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 하나님의 사랑. 출 25:1-9. 2015년 3월29일 주일 설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3-29 |
조회: 1491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첫 날입니다. 고난주간 첫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는 노래를 부르며 환영했기에 ‘종려주일’로 그리고 한때는 ‘호산나 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부터 한 주간 성막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가 한 주간 살펴보는 출애굽기서는 총 40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40장 가운데 25장이 전부 성막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막의 내용은 출애굽기에서 가장 깁니다. 백성들에 대한 구원은 순간이지만 구원 후의 신자들의 삶의 길은 길고 지속적인 것을 가르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그 광야 여정 속에서 수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게 하십니다. 출애굽의 감격이 사라지기도 전에 홍해가 가로막혀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집니다. 마실 물이 없어서 갈증에 시달립니다. 때로는 전갈과 같은 독충을 만나기도 합니다. 아말렉과 에돔 등 수많은 이방 족속들의 방해를 받습니다. 때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기고 합니다. 왜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이런 곤경에 처하게 만드셨을까요? 원래 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는 걸어서 일주일이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려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과정임을 보여줍니다.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당사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나 심판처럼 여겼을지 모르지만 그 속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4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그들은 과거에 애굽에 있을 때 젖었던 노예근성을 벗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변해가는 성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므로 광야 길은 오히려 택하신 백성들을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에게 두가지 선물은 주셨습니다. 하나는 율법이고 다른 하나는 모세가 들고 온 것이 바로 성막의 설계도입니다. 율법과 성전은 이스라엘 신앙의 두 기둥입니다. 그런데 이 때 만약 모세가 율법만 가지고 나왔다면 인류역사에는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달해야 할 높은 수준의 도덕율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을 살아가야할 삶의 기준을 보여준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죄를 보고 화가 난 모세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을 깨뜨렸습니다. 율법이 깨어졌습니다. 율법으로는 하나님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않고 그 죄를 용서받고 여전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죄를 용서받는 장소, 상처받고 좌절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 회복되는 장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장소가 바로 성막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에는 늘 감격이 있었습니다. 회복이 있고, 치료가 있었습니다. 우리교회가 광야의 성막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 소개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아무리 연단이요, 훈련이라 할찌라도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고통의 땅에서 하루 이틀도 아닌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목마를 때 쓴 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었기 때문입니까?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늘에서 만나가 비처럼 내리고 메추라기 떼가 먹을 것이 되고, 바위에서 샘물이 나고, 원수가 공격했을 때 그 원수를 물리친 것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가장 중요한 버팀목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바른 삶을 살 때 이 광야의 삶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엇을 가졌느냐, 많은것을 가졌느냐가 행복의 기준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행복의 기준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나를 만드시고 나를 창조하신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기만 한다면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심할 수 있습니다. 마실 물이 없어도, 먹을 음식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고난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인생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게 중요한 지 아십니까? 여기 출25:22절에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생각해 보세요. 죄로 인해 감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우리에게 이 성막은 엄청난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즘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교회가 재미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재미로 교회다니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감동을 주는 장소, 감동을 주는 그런 일을 찾아다닙니다. 젊은이들은 감동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감동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빠져나가 다른 것에 열광합니다. 춤과 노래에 열광하고 스포츠에 열광합니다. 어른들도 교회를 빠져나가 도박이나 마약, 음란한 죄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를 “감동을 잃어버린 시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메말라가서 특별히 좋은 것도, 특별히 나쁜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어지간한 것을 보아도 감동이 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살인, 사람이 죽었다 그러면 대단한 이슈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하도 죽는 것을 많이 보아서 별로 자극이 안됩니다. 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사기를 쳤다, 누가 무슨 죄를 지었다’ 그러면 당연히 분노가 일어나야 되는데 분노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어디에서 부흥회를 한다 그러면 기대감, 한번 가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그런 것이겠지요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교회 안에 30이 넘은 노총각들이 있는데 그들을 보면 참 안스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30대 중반의 어느 청년들에게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으면 다리를 놓아줄테니까 한번 말해보라’고 물어 보았더니 어렵게 자기가 좋아하는 한 자매를 말하는데, 그 38살 먹은 노총각이 좋아하는 자매가 스무살의 어린 자매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노총각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왜 어린 자매를 좋아하느냐하면 어린 자매일수록 잘 놀라고 감격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멋진 야외로 데리고 나가면 “와 멋지네요, 이런데 처음와봐요!” 라고 반응을 합니다. 또 맛있는 음식점에 데리고 가서 비싼 음식을 사주면 “와 놀랐어요 이런 음식 처음먹어 봤어요!”라고 놀랍니다. 데이트 하다가 손을 잡으면 ‘와 놀랐어요 남자손에 이렇게 큰지 몰랐어요!’ 라고 놀랍니다.
이래서 놀라고 저래서 놀라니까 ‘이 여자를 놀랍게 하기 위해서는 목숨도 걸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왜 어린 자매에게 매력이 있습니까? 잘 놀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 많은 자매를 만나면 무슨 일에도 절대 놀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데 와 봤어?’라고 물어보면 ‘야 수십번도 더 와 봤다 이젠 지겹다 지겨워’ 음식을 사주고 ‘먹어봤어?’라고 물어보면 ‘이거 코스잖아. 내가 더 좋은데 알려줄까?’ 그러다가 손이라도 잡으면 ‘이제 슬슬 수작을 시작하는군 더러운 놈!’ 이렇게 나온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매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누가 매력적인 사람입니까? 나이가 들었는데도 잘 놀라는 사람입니다. 누가 매력적인 성도입니까? 잘 놀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경이로움에 놀라서 찬양하고 감격해 하는 사람이 매력적인 성도입니다. 누가 매력없는 성도입니까? 반응이 없는 사람입니다. 찬송도 없고 감격도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어른들보다 휠신 더 놀라는 것이 많습니다. 꽃을 보고 놀라고, 새를 보고 놀라고 모든 것을 신기해 하고 경이로워합니다. 놀라움, 경이로움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앞에 서는 사람이 정말 매력적인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매력적인 믿음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늘 감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예배, 똑같은 찬송, 그리고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말씀이 선포되는데도 늘 감동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말씀을 들어도 눈물이 납니다. 찬양할 때마다 가슴이 떨려옵니다. 이런 분은 그 영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영적인 상처를 받으면 영이 눌린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과 구원의 감격, 감동이 사라집니다. 여러분들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여러분들의 가슴속에는 감동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감동할 수 있는 것, 하나님에 대한 경이로움을 찬양하는 것은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은 무엇보다 예배에서부터 옵니다.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이 즐거운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예배가 즐거워지는 것이 부흥이 임한 가장 큰 증거입니다. 예배는 한마디로 감격적이어야 합니다. 흥분이 있고 탄성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자! 보세요 지금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가 제대로 자랄 수 없는 이 광야 생활에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갑니까? 출 40:34-38에 보면 성막이 완성될 때 불.구름 기둥이 성막을 덮었습니다. 그 불기둥과 구름 기둥은 항상 성막을 중심 으로 머물기도 하고 앞서 가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광야 생활하면서 “자 이제는 그만 가자! 여기서 오래 머물렀으니”라는 식으로 자유롭게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천부장 회의에서 떠날 날짜를 다수결로 정한 것도 아닙니다. 또한 12명의 족장 회의에서 타협을 본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도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3세 지파씩 무리를 지어서 생활했습니다. 좀 더 쉬고 싶어도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가야했습니다. 좀 더 가고 싶어도 구름 기둥이 머물면 멈추어야 했습니다. 철저하게 성막을 중심으로 이동을 하고 또 성막 아래로 모여 머물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성막 안에는 누구나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제물을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 제물을 죽여 피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성막 안을 들여다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흐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막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성전의 기구들이 나옵니다. 놋 제단, 물두멍, 그리고 성소에 들어가면 금 촛대, 향단, 떡상 그리고 지성소에 속죄소에 있는 법궤, 이 모든 것이 오실 예수를 우리에게 너무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냥 나아가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은 죄를 대신 할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잘사는 사람은 소를 가지고 나오고, 보통 사람들은 양을 가지고 옵니다.
심지어 아무리 가난해도 빈손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비둘기라도 반드시 가지고 제단에 바쳐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소를 가지고 나와 그 소를 제물로 바쳤다고 칩시다. 그 소가 죄가 있나요? 아닙니다. 죄 없는 소가 나 대신 죽는 것입니다. 제사장 앞에 소를 잡을 때, 갖고 온 사람이 안수를 합니다. 내 지은 죄를 전가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의 목을 딸 때 그것을 지켜보는 심정이 어떻습니까? 다시는 죄 짓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또 짓습니다. 우리의 제사는 일회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라는 말을 기억하시나요? 그 때 어떤 현상이 생겼습니까? 갑자기 온 천지가 어두어 지고 예루살렘성전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 위에서부터 쫙 찢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바깥에서부터 지성소가 환히 들여다보이고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법궤가 모든 사람 눈에 들어오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성소에 들어가고 지성소에 들어가도 안 죽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아놓은 죄악의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10:19-2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육체를 찢어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휘장이라는 것이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성소의 휘장을 제치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거기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하루만 들어가도록 허락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피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담대하게 성소를 지나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제 평생에 정말 잊을 수가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해마다 교회 청년들이 단기 선교를 갑니다만, 한번은 강영순 선교사님이 있는 몽골 울란바토르에 우리 청년들이 선교를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강선교사님은 다리를 저는 소아마비였음에도 불구하고, 몽골 청소년 탁구 대표팀을 지도하는 코치로 계셨습니다. 우리 일행이 일정을 마치고 떠나기 전날에 너무 아쉬웠든지 양한마리를 잡아 주셨습니다. 저와 우리 청년들이 그때 양을 잡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양을 마당 한 가운데 거꾸로 눕힐 때에도 양은 전혀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양은 다른 가축의 경우처럼 정수리를 찍거나 혹은 목을 따서 죽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기 위해 거꾸로 눕힌 양의 배 가죽만을 칼로 조금 갈랐습니다. 그러자 속에 있던 밥통의 윗부분이 잘라진 틈으로 불거져 오르면서 피가 흐르지 못하도록 자동마개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몽고인은 양의 배 가죽과 밥통 사이로 손을 넣어 양의 숨통을 눌러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무지막지한 사람의 손이 그처럼 양의 배를 가르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숨통을 틀어쥐는데도 양이 신음소리를 한번도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숨이 너머 가는 마지막 순간 허공을 향해 치켜든 네 다리를 파르르 떨 뿐이었습니다.
양이 죽자 손을 빼낸 몽고인은 양의 털가죽을 다 벗겨낸 다음 양의 배를 완전히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흥건히 고여 있는 피를 주걱으로 남김없이 다 퍼내었습니다. 그렇게 잡은 양고기와 내장, 피를 돌멩이와 함께 큰 통에 넣고 몇 시간을 삶은 뒤, 마침내 조리가 끝난 양고기를 시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우리 청년들은 처음에는 양고기를 어느 누구하나 입에다 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 둘씩 그 양고기를 먹기 시작을 했습니다만, 그날 그 시식은 양고기를 씹는 것이 아니라 사53:7절의 의미를 되씹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았도다."
이 세상에 많고 많은 동물들 가운데 왜 구약의 사람들이 유독 양을 속죄의 제물로 즐겨 사용하였는지,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셨는지, 왜 성경이 하필이면 주님을 양에 비유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그날 확연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양은 자기 생명을 남을 위하여 잠잠히, 그리고 기꺼이 내어놓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를 가르고 속으로 손을 넣어 숨통을 눌러도 반항 한번 없이 자기 생명을 내어놓으므로 양이 인간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듯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내어놓으시므로, 잠잠히 포기하시므로 인류의 구원자,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는 휘장을 찢으신 것처럼 죄인인 우리를 당신의 몸을 찢으셔서 구원의 길을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다리를 이 땅에 연결시켜 놓으셨습니다. 그 다리를 통과하는 자는 하늘과 통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찢으셨습니다. 당신의 가슴과도 같은 하늘을 찢으시고 우리를 그 길로 오게 하셨습니다.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한량없이 베푸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도록 말입니다.
여러분, 하늘을 찢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그 하나님을 외면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길이 여기가 있는데, 다른 데서 영원으로 가는 길을 묻거나 찾는다면 얼마나 가슴 아프시겠습니까? 여기에 하늘을 찢으시고 축복을 베푸시려고 준비해 놓으셨는데, 다른 곳에서 복을 달라고 빌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붉은 죄가 눈 같이 희어졌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 되었고 딸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찌 십자가를 멀리서 쳐다보면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좀 더 가까이 가보고 싶고 좀 더 알고 싶어 하는 안타까움과 갈증이 마음에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막을 보며 왜 이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가를 다시금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한 주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바짝바짝 다가 앉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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