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에서 만납시다. 마28:1-10. 2015년 4월5일 부활주일 3부 예배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4-05 |
조회: 1501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울다가도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메시지입니다. 이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주일날입니다. - 할렐루야!!
인간 최대의 절망이 무엇일까요? 중한 질병일까요? 가난일까요? 실직일까요? 인간 최대의 원수는 무엇일까요? 공산당일까요? 핵무기일까요? 인간 최대의 슬픔은 무엇일까요? 사업의 실패일까요? 실연일까요? 이러한 것들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인간 최대의 절망, 인간 최대의 원수, 인간 최대의 슬픔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를, 사랑하는 연인을, 친구를, 모든 인간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죽음은, 분명히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것입니다. 막상 살때는 몰랐는데 죽음이 갈라놓으니까 그 자리가 얼마나 큰지, “누가 그 아름다운 날의 한 조각만이라도 가져다 줄 것이냐?”고 탄식한 시인이 있습니다. 죽었던 남편이, 죽었던 자식이, 돌아가셨던 부모가 다시 살아나서 한 달만이라도, 아니 하루만이라도 함께 살수가 있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 가슴 벅찬 감격이 없을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안 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아픔을 맛보는 날이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이 찾아 올 것입니다. 죽음! 그것은 정녕 인간에게 너무도 슬프고 절망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 최대의 원수인 죄와 죽음과 지옥의 권세를, 철장으로 질그릇 깨트리듯이 부수어 버리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니, 이 어찌 가슴 설레는 희소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부활하신 이 사건, 이 소식에 대하여는 인간 언어의 모든 형용사, 모든 감탄사, 모든 수사를 다 동원해도, 그 놀라움과 그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토록 놀랍고 기쁘고 즐거운 부활주일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묻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까? 이 갈릴리는 아주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 앞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26:31-3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을 마치신 직후에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첫사랑이 어려 있는 곳입니다. 열한 제자는 모두 이곳 갈릴리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게 해 주신 곳도 갈릴리입니다. 주님은 바다의 풍랑 위를 걸으셨고 풍랑을 잔잔케 한 현장도 갈릴리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곳도 갈릴리 벳세다 들판입니다. 이제 그 주님은 이제 부활하셔서 이 갈릴리에서 제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첫 사랑’이 무엇입니까? 처음사랑이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랑 즉, 자아를 부인하는 사랑입니다. 처음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비교가 없고, 아무것도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가슴 가득히 밀려온 감격과, 주님을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렸던 황홀할 정도로 감사했던 마음, 주님이 말씀하시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섬겼던 뜨거운 열정을 만들어냈던 감격을 가진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인 시몬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시는데 한 여자가 와서 비싼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머리와 발에 부으니 가롯 유다가 화를 냅니다. ‘아니 차라리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얼마나 더 귀하겠는가.’ 그때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를 책망하시며, ‘돈이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여인에게는 예수님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처음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오히려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일도 함께 증거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첫사랑입니다. 그런데 여기 제자들이 이 사랑을 잃은 것입니다. 한때 그들이 예수를 만나고 나서 그물을 던지고 가족을 뒤로하고 죽어도 좋은 목숨이라 할만큼 정말 가슴에 그 사랑을 담고 주를 ?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렇게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너무 허무하게 죽임을 당한 모습을 보고 하나같이 무너지기 시작을 합니다. 그들이 가졌던 꿈도 희망도 잃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힘이 들어도 이 첫사랑을 잃으면 결국 영적 방황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어두움의 세력에 빠져 더 비참한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인생, 하나님의 돌보심을 깨닫지 못하는 인생은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갈릴리에 무슨 매력이 있겠습니까? ‘갈릴리 출신’이라는 말은 ‘버림받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이들에게 3년 동안 얼마나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으셨습니까? 할만큼 했지 않습니까? 이제 가망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아예 새판을 짜서 새롭게 얼마든지 부활하신 주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제자를 세워 하실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널부러져 있는 당신의 제자들을 일으키기 위해 이 갈릴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걸 꼭 기억하십시다. 나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가치 있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세상에서는 우리를 그렇게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우리 주님의 눈에는 우리가 그렇게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를 찾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실패했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악에 때묻어 더러운 냄새가 나는 삶을 살아왔어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세리와 죄인들처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멀리하고 우리를 향하여 돌팔매질을 한다 하더라도, 그럴수록 우리 주님은 우리를 더욱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못나고 가난하여 가진 것 없어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분의 양이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는 우리의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2. 이 갈릴리는 예수님과 처음 만난 추억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실패한 제자들이 다시 붙들어야 할 사명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보세요.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람들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십자가 지실 때에는 무서워서 다 도망갔던 겁쟁이들이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다.”(행3:14~15)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도들이 위협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였으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겁쟁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변화되어 순교를 무릅쓰고 부활의 주님을 담대하게 증거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도마는 인도에 가서 순교를 하고, 마태는 에디오피아에 가서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했고, 그의 형제 안드레는 X자 형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우리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주님을 처음 만난 곳, 그리고 그 사랑 앞에 나의 삶을 주님께 드리기로 고백했던 그 장소가 어디입니까? 여러분, 가운데 그 처음 만난 그 사건을 다 잊으셨나요.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언제, 어쩌다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영혼의 열정을 잃었습니까?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습니까? 언제부터 삶의 활력을 잃고 믿음의 가장 자리에서 맴돌게 되셨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바둑을 좋아하는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프로 바둑 기사가 바둑 한판을 두는데는 보통 400여 수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프로 기사들은 바둑이 끝나고 나서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하게 복기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 분들의 두뇌가 뛰어난데다가 강훈련을 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프로가 아니더래도 이것은 가능합니다. 저도 바둑을 좋아합니다. 어느 날 바둑을 잘 두시는 분에게 어떻게 복기가 가능한가를 물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대담을 했습니다. “프로 기사들은 의미 없는 돌을 놓지 않습니다. 의미 있는 돌만을 놓기 때문에 그 의미를 따라가면 복기가 가능하지요”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30년을 살았습니까? 50년, 혹은 그 이상을 살아 오셨습니까? 가운데 몇 수까지를 복기할 수가 있습니까? 만약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게, 복기할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살았다면 내 인생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부터는 의미 있는 돌을 놓아야 합니다. 자! 어디서 첫 사랑을 잃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아마 다 첫 사랑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부부 생활, 지금도 그 사랑의 힘 때문에 정말 윤기 나는 삶을 살아가나요? 아니면 이미 마지못해 살아가는 그런 사이는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시간 정말 내가 가진 믿음의 문제가 있다면, 무엇 때문에 언제부터 내가 그 언약, 그 결심에서 멀어져 갔는가를 기억해 내셔야 합니다. 회개는 돌아가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듯 내가 서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살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봉사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뜨겁게 교통하던 그 경건의 자리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천하디 천한 여인인 막달라 마리아가 세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만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입니까? 눅8:2절에 보게 되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라는 구절이 나오고 있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린 여인' 자기 자신을 스스로 통제 할 수 없는 한 불행한 여인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귀신에 지배당하며 살아야하는 그 비참함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라이트 푸드라는 신학자는 이 '일곱 귀신'을 음란 귀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저자 거리에서 자신의 몸뚱이로 남정네를 꼬셔서 살아가는 요즘 말하는 집 창촌의 창녀가 아닙니까?
그러나 세상이 버린 자기를 받아 주신 그 사랑 앞에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살지 않습니다. 그는 본문에 있는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를 다 받아주신 주님의 사랑을 가슴에 지니고 무덤을 향해 달려 간 것입니다. 그런 그녀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를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엄청난 부활의 모습을 본 막달라는 이 땅에 최초의 부활의 증인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당시 이 부활의 소식을 전했지만, 제자들마져도 믿지를 못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자 이런 사람이 예수가 살았다고 떠드니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꼭 증거 하시려고 한다면 차라리 빌라도 앞에 나타나셔서 "내가 살아났느니라. 봐라." 하시면 간단할 것 같지 않습니까? 빌라도가 나가서 예수님이 산 것을 자신이 보았다고 몇 마디만 하면, 그 소문이 유대나라로 와서 로마 전국으로 좍 퍼져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다 믿었을 것입니다. "아 빌라도가 보았다는데 어떻게 의심하겠는가." 이럴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나 그 외 하찮은 여자들 입에서 예수가 살았다고 했으니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부활은 확실히 우주를 진동 시키는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그 일이 너무나 신비스럽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사람들의 구성이 이상했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 것을 영원히 어려운 문제로 만들어 버렸다." 저는 이 말에 수긍합니다. 예수님이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러 나가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군병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신비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는 믿기가 어렵죠? 게다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여자들이었습니다. 그 증인들이 여자들인 것입니다. 그 당시 여자들은 재판석에서 증인으로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인식을 했습니다. 여자들의 입에서 무슨 옳고 그른 말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며 증인으로 채택도 안 하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전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바울을 잘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 하는 것이 본인의 사명이었습니다. 부흥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초토화 시켰고, 믿는 자들을 공의회에 넘겨 줄만큼 눈물도 인정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의 생애가 바뀌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그의 영광스러운 빛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간신히 눈을 뜨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다메섹은 그의 인생관을 바꾸었던 영적 갈릴리였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로 그의 삶의 마지막 자신을 제물로 드려지는 자리까지 후회없는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구주를 생각만 해도 그 첫사랑에 대한 열정이 있습니까? 사실 우리가 전에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잖습니까? 누구보다 희생의 자리에, 섰고 그 누구보다 헌신하기를 원했던 여러분들이 아니었습니까? 이제 그 감격, 그 은혜 다시 회복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부활의 능력은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습니다.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 벽안의 선교사 언더우드가 인천항에 도착했습니다. 소망이 없던 조선 땅에 어둠의 권세가 득세하던 조선 땅에 빛의 자녀 된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한 것입니다. 저는 부활절을 앞둔 이 시점에 언더우드 선교사를 떠올려 봅니다. 그는 마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처럼 조선에 소망을 주기 위해 이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현실을 바라본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의 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 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洋鬼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조선 땅,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사람... 120년 전의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땅에,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YMCA를 조직하고, 연희전문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후 조선에는 희망의 싹이 돋아 오르고, 지금은 선교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120년 전 언더우드와 같이 부활의 예수님을 믿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임"을 믿음 하나가 오늘 찬란한 부활의 열매가 이 땅에 맺히지 않았습니까? 이제 이 은혜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꿉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면 식어진 심령이 뜨겁게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던 사람도 예수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감동 없이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혹시 입만 열면 주로 불평이나 원망이나 비판이 나오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혹시 기쁨으로 봉사하기보다 억지로 의무감에서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삶의 목표를 상실한 채 살고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이 자리가 여러분에게 축복의 갈릴 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망 권세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전에 이미 체험했다 할지라도, 다시 한 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 부활의 이 아침!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타성에 젖은 모든 묶여 있는 것들이 무덤을 가르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풀려지를 원합니다. 이제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이 바람이 우리 가정과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를 흔드는 모든 세속의 바람들을 무력화시키는 거룩한 태풍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영광이 세상 앞에 드러나서 광진구에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 앞으로 나아오는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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