일협약(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헤이그에 이준을 밀사로 파송하여 부당성을 외쳤습니다. 국내에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5년 동안 의병 항쟁이 일어났지만, 1907년, 일본이 강제로 군대를 해산시켰을 때, 강원도 춘천의 의병장 유인석 선생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은 백성이 아니다. 칼을 들어 의를 지켜야 한다.” 그는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싸웠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1910년에 마침내 우리나라는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날을 ‘경술국치일’이라고 부릅니다. 이로부터 힘없는 우리는
이 나라에 주권과 영토 백성들의 자유를 빼앗긴 채 36년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이 긴세월 동안 36만3천여 명의 젊은이들이 전쟁에 끌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징용에 끌려간 사람들이 780,000에서 100만명으로 집계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땅의 젊은 딸들이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로 20여 만명이나 아름다운 삶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저항해도 꿈적하지 않는 당시 사회에 수많은 지식인들이 변절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맙니다. 당시 이 민족은 다시는 해방을 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이 땅에 해방이 온다는 것은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만큼 절망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해방이 온 것입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진 것입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 함석헌 선생은 우리나라 해방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우리나라 해방은 도둑 같은 해방이었다, 예기치 않았다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이었다. 그리고 이 해방은 하늘에서 온 것이었다. 어느 누가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해방을 스스로 할 능력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고 그는 평하고 있습니다. 광복은 우리의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에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얼마나 기뻤던지 그날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광복절. 흔히 다른 나라들은 독립기념일이라 부릅니다. 우리도 그렇게 부를 수 있지만 굳이 광복절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광복절, 빛을 되찾은 날이라는 뜻입니다. 오죽하면 8.15 해방을 빛을 되찾은 날, 즉 다시 세상이 시작된 날이라 했겠습니까? 이 얼마나 은혜롭고 감격스러운 이름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피 흘려 주신 영원한 자유를 때로는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저는 이 광복 80주년을 맞아,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외쳤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함께 대하는 갈라디아서는 ‘기독교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일컫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외칩니다. 이는 그들이 이미 자유를 얻었지만 ‘종의 멍에’를 다시 멜 가능성과 위험성이 있음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자유를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Ⅰ.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성도 여러분, 시골에서 소나 말을 보신 적이 있죠? 목에 멍에라는 나무 틀을 씌우면 그 짐승은 마음대로 못 움직입니다. 주인이 끌면 가야 하고, 멈추라면 멈춰야 합니다. 성경에서 ‘멍에’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주고스(ζυγός) 인데, 이건 단순한 농기구가 아니라 누군가의 지배와 억압 아래 놓인 상태를 뜻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여기 ‘다시는’이라는 표현은 헬라어 문법상 절대 반복 금지의 강한 경고입니다. “그 길로는 절대로 돌아가지 마라”는 겁니다.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했는가? 갈라디아 교회는 처음에 복음을 뜨겁게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서 말합니다. “예수 믿는 건 좋지만, 할례도 받아야 하고, 절기도 지켜야 하고, 율법을 따라야 진짜 구원받는다.” 성도들이 그 말에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보니 이건 단순한 신학 논쟁이 아닙니다. 구원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율법의 멍에를 메는 순간, 사람은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은혜는 뒤로 밀려나고, 신앙은 다시 두려움과 의무감, 죄책감 속에 빠집니다. 바울은 그걸 종살이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본 것입니다.
바울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로 사제지간의 사랑이 넘쳤던 교회, 가르침의 열정 앞에 단순히 배우는 자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성장하던 교회가 이젠 변질된 타락의 길로 가게 될 때 가르치는 자의 그 고통을 여러분, 그 심정을 아십니까? 얼마나 통증이 컸으면, 그는 갈 3:3절에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렇게 사랑했던, 자신이 가르쳤던, 성도들이 하나 둘 진리에서 떠나고, 변질되어 가는 안타까움 앞에 그 상황을 바라보는 스승의 마음이 얼마나 얼마나 찹찹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갈4:19-20을 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은 이 잘못된 이단에게 빠지지 않도록 해산의 수고를 해서라도 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회복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Ⅱ. 서로 종노릇하라 13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광복 80주년을 맞아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80년 전, 우리 민족은 아무 힘도 없고, 소망도 끊어진 것 같았던 시절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마침내 자유와 광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8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세계가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더 이상 과거의 그 연약한 나라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울 뿐만 아니라, 국격과 문화의 영향력도 세계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은 이제 받기만 하는 민족이 아니라, 세계를 섬기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미국 다음으로 세계 선교를 감당하며, 수많은 NGO 단체를 통해 어려운 나라를 돕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도는 현실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우리는 이 자유를 어떻게 누리며 살아야 할까요?
오늘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 성도들에게 주신 이 말씀은,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유효합니다. 먼저 13절을 다시 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입니다. 죄와 사망,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유인으로서 시대 앞에 사명자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가 뭡니까? 자유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말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 결과는 어때요? 서로 갈라지고, 싸우고, 비난하는 모습이 넘쳐납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여기 “서로 종노릇 하라”는 말은 자발적으로 낮아지고 섬기는 사랑의 종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였다”고 하십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는, 이제 형제와 자매를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 한국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 책임이 바로 사랑으로 섬기는 삶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Ⅲ. 바울의 경고 – 피차 멸망할까 두려워하라 15절
바울은 15절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여러분, 이 말씀 앞에서 오늘 우리 현실을 보십시오. 경제는 발전했지만, 정치는 진영 싸움에 갇혀 있습니다. 세대와 지역 갈등은 여전하고, 서로를 향한 혐오와 조롱이 일상화됐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단 분열, 목회자 불신, 교회 내 갈등… 서로 물고 먹는 모습이 곳곳에 있습니다. MZ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다음 세대 신앙 전수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조선이 내부 분열 속에 외세의 먹잇감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이대로 간다면, 영적·도덕적 힘을 잃고 복음의 영향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피차 멸망”입니다.
얼마 전에 기독교 신문에 실린 칼럼을 읽었는데, 그 칼럼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만만한게 기독교다. 대중의 집단 광기와 분노의 배설 창구가 된 듯하다." 그러면서 최근 드라마들을 쭉 나열했습니다. “목사의 딸이 마약 중독자로 등장하는 '더 글로리'와 '수리남', '지금 우리 학교는', '지옥', '오징어 게임' 등 요즘 넷플릭스에 등장하는 자극적인 드라마의 패턴은 과장하면 '기승전 기독교다.” 칼럼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금세 파악이 되지 않습니까? “목사의 딸이 마약 중독자로 등장하는 '더 글로리'는 마약 중독자를 목사의 딸로 설정해놓고 예배를 조롱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교차해서 보여줍니다. 예배당에선 한창 예배를 드리고 있는테, 담임목사 딸이 그 교회 지하에서 마약을 하고 있는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의도는 명백합니다. 기독교인의 이중적인 태도를 비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점을 강조해서 홍보였던 한 영화는, 결정적으로 실화와 다른 허구적 설정을 하나 집어넣었는데, 악당인 범죄자를 악한 목사로 설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악한 목사가 탐욕에 눈이 멀어서 마약을 팔고, 성도들을 감금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니,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면서 왜 뜬금없이 마약 파는 허구 목사를 등장시키는 걸까?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 기독교가 세상에 희망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세상에 영향력을 잃었습니다. 빛과 소금의 삶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습니다.
저는 오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의성 감옥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직전의 이야기를 하고 마치려 합니다. 1944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달했을 때, 주기철 목사님은 수없이 고문을 받으면서도 “나는 신사에 절할 수 없습니다”라고 끝까지 버티셨습니다. 그런데… 그 강한 믿음의 사람도 마지막 순간에는 인간적인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주 목사님은 잠시 형사들의 동의를 얻어 어머님과 마지막 시간을 갖습니다.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 저는 너무 연약한 사람입니다. 이번에도 끌려가면 또 혹독한 고문을 받을 텐데 제가 혹시라도 변절하면 어쩌죠?”
그 말을 듣는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때, 연로한 어머니가 아들의 손을 꼭 잡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기철아, 네 생명은 하나님께 맡겨라. 죽어도 주님 품에 안길 것이니, 두려워하지 마라. 끝까지 믿음을 지켜라.” 눈물과 눈물이 만나고, 그 자리에서 모자는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주여, 제 아들 끝까지 믿음 지키게 하소서!” “주여, 제가 변절하지 않게 붙드소서!” 이것이 당시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나라를 위한 희생 섬김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그런 모습을 보시고 이 땅에 광복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복절은 과거를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자유의 가치를 다시 다짐하는 날입니다. 그 자유를 지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때요? 조금만 생각이 달라도 공격하고, 비난하고, 무시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다툼이 일어나고, 심지어 정치, 이념, 세대 간 갈등이 너무도 심각합니다. 바울은 이런 모습이 결국 멸망을 불러온다고 경고합니다. 서로 물고 뜯는 사회, 서로 헐뜯는 교회, 그 끝은 피차 망하는 길입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오늘, 우리는 다시 이 경고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자유를 분열의 수단으로 쓰지 말고, 사랑의 통로로 삼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서로 종노릇할 때입니다. 더 낮아지고, 더 섬기고, 다투는 대신 감싸주고, 헐뜯는 대신 세워줄 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자유를 누리되, 사랑으로 책임지는 그리스도인, 이 시대의 소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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