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손해입니까? 룻4:1-10. 2015년 3월22일 제 5강 완성본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3-22 |
조회: 1653
몇해 전에 미국에서는 리얼리티 쇼 ‘백만장자 조’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됐습니다. 잘생겼지만 가난한 불도저 기사를 교육시킨 후 아름다운 성을 소유하고 있고, 5000만 달러를 상속받을 프랑스 귀족으로 위장시킵니다. 방송국은 이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고 싶은 프랑스 여성들을 모읍니다. 그가 가짜인 줄도 모르고 수많은 여성들이 지원했습니다. 백만장자와 결혼해 인생을 바꿔 보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꿈인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정말 그렇지는 않겠지만, 결혼 역시 요즘 경제 논리로 생각을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가끔 남자 청년들에게 물어 보면, 왜 장가를 안가는가하는 질문에 대다수는 돈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돈, 물질이 중요합니다.
돈을 영어로 머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도둑들이 사용하는 돈은 설거머니입니다. 계란 장수가 사용하는 돈은 따로 있습니다. 에그머니입니다. 그 돈을 쓰면 마음이 짠합니다. 어머니입니다.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돈이 있답니다. 아주머니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돈이 있습니다. 할머니 며느리들이 두려워하는 돈이 있습니다. 시어머니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시회는 무엇을 그 중심에 두고 있습니까? 무엇을 높은 가치로 두고 있습니까? 돈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늘 마음속에 이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니면 손해가 되는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도 이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손해인가? 우리는 자녀에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익이 되는 사람을 만나라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할 때에도 이것이 나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 손해가 될 것인가 그렇게 늘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익 중심의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이윤추구를 하는 이 경제성의 법칙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항상 우리 가운데는 이익인가 손해인가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경제 생활에만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황에도 얼마든지 이런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부자청년을 보세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나선 발걸음이지만, 자신의 것을 다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그 말 한마디에 영생을 위해서 손해가 나더라도 그 길을 나서야 하는데 손해가 될 것을 생각하니까 따르지를 못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룻기 4:1-10절의 말씀을 통해서 손해가 무엇인가? 손해가 어떤 것인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손해는 내 것이 없어지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지금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은 나오미입니다. 이 나오미는 베들레헴 본토에서 살기가 어려워서 모압 땅으로 경제 생할 때문에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원치 않는 큰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남편을 잃고 두 자식마져 잃습니다. 누가 이런 어려움이 올 줄 알았다면 이와같은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겠습니까?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기 위해 떠난 것인데 그곳에서 상상도 못할 엄청난 다시는 재기할 수 없는 상처와 손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결국 나오미는 자신을 따라온 이방 며느리 룻과 함께 지난 날 고향인 베들레헴에 도착을 하고 힘겨운 생존의 삶을 살기위해 눈물겨운 몸부림을 치며 삽니다. 생각해 보세요. 막상 도착한 고향 땅이지만, 예전의 삶이 아닙니다. 겨우 남의 밭에 널려있는 이삭을 주우며 산다는 것,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얼마나 힘든 삶이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요즘말로 하면 사회 보장제도가 있었습니다. 고엘 제도입니다. - 고엘이란 '어려운 친척을 책임져 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친척 중에 어려운 자가 있으면 가장 가까운 친척이 책임지고 돌봐주는 제도'입니다. 레25:23절 이하에 이 제도가 설명되고 있는데 '가난해져서 땅을 팔아 그 땅을 잃어버린 자의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다시 사서 돌려주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제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재산만 물리는 게 아니라 자식 없는 과부도 책임져서 자녀를 낳으면 전남편의 아들로 입적해서 그 집안의 대가 끊기지 않도록 하는 제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동족과 친척을 끝까지 책임지고 보호하려는 자세가 담겨져 있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사상이 바로 이 고엘사상입니다. - 본문은 기업 무를 자라고 소개를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나오미의 한가닥 희망은 자신의 무너진 가문을 누가 돌보아주고 다시 일으켜 세워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사실은 룻이 우연히 들어간 밭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보아스입니다. - 룻2:20절 하반절에 보면 보아스에 대해 소개합니다. “ 그는 우리 기업무를 자중의 하나니라” 여기 보아스가 본명히 기업 무를 자인데 그 엘리멜렉 집안을 책임져 줄 첫 번째 친척이 아니고 두 번째 친척입니다. 엘리멜렉의 기업을 우선적으로 무를 책임과 자격을 갖춘 자가 따로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자기보다 앞선 기업 무를 자가 자기 앞을 지나갑니다. 성경에 보면 그의 이름이 소개되는 데 그의 성은 아씨고 이름은 무개입니다. 그 무명씨가 기업 무를 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나오미의 가업을 회복시켜주고 그리고 룻을 아내로 맞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들을 불러다 놓고 아무개씨 기업 무를 자에게 보아스는 말합니다. 이제 당신이 기업 무를 자 우선순위기 때문에 당신이 기업을 무르고 회복하라고 하니까, 이 아무개씨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것이 이익이 될 거 같앴어요. 왜냐하니까 나오미 집안에는 남자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그 기업을 물러주면 되기는 하지만 그 땅을 전부 자기가 상속을 받을 것이고 거기에 있는 권한을 다 가지기 때문에 자기한테 이것이 이익이 될 것이라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무개씨는 4절에 ‘내가 기업무를 자’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당신이 땅을 책임질 뿐 아니라 죽은 자의 아내도 책임져야 한다. 룻도 책임져야 한다. 그 이야기를 했을 때에, 갑자기 그 아무개씨는 태도를 바꾸어서 돌변합니다. 6절입니다.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은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이것은 나한테 손해가 되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아무개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나한테 이익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이것이 나한테 손해가 될 것인가 그것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가치였고, 판단의 요인이 된 것입니다. 나는 이익이 되면은 내가 움직이지만, 나는 손해는 내가 볼 수가 없습니다. 나한테 손해가 되는 것은 너무너무 두렵습니다. 내가 손해보면서까지 이 일은 할 수가 없다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아무개씨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참 낯익은 얼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신앙생활 할 때도 내가 이게 이익이 되는가, 아니면 내가 손해가 되는가, 그런 관심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이게 나에게 유익이냐를 항상 따집니다. 그래서 힘들고 손해나는 것은 아예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여론을 만들어서 자기 주장을 정당화 합니다.
그러나 여기 보아스를 보세요. 보아스는 시리아 역에 의하면 그는 율법을 정통한 유력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당대의 베들레헴 근교에 가장 유력한 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보아스와 룻을 비교하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룻은 이방의 여인이고, 또 이미 한번 결혼을 했던 재혼하는 여인이고, 또 아무 재산도 없는 가난한 여인입니다. 룻은 지금 보아스집에 와가지고 이삭을 줍는 여자의 한 사람입니다. 보아스는 이스라엘의 유력자 살몬장군의 아들이고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고, 마치 지금으로 말하자면 재벌 2세와 같은 그런 유력자인 것입니다. 영향력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인품도 아주 고상합니다.
그런 보아스가 지금 아무개씨가 버린 이방 여인이요, 한번 결혼한 여인인 룻을 자기의 아내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 엄청난 손해가 아닙니까?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영국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8세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니까 1936년 12월 11일, 영국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8세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나는 지금 이 시간 국왕 자리를 포기한다'고 하였습니다.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에 이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임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왕이 된지 1년밖에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왕의 자리를 내려놓는 이유가 뭐냐면 '내가 왕의 자리를 포기하는 것은 내 사랑하는 여인 월리스 심슨과 결혼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발표한 것입니다. 심슨이라는 여인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여인이 어떤 분이기에 국왕의 자리를 내놓을 만큼, 그런 결단을 했습니까? 영국은 국왕도 교회법을 지켜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교회법이 모든 법 위에 있습니다. 의회도 교회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국왕이 결혼을 할 때는 이혼한 부인과는 결혼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심슨이라고 하는 부인은 미국 여자인데 결혼을 두 번이나 한 분이었습니다. 도무지 결혼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에드워드 8세는 대영제국의 왕입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그 강한 나라의 국왕이, 결혼도 안한 총각이 심슨을 사랑한다 해도 어려운데 왕의 자리를 포기할 정도로 심슨을 사랑한다는 거예요. 심슨도 너무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거절하고 본인이 반대했지만 에드워드 8세가 자살하려고 합니다. 얼마나 대단한지 결국 그래서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고 왕궁을 떠나서 조용한 곳에 가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학전집에나 나올 이런 이야기는 인류역사에 다시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드워드가 국왕을 포기하고 평범한 사랑을 택한 이보다 더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 하나 있습니다. 이 기업무를 자를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영국을 버리는 게 아니에요. 하늘의 영광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혼한 여인이 아니에요.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이 죽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와 하나 되도록,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삶이 되도록 주님이 일방적으로 나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신 거예요.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역사에 최고의 복음이요 기쁨이요 소망입니다. 이 이상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사랑과 다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 마지막이 상처와 이별과 아픔으로 끝나는 사랑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사랑은 구원입니다. 그 사랑은 생명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언제까지나 가슴속에 머물면서 살아 역사하는 힘이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지금 보아스는 단순히 손해를 보았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손해나는 일에 삶을 던집니까? 위대한 손해를 볼 수 있었던 결정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아스는 바로 - 기업무를 자의 약속을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에 있어서 우선순위는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내가 그 여인을 내가 원하기 때문에가 아니고, 그것보다도 앞서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기업무를 자라고 하는 것이 그에게 중요한 가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업 무를 자에는 엄청난 자기희생과 손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 발전적인 계시의 의미로는 구속을 덮는 다시 말하면 인생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기업 무를 자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기업 무를 자, 고엘로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 바로 그 기업 무를 자 속에 숨어있는 계시의 의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누가 정말 손해를 보셨습니까? 누가 정말 위대한 손해를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보세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의 근본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함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가지셔서 사람이 되신 예수그리스도 그분이야말로 고엘, 기업무를 자이셨습니다. 그 분은 하늘 보좌를 손해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손해보셨습니다. 영광을 손해보셨습니다. 그 분은 이 땅의 이 천한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걸 버리시는 손해를 보시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업 무를 자, 손해 본 의미가 그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이 자리에 앉아계신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자기의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살리지 않으셨습니까? 자기 아들까지 주시면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당신이라고 말해줄 만한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을까요? 때문에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까지 투자해 주셨으니까요. 그분이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고 내 생명을 살리시고 투자해 주셨다면, 오늘 우리 인생은 살만하지 않습니까?
제 친구 목사님 가운데 딸이 미스 코리아 출신이 있습니다. 미스코리아선발대회에서 한 사람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요즘은 일억 오천만원정도 들어간다고 합니다. 옷부터 시작해서 화장품, 마사지까지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 어떤 사람을 선발합니까? 원판이 괜찮은 사람을 뽑습니다. 원판이 별로인 사람은 투자도 하지 않습니다. 정말 냉혹한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 주님께서 그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나를 자녀 삼으신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내가 너를 고치는데 얼마큼의 비용이 들어가든지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라는 말씀이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왜 내가 나를 포기합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은데, 왜 마음대로 내가 나를 버리고 희망이 없는 사람처럼, 사랑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까?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 좀 당당하게 살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회복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이 한쪽으로 가도 하나님께서 다른 쪽 길로 가라고 하시면 힘들고 손해를 받아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지켜주십니다. 그 정도 믿음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 생각하면 구별하여서 옳은 삶을 선택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옳은 것이라면 내 삶을 드려야하지 않을까요?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어려운 세대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을 할 때에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바른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언지 찾으면서 바로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다보면 어려운 상황에 접할 때가 많습니다. 돈도 하나님과 같은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요즘 상황의 어려움 때문에 자살충동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높은 데만 올라가면 뛰어내리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물가에 가면 물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차 몰고 반대편으로 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살으라 하시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감사하라고 하시면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고,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떠나야만 합니다. 그러한 신앙의 결단들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손해라고 생각했던 일이 오히려 전화 위복이 되었습니다. 큰 손해를 보고 결혼하기로 결정한 보아스. 큰 손해로 시어머니 따라왔던 룻에게 두 사람의 그 손해로 말미암아 만나졌던 이들에게 엄청난 하나님의 복이 임했습니다. 이 룻에게 태문을 열어주셔서 오벳이란 선물을 주십니다. 이 오벳을 통해 그 후손 가운데 바로 다윗의 가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손해는 거룩한 손해, 위대한 손해 속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숨어있어요. 사람은 이익인가 손해인가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결정하고 판단하고 그것을 쫓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거룩한 손해가운데, 영광을 받으시고, 그 가운에 하나님 축복을 예비해 두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결과를 놓고 볼 때 '이 아무개'는 참으로 애석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는 눈앞의 이익에 눈 멀어 보물을 차버린 겁니다.
어떤 사람이 새벽녘에 강가에서 돌을 주워 물 속으로 던졌는데 잠시 후 동이 터 올 때 보니깐 그게 돌이 아니라 다이아몬드였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 이런 어리석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주님 앞에 나와 영생의 길을 묻고서도 슬픈 기색을 띠며 돌아갔던 부자 청년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버리고 쫓는 자에게는 하늘의 보화가 쏟아진다지만 그 내일에 쏟아질 하늘의 보화보다 오늘 내 손 안에 있는 돈 몇푼이 더 귀중한 겁니다. 믿음없는 사람에게는... 그러니 그걸 얼른 놓고 빈손으로 있다가 하늘의 보화를 잡아야 하는데 그걸 놓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으니 그 하늘의 보화를 잡질 못하는 겁니다.
무디 목사님이 한 젊은이에게 말했습니다. “젊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나, 예배 시간에도 빠지고, 봉사도 안하나.” 그러자 젊은이가 대답합니다. “목사님, 나이 먹고, 돈도 벌고, 여유가 생길 때 …늙어서 잘 하겠습니다.” 목사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에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아예 시든 꽃 한 송이를 선물했습니다. 선물을 받은 젊은이는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무디 목사님이 말씀합니다. “너도 시든 꽃이 싫은데 하나님은 좋으시겠냐?” 그렇습니다. 지금 시간이 있을 때, 지금 건강 주셨을 때, 지금 봉사의 기회를 주셨을 때 믿음으로 순종하십시오. 후회하는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아직도 내가 주인삼고 있는 것이 있으면 내려놓으십시오.
이 아침!! 내가 주님보다 사랑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회개할 것이 있으면 지금 하십시오. 용서할 일이 있으면 지금 용서하십시오.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으면 지금 하십시오. 섬겨야 할 일이 있으면 지금 섬기십시오. 그것이 손해가 나는 일이 있더래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손해를 감수하십시오. 기도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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