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깨우리라-비전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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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6-01본문
새벽을 깨우리라 - 비전의 현장 삼상 시57:1-2, 7-8
사랑하는 여러분, 다음 주면 우리 교회가 세워진 지 56년째 되는 창립기념주일입니다. 56년 전만해도 한국에 기독교인이 많지 않을 때에는 신앙인들 안에서 민족의 지도자도 나왔고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컸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의 현실은 심각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코로나19는 사회적이든 신앙생활이든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예전처럼 자신의 삶을 드려 헌신할 만큼 희생을 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줄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힘든 시기에 창립 주일을 맞게 됩니다. 우리도 이 시대가 겪는 어려움을 다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56년이라는 세월 속에 고비고비마다 에벤에셀로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창립 기념일은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디딤돌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다윗이 도망가 숨었던 ‘엔게디 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곳은 낭떠러지 같던 자리였지만, 하나님이 비전을 다시 잉태 시키신 현장이었거든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교회의 비전도 다시 살아나길 소망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시편 57편을 쓸 당시의 상황을 아십니까? 지금 그는 사울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목숨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다윗은 엔게디 광야의 굴속에 숨어있었습니다. 현실은 캄캄하고, 앞길은 막막했습니다. 이 시의 배경을 그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속에 숨어서 부른 노래”입니다. 여기 알다스헷이란 “멸망시키지 마소서”란 뜻입니다. 다윗의 애절한 간구 시에 붙혀진 음악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무서운 창끝을 피하여 엔게디 굴속에 숨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사자와 맹수들이 드나들곤 하였습니다. 사울에게 붙잡히는 날도 맹수에게 물리는 날도 인생은 끝장납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속에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제발 멸망시키지 마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 불안한 나날을 빨리 끝나게 해 주십시오. 나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얼마나 가여운 기도입니까? 한때 골리앗을 물리치던 용기와 그 기백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광야를 헤매며 이 굴 저 굴속에 몸을 숨기고 근근히 위기를 피해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따르던 자들을 보십시오. 삼상 22:2절을 보면 ‘환란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다’고 했습니다. 여기 환란 당한 모든 자라든지, 빚진 자, 그리고 마음이 원통한자는 한 마디로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어떤 일이나 사건이 자신의 상처를 건들게 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성질을 부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군사들이 아닙니다. 엔게디 굴까지 떠라온 600여명은 다윗과 함께 광야에서 연단받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연약한 공동체입니다. 이 굴은 ‘엔게디(עֵין גֶּדִי)’ 라는 동굴인데 사해 서편, 광야 지대에 위치한 곳으로, 척박한 땅 한 가운데 물이 솟아나는 오아시스였습니다. 바로 그곳에 수많은 동굴들이 있었고, 다윗은 그 동굴 중 하나, 어쩌면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을 겁니다. 지금 사울왕은 군사 삼천명을 데리고 다윗을 잡으려고 이 잡듯 혈안이 되어 찾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 앞에 촛불 하나 없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Ⅰ. 은혜를 베푸소서! (1절)
여러분, 다윗은 지금 엄청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사울은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다윗 하나를 잡겠다고 혈안이 되어 쫓아오고 있었고, 다윗은 생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습니다. 사람들은 위기의 순간에 누구를 붙잡습니까? 어떤 사람은 사람을 붙잡고, 어떤 사람은 돈을 붙잡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 경험이나 지식을 붙잡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죽게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여러분, 이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두 번 반복해서 말합니다. “은혜를 베푸소서! 은혜를 베푸소서!”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형식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입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밖에는 기대할 게 없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냥 “하나님 도와주세요”가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외칩니까? “은혜를 베푸소서, 은혜를 베푸소서.” 같은 말을 반복해요. 이건 진짜 간절한 몸부림입니다. “하나님, 저 이제 방법이 없어요. 숨을 곳도 없고, 도망칠 힘도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저를 살릴 길이 없어요.” 여러분,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이런 동굴 같은 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막다른 길처럼 느껴지고, 도망칠 수도 없고, 누구에게도 말 못 하는 괴로움 속에 갇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가 다윗처럼, 은혜를 구해야 할 때입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붙잡아야 할 때입니다.
다윗은 그 동굴에서 자신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합니다.” 단순히 몸만 피하는 게 아닙니다. 영혼 전체,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겠습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고백이에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알았고, 하나님의 품에 숨는 것만이 살길임을 믿은 거예요. 우리는 다윗의 이 기도를 통해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실수하고,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시 걸어가게 하는 힘이 있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나를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괜찮다, 다시 시작하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내가 잘해서 받는 게 아니라, 내가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서 붙들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자책하고 주저앉아 있던 인생이 일어날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우리 인생이 끝났다고 느낄 때, 하나님이 새 페이지를 펼치시는 시작의 사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여러분의 삶 가운데 두려움이 있습니까? 억울한 일, 감당 못할 일, 누구에게 말도 못할 고통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다윗처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붙잡을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진심으로 찾을 때, 반드시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위기 앞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마음의 두려움입니다. 지금 다윗의 마음의 두려움은 자신의 뼈속까지 밀려오는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 잠4:23절 말씀을 보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성경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 생명과 직결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위기에 처할 때, 마음은 쉽게 무너집니다. 감정에 휘둘리고, 상황에 끌려다니고, 사람의 말에 상처받고, 비교에 지고… 그러다 보면 점점 마음이 텅 비어갑니다. 기쁨도, 감사도, 찬송도 사라져버립니다. 우리가 살면서 참 어려운 것은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모든 삶에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마음에서 생명이 납니다. 시 23:4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십년 여 세월을 마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는 것처럼 고달픈 시절을 보낸 일이 있습니다. 언제 추격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이 계속 됐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이 계속됐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견뎌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하시며 자기를 지켜주심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딤후1:7절에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닌 능력을 주셨고, 세상 속에서도 사랑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주셨으며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절제하는 마음 근신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은혜의 힘입니다. 7절에
Ⅱ. 현실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7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로다.” 여기 ‘내 마음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두 번이나 반복되는 고백, “확정되었고 확정되었사오니.” 이건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이 “확정되었다”는 말은 ‘쿤’(כּוּן)이라는 단어입니다. ‘굳건히 세우다’, ‘단단히 고정시키다’, ‘흔들리지 않게 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고백은 이런 겁니다.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단단히 고정되었습니다. 나는 이 믿음 위에 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다윗의 현실이 달라졌습니까? 아니요. 여전히 굴속입니다. 여전히 사울은 그를 죽이려 하고,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의 마음이 바뀌었어요. 현실은 그대로인데 마음이 확정되었고, 그 마음 안에서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우린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상황이 좀 나아지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 “문제가 해결되면 기뻐하겠다.” 그런데 다윗은 말합니다. “상황이 아니라 믿음이 확정되었기에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겠습니다.”
잠29:18의 말씀에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묵시라는 말이 곧 하나님의 비전이요, 꿈입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의미합니다. 이 하나님의 꿈이 없으면 인간이 경거망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비전이란, 꿈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 언제나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꿈을 먹고 산다는 것, 꿈을 위해서 뛴다는 것, 꿈을 달성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우리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우리의 희망찬 삶을 살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꿈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해 줍니다. 꿈이 큽니까? 그 사람은 대인입니다. 꿈이 작습니까? 그 사람은 소인입니다. 꿈이 고상하면 그 사람도 고상하고 꿈이 천박하면 그 사람도 천박해집니다. 꿈이 선하면 삶이 선해지고 꿈이 악하면 삶도 악해집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어떤 값을 치루고 있습니까? 저는 예수 믿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대우하셨나 생각해 보니까,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습니다. 저 자신의 믿음이 부족해서 스스로 힘들어 했던 적은 있지만,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떠나신 적도 없습니다.
Ⅲ. 이제는 다시 일어설 때입니다. 8절
여기 8절의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다윗은 지금까지 대적들에게 쫓기느라고 가슴조리며, 평안함과 기쁨이 없던 자신에게 이르기를, “나의 영혼아,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구원하셨고, 앞으로도 나를 구원하실 것이니, 이제는 깨어서 하나님을 찬송하자”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새벽을 깨우리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새벽을 깨운다"는 말은 단순히 이른 시간에 일어난다는 말이 아닙니다.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단순히 아침에 일어난다는 의미를 넘어, 신앙의 결단과 영적 각성을 뜻합니다. 고난과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먼저 찾고, 믿음으로 하루를 여는 사람의 태도를 나타냅니다.
새벽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욥기24:14을 보면 “사람을 죽이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자나 빈궁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적같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람을 죽이는 자는 단지 물리적인 살인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영혼을 죽이고, 소망을 무너뜨리고, 하루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자예요.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고, ‘기도해도 소용없다’고 속삭이는 자... 바로 사탄입니다. 놀랍게도 이 사탄은 '밝을 때' 일어납니다. 새벽을 노리는 거예요.
왜? 새벽은 하나님과 깊이 만날 수 있는 시간, 하루의 방향을 정하는 영적 분기점이니까요. 사탄은 그 시간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피곤하지 않아?” “하루 종일 바빴는데 좀 더 자…” 그렇게 무기력으로 끌고 갑니다.
여러분, 새벽을 뺏기면 하루가 흔들리고, 하루가 흔들리면 삶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무기력에 끌려갈 것인지, 아니면 믿음으로 새벽을 깨울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사탄이 새벽부터 죽이려 드는 이 시대에, 우리는 다윗처럼 선포합시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하루의 첫 시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게 영적 전쟁의 승리입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새벽에 하나님을 붙드는 자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사탄은 새벽에 일어나지만, 우리는 새벽을 깨워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단순히 교회 생일을 기념하려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시작하려고 모였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겉으로 보기엔 엔게디 굴 같은 시기일 수 있습니다. 비전도 사라지고, 힘도 빠지고, 이전 같지 않은 것 같고… 두려움이 지배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런 절망의 굴에서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지금 교회는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땅을 매각하는 문제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땅을 파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힘들고 어려울 시기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이 일을 주께서 어떻게 보시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비전이 어떤 것이냐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한번이라도 새벽에 안나오셨다면 기도의 자리에 서십시다. 우리가 가진 염려 다 주께 맡깁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엔게디 굴에서 다윗은 두려움을 털고 일어납니다. 그는 은혜 앞에 서서 확정되고 확정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이 절망의 굴에서, 새벽을 깨우리라고 외칩니다. 나는 이번 새벽 기도 한 주간이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에 새로운 변화를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다시 비전을 잉태하게 하십니다. 이제 교회는 그 어떤 때보다 기도할 때입니다. 새벽을 깨우는 자가 되길 축복합니다. 비록 삶의 상황은 아직 어두울지라도, 내 믿음과 찬양으로 먼저 새벽을 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내가 오늘 새벽을 깨우겠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향해 깨어 있겠습니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 안에서 울려 퍼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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