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기쁨 룻4:13-17. 2015년 4월 11일 주일 설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4-13 |
조회: 1864
얼마 전에 교회 근처에 있는 대형 서점에 나가 보았다가 유머 책들이 생각보다 많이 진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그런 책을 많이 찾나 봅니다. 책의 제목들이나 그 속의 문장들도 사람들의 마음을 끌 만한 매력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유머는 성공의 시작이요 웃음은 행복의 시작이다.', '웃으면 복이 와요.'와 같은 표제들이 붙은 책들을 사람들이 손에 들고 그 서점 안에서도 읽으면서 웃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회가 워낙 살기 어렵기 때문에 짓눌리고 쫓기고 답답하고 잘 풀리지 않는 분위기로부터 잠깐이나마 숨을 돌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웃음을 찾아 헤매는 것 같습니다. 한번 크게 웃어봄으로써 그 마음에 있던 답답한 감정들을 다 쓸어 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현대인은 무거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눈물, 애통'과 같은 말은 별로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일단 그 말 자체가 주는 어감이 마음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가 기뻐하며 산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중 기쁨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어린 아기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하루 400번 이상 방긋 웃는 그 웃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하루에 15번 정도 웃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아기들을 보면 방긋 웃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그 웃는 모습에 매혹되어 우리는 아기들을 사랑합니다. 이 말은 누구나 기쁨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슬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아무도 기쁨 없는 세상을 살지 못합니다. 기쁨이 송두리째 다 쓸려가 버린 인생을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형편에 있던지 크고 작은 기쁨 이 그 속에 담겨 있기에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만일 기독교에 기쁨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런 매력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을 흔들어 놓는 기독교 안에는 분명히 기쁨이 있습니다. 그 중심에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은 내일 자신이 참수를 당할지도 모르는 그 절망과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담밖에 사는 사람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에는 세상이 모르는 독특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기쁨을 알면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이고, 이 기쁨을 알면서도 잘 누리지 못한다면 병든 신앙이고, 이 기쁨을 전혀 모른다면 아직도 기독교의 신앙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한 사람으로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룻기서를 살펴 왔습니다. 나오미란 이름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정말 작지만, 행복한 가정을 가졌던 그의 삶은 베들레헴에서 소박한 기쁨을 누리며 살았던 그런 가정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베들레헴에 불어닥친 흉년은 이들 가정에 생존에 문제까지 결부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더 나은 살길을 모색하다 모압이라는 이방 땅으로 잠시 이주를 합니다. 잠깐 소낙비를 피한다는 자세로 나온 길이었지만, 이들은 그만 1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모압 지방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벗어난 이방지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풍성함을 따라 그곳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이방인의 삶에 동화되어 갔고, 두 아들은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흉년을 피하기 위해 그곳에서 살았지만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마저 죽게 되었습니다. 살기 위해서 떠난 길이었는데 오히려 철저하게 망해 버렸습니다. 누구든 이런 가정을 저주 받았다 해도 할 말이 없는 처참한 지경에 빠진 것입니다. 겨우 나오미는 만류를 무릎 쓰고 따라오는 이방 며느리와 함께 자신이 살았던 베들레헴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 다시 돌아오는 이 결단,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 결단은 자신에게도 힘이 들었지만, 당시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역시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1:13절에 보면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달라는 이야기를 보면 얼마나 비참한 자리까지 내려갔나를 보게 됩니다. 고향으로 왔다는 자체가 정말 가여울 정도입니다. 왠만하면 미쳤거나 자살을 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지금 일본을 작태를 보세요. 위안부 문제를 끝까지 외면합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서 왜놈들한테 우리의 누이들을 성노리갯감으로 준 것입니다. 해방을 맞이했지만, 이 땅에 차마 돌아 올 수 없어서 외지에서 쓸쓸히 죽거나 그 몸으로는 돌아가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살 수 없다고 생각해서 자살하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정조와 순결을 잃어버리고 인생을 잃어버림에 비관하여 자살한 분들, 스스로 생각할 때 실패한 인생이 선택할 것은 죽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다시 찾아서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고 순종했습니다. 며느리 둘은 데리고 들어가기가 미안하여 돌아가라고 하였지만 룻은 어머니를 따라 고향을 함께 좇아 들어가고,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고향으로 돌아간 나오미와 룻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었습니다. 여태껏 자신의 보기 좋은 대로, 욕심대로 살다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살게 되었고 온 동네에 그 고부간의 삶이 얼마나 멋진가가 소문이 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본문은 너무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는 장입니다. 룻기는 죽음으로 시작하는 성경이 아닙니까? 절망과 실패로 시작하는 성경이 룻기입니다. 1:3절에서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4장에 이르러 새로운 생명이 탄생합니다. 룻4:13-14을 보세요.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드디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룻4:18절에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그런데 아이는 룻이 배 아파서 아기를 낳았는데 고향땅의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가서 축하를 해줍니다. 나오미에게 아이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크게 되기를 축복해 줍니다. 여기 ‘오벳’ - 오벳이라는 이름은 ‘종’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의 남편의 원래 이름은 ‘엘리멜렉’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의 뜻은 그러했지만 자신이 왕이라서 이방으로 갔고, 자신의 뜻대로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삼았고, 무엇이든지 자신의 뜻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좋은 대로 결정하다보니 그는 철저하게 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인생을 어떻게 다시 찾았습니까?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오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람 룻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인생은 더 이상 마라가 아닙니다. 마라를 경험하기 전 나오미는 세상의 즐거움과 세상의 만족과 기쁨만이 전부임을 알고 살았던 세속적인 나오미였지만, 마라를 경험한 후의 나오미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인지 아는 진정한 나오미가 되었습니다. 시편 119편에 보면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주는 선 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고백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마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진정한 나오미가 될 수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오미와 같은 윤택한 인생만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마라의 삶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 일로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피하지 마십시오, 나오미처럼 마라의 삶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나오미가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미국에 사지마비 장애인 의사는 몇 안 됩니다. - 이들은 인간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노력을 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 중 한 명이 우리 한국인이며, 그는 세계최고의 병원 존스 홉킨스의 재활의학과 일명 슈퍼맨 닥터라 불리는 이승복 의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의사가 되기 전 그의 전공은 체조선수였습니다. 그것도 88올림픽 국가대표를 준비했던 유능한 운동선수였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 훈련하는 것이 한계가 있어 미국에서 88올림픽 국가대표의 꿈을 준비했던 그는 훈련 도중 공중회전 연습을 잘못해 머리부터 마루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눈을 뜨고 나니 그는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는 사지마비의 장애인이 된 것입니다. 그는 마라와 같은 자신의 삶을 “기적은 언제나 당신 안에 있습니다” 라는 책을 통해서 나오미의 삶으로 바꿔주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의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마음만 먹으면 내 몸을 좀 더 높이 띄울 수고 있었고, 가까스로 손으로 땅을 짚게 만들어 큰 사고를 피하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냥 바라보기만 하셨다. 왜 막지 않으셨을까? 나는 하나님의 자식인데, 자식이 다치는 걸 왜 그냥 바라만 보셨을까? 하나님은 내가 다르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어디에 쓰시려는 걸까? 무엇이든, 나는 그의 뜻에 따를 생각이었다. 하나님, 당신 뜻대로 하소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는 지금 믿음 안에서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사지마비라는 마라의 시간을 통해 진정한 나오미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룻이 난 오벳을 소개할 때 오벳의 앞뒤 계보를 밝히면서 한 가정의 계보가 새롭게 보여집니다. 성경은 이 가정의 계보를 대단히 중요하게 언급하지 않습니까? 룻4:18-22절을 보십시오.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그런데 왜 다윗을 낳았다는 말로 마무리가 됩니까? 다윗과 룻은 동일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룻기는 다윗 시대나 그 이후 시대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다윗에서 끝나는 것입니까? 이것은 다윗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계보를 통해 탄생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보를 대하면서 하필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왜 베레스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까? 룻4: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여기 베레스가 누구입니까? 이 베레스는 다말과 유다 사이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냥 스쳐가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는 믿음의 족장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 관한 행적을 자세히 기록을 했는데 그중 요셉의 관한 말씀이 전개되고 있다가 갑자기 아름답지 않은, 그래서 말하기도 거북한 사건이 38장에 불쑥 끼어듭니다. 그리고는 다시 39장에 요셉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게 그 유명한 시아버지인 유다와 며느리 다말에 관한 사건입니다. 왜 이런 구질구질한 내용을 정결한 삶을 살았던 요셉 이야기 사이에 삽입한 것입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죠?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넷째가 유다입니다. 그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즉 공동체를 떠나 이방인과 교분을 갖다가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엘, 오난, 셀라라는 세 아들을 얻습니다. 창38:1-5절을 보면. 장자 엘이 성장해 다말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장자 엘이 결혼하자마자 죽습니다. 이런 경우에 당시의 관습으로는 둘째가 형수와 결혼하여 대를 이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둘째 오난이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그마저 죽게 됩니다. 이제 셋째가 셀라인데 너무 어린 겁니다.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결혼시키지 않고 다말에게 친정으로 가서 기다리라고 합니다.
친정으로 가서 기다리던 다말은 어느 날, 시아버지 유다가 그곳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창녀로 위장하여 그를 유혹합니다. 유다는 자신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그 여인에게 중매를 넘겨주면서 자기 며느리인 줄도 모른 채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석 달 후에 유다는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노발대발하며 며느리를 불태워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 다말이 시아버지에게 증표를 보여 주면서 창38:25절에 “이 물건의 임자로 말미암아 내가 임신했나이다”라고 말하며 그 증표인 ‘자신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 놓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유다는 얼마나 얼굴이 뜨거웠겠습니까?
그 앞에서 유다는 할 말을 잃고 말은 것입니다. 유다의 며느리요, 또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다말이 드디어 해산하게 되었는데 쌍둥이였습니다. 첫째 아이가 나오는데 손 하나가 먼저 나왔습니다. 해산을 돕는 산파가 먼저 나온 자를 표시해 두려고 홍색 실을 손목에 묶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이 다시 들어가 버리고 아우가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 아이가 바로 베레스입니다. 그리고 먼저 나올 뻔 했던 아이를 세라라고 불렀습니다.(창38:27-30). 그렇게 창세기 38장은 더 이상의 어떤 설명도 없이 끝나 버립니다.
그런데 그 베레스를 왜 갑자기 천여 년의 세월이 지난 상황에서 떠올리고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다말이 유다로부터 낳은 이 베레스와 룻이 보아스를 통해 낳은 오벳과 어떤 관계가 있어 베레스로부터의 계보를 쓰는 것입니까? 그 위에 야곱, 이삭, 아브라함도 있지 않습니까? 왜 룻기에서 하필 베레스를 가장 중요한 믿음의 시조로, 가문의 최고 출발점으로 놓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베레스가 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창세기에 나오는 다말과 룻기에 나오는 룻은 유다 집안 메시아 족보가 끊어질 위기에서 메시아의 약속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구원의 때를 이어가려는 열망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구원의 대를 이어가려는 열망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대를 이어간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의 열심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려는 그 계획을 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열심을 가졌던 사람이 이방 여인 다말이요 룻이었습니다. 이 열심히 얻은 아들이 창세기 베레스요 룻기의 오벳입니다. 다말은 이스라엘의 아들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여 베레스를 얻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의 아들을 얻기 위해 고향 땅 동족과 자기 신들을 버리고 어머니를 붙쫓아와 얻은 아들이 오벳입니다. 이제 왜 룻기 저자가 베레스와 오벳을 연결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다윗을 말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오늘 여기 모인 우리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섭리를 막을 자가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너무 처절한 이야기입니다. 마1:1-17절에는 다말, 라합, 룻 세 여자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다윗과 불륜을 행한 밧세바, 처녀로서 잉태한 마리아가 들어가 있습니다. 사라라든지, 리브가, 한나 같은 여인은 한명도 안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음란과 성적인 죄를 싫어하시는데도 흠이 있는 여자들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는 죄지은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시 별반 다른 인생들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깨지기 쉬운 존재가 되어 똥 밭에서 오염되어 폐기처분될 인생이라 할찌라도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놓치지도, 결코 포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생애를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내 마음의 이런 상처, 저런 아픔< /span>, 고통으로 겹겹이 쌓여 열등감 많은 내 생애를 모든 사람 앞에 온 세상 앞에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쳐대는 당당한 인생으로 우리의 생애를 바꾸십니다. 그래서 인생의 남은 시간을 가장 값지게 만드시는 손에 이끌려 살아가는 승리자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지금 비록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인생, 지렁이처럼 땅을 기어 다니며 미물처럼 의미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던 나오미의 가정을 돌아보신 그 하나님이 지금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룻기서를 통해서 나의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더 이상 기쁨을 가진 여인으로 부르지 말라는 그 슬픔과 절망으로 얼룩진 여인을 마침내 기쁨을 회복시킨 그 사랑이 오늘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기에 우리는 내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 아-멘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시고 우리를 구해 자녀로 삼으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가 환난 당해 씨름하고 몸부림칠 때 가만히 계실 리가 있습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을 정말 의지합니까? 왜 그렇게 변하지 않으시죠? 교회출입이 몇 년인데 왜 그렇게 변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성격이,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 왜 그렇게 변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나의 인생을 헐떡거리며 달려온 열매가 무엇입니까?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니 내 재주로 산 것만 같습니다. 내가 땀 흘리면 잘 살줄 알았지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오늘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거둬 가시면 쌓아 놓은 것들이 모두 무너져 버립니다. 지금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고 기뻐할 側 있습니다. - 이 저주 같은 인생을 축복으로 바꾸시는 그 은혜의 품에 우리 인생을 맡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기쁨의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설령 이 세상이 다 무너져 없어진다 할지라도,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다 빼앗긴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아름다운 은혜가 성령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절망과 두려움의 자리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늘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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