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날개 안으로 룻2:8-13. 2015년 3월 15일 -룻기 제 ④강-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3-16 |
조회: 1599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질문을 드린다니까 긴장을 하는데 쉬운 질문입니다. 한국 남자들이 모이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예, 맞습니다. 군대 이야기입니다. 한국 여자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요? 예, 맞습니다. 군대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남자들이 만나면 다시 군대 이야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그보다 더 강렬한 자극적인 인생 체험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체로 군대를 체험한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 동안 기억되는 군 생활의 이미지들은 "인원 파악, 선착순, 불침번, 줄 빳다, 도하훈련, 유격훈련"등의 경험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모이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은혜’입니다. 이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합니다. 주일날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아마 은혜일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 참 많이 은혜 받았습니다." "아, 저 집사님은 보기만 해도 은혜스러워!" "우리 교회는 은혜가 넘쳐!" "나는 정말 큰 은혜 받았어!" 대단한 일을 했을 때 누군가 칭찬을 하면 "다 하나님의 은혜지요. 제가 했나요!" 이렇듯 '은혜'라는 단어를 수없이 쓰는데, 은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확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은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헨'이라는 단어는 '구부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호의를 말합니다.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원래 은혜라고 합니다. 신학적인 의미로 부연한다면,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베푸는 자발적인 호의, 이 말을 우리의 삶과 연관시켜 아주 명쾌하게 설명하신 신학자가 있습니다. 작고하신 도날드 반 하우스입니다. "위를 향한 사랑, 그것은 예배이다. 바깥을 향한 사랑, 그것은 자비이다. 아래로 향한 사랑,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그렇습니다. 은혜란, 아랫사람은 받을 자격이 전혀 없지만, 윗사람이 그에게 베푸는 호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는 선물입니다. 주는 자가 아무 조건도 없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은혜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말합 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 같으나 알고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 왜? 다 죄인이니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죄인 아닌 사람은 없다. 그러나 두 가지 죄인이 있다. 하나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죄인 됨을 알고 사는 죄인, 또 하나는 죄인이면서도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혹은 내 잘못까지도 남에게 떠맡기고 내가 왜 죄인이냐고 죄인이 아니라고 굳이 고집부리면서 사는 교만한 죄인,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안 입은 사람은 없습니다. 은혜 속에 태어나서 은혜 속에 삽니다. 모두가 은혜 속에서 사나 은혜를 아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배반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한 본문 2장을 보면, 룻과 관련된 묘사 중에 ‘은혜’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사용됩니다. 혹시 기억나시나요? 1장에는 어떤 단어가 등장합니까? ‘죽음’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2장을 넘어오면 마치 궤도 이탈을 한 열차를 다시 복구해서 움직이게 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드디어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고 슬픔 가득한 모습으로 이방의 땅에서 얻은 며느리 룻을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나오미는 비탄에 잠겨 있었고, 그들의 옹색한 행색을 바라보는 고향 사람들의 시선도 싸늘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평범한 일상이 시작됩니다. 우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어야 살지 않습니까? 우선 당장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본문 바로 앞인 1:22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때는 보리추수를 할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땅에서는 보통 보리 추수가 끝나면 곧 이어서 밀을 추수합니다. 그렇다면 한 해 농사가 이미 끝난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가문에 기업으로 물려받은 밭이 있다 하더라도 보리나 밀을 심어 추수하려면 앞으로 최소한 1년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더구나 가족 중에 남자가 없어 두 여인의 힘만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이 시급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남의 논에 가서 이삭을 주워 그것으로 양식을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추수할 때 밭주인은 鵑穩沮 가져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은 농사지을 땅이 없는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들을 위한 양식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나오미와 룻도 남의 논에 가서 이삭을 주워와야만 했습니다. 며느리 룻이 이삭을 주워오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여기에서 ‘우연히’ 라는 단어는 룻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룻이 이삭을 줍기 위해서 한 밭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누구네 밭에 가서 주워야지’ 그렇게 마음 먹고 간 것이 아닙니다. 아무 계획 없이 한 밭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밭이 친족의 밭이었습니다.
그런데 4절에는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룻은 아무 밭이나 들어갔습니다. 이삭을 줍는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들어간 밭이 친족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마침 보아스가 나타났습니다. ‘베들레헴에서부터 왔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마침’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됩니다. ‘우연히’, ‘마침’은 무엇인가 오묘한 일들이 신기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연히’를 우리는 ‘섭리’라고 합니다. 그것은 은혜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운이 좋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떤 평범한 여자가 길거리 캐스팅이 되고 졸지에 스타가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세상에서도 가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에서 은혜라는 단어는 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연관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 후에 축복이 될지 아무도 보장해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박에서 쪽박이 된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단순히 운이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에 인생을 맡기는 것은 도박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다릅니다. 은혜 안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철저한 의도와 정확하고 완벽한 개입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순간의 결정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룻기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룻에게 ‘여호와의 날개 아래의 보호’는 보아스였습니다. 은혜는 축복된 만남으로 찾아옵니다. 우리 삶 가운데에도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침’으로 역사하시어 당신의 뜻하심을 이루어가십니다. 룻이 우연히 친족 보아스의 밭에 가서 이삭을 줍고 있을 때 마침 보아스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룻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보아스는 이방여인이요 남의 아내였던 룻을 자기의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 룻은 밭에서 이삭을 줍는 비천한 여종의 신분입니다. 젊은 나이에 쓴 인생의 고통을 지나온 그 얼굴에서 광채는 없었을 것이고, 무엇인가를 뒤집어쓰고는 땡볕 아래에서 허리가 휘도록 이삭을 줍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무슨 매력적인 것이 드러났겠습니까? 그러나 보아스는 룻에게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에 눈이 부셨습니다. 가슴이 뛰었습니다. 못생겨도 괜찮습니다. 은혜만 임하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인생이 뭐예요. 여러분, 나이 40이면 인물의 평준화가 이루어져요, 50이면 학벌의 평준화, 60이면 건강의 평준화가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세월따라 평준화가 되는데 여기에 무슨 희망을 걸겠습니까? 이 덧없는 인생, 너무 미련두지 말고,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좀 감격 있는 삶!! 살아야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야 아름다와지고 은혜를 입어야 소망이 넘칩니다.
여기 보세요. 룻은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 아래 머무니까 그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룻에게 상상치도 못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룻은 그 땅의 부호요, 기업을 무를 자인 보아스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을 낳습니다.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룻 4:17)」 어찌 이런 놀라운 일이 있을까요. 이방 여인 룻이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됩니다. 몰락한 가정이 최악의 밑바닥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최정상의 자리로 치솟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가 보여주는 명 드라마요, 대역전극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 1:5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보아스의 어머니가 바로 기생 라합입니다. 라합도 기구한 인생의 아픔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역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이방 여인 룻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가슴 뭉클합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린 연약한 과부에게 거대한 구원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고통 속에 살다가 끝날 운명에서 ‘은혜’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룻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구원사의 스타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시 예수를 믿고 우리는 그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보더래도 자격이 없다고 보는데 하나님은 자격 있다고 하시고, 내 자신을 감히 이 주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삼지 않으신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함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먼저 자기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했던 자는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핍박자도 있을 것이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살았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런 죄 저런 죄를 범해서 그 때를 돌이켜 보면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를 간직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돌보시고 인도하셔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 이상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 나 이하의 삶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합리주의, 소위 말하는 과학적인 사고에 깊이 젖어 있습니다. 일이 잘 된 것은 자기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고입니다. 이것은 공로주의입니다. 스톰스 박사는 은혜에 대해서 말하기를 "은혜가 무엇인가? 당신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당신의 무공로로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독수리와 참새가 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아십니까? 참새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날기 때문에 계속해서 날개를 흔들어야 합니다. 반면 독수리는 바람의 기류를 타며 납니다. 그래서 처음 얼마동안만 힘을 쓴후에, 날개를 펴고 기류에 몸을 맡기며 우아하게 비행합니다. 참새는 날개 치며 공중에 떠 있는 모습 조차 안쓰럽게 보입니다. 하지만 독수리가 활공하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낼만큼 아름답습니다. 나방과 나비의 차이를 아십니까? 나비는 태양으로부터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습니다. 반면에 나방은 자기 힘으로 에너지를 얻습니다. 나비는 아침이 되면 가만히 앉아서 젖은 날개를 말리며 햇볕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면 힘을 얻어 우아한 자태로 하늘을 날아오릅니다. 하지만 나방은 오직 자기 힘으로 날기에, 날기 한참 전부터 힘을 다해 파닥거리며 에너지를 충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힘겪고 안쓰럽습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은 참새입니까? 아니면 독수리입니까? 나방입니까? 아니면 나비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을 알지만 그분의 무한한 자원과 힘을 공급받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는 것 자체가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혼자 힘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해결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만날 때,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쉽게 절망합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들은 항상 여유가 있습니다.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남들이 모르는 평안함과 넉넉함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나방처럼 참새처럼 홀로 몸부림치겠습니까?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비록 받을만한 자격이 없고, 아무런 조건이 없을찌라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어주시는 그 은혜의 날개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지금도 이 절망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낯설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곳 저곳에서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막막함은 최근 모 신문사에서 다룬 “한국인의 마지막 10년”이라는 특집 기사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수명이 길어진 우리 시대 사람들의 현실을 조명해놓은 기사인데, 몇 번에 걸친 특집 기사 제목이 이런 식이었습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극단적 선택… 70대 이상 자살률 10년 전의 2배.” “준비없이 길어진 삶, 망가진 가족관계… 못살았을 때보다 더 불행해진 우리 노년(老年).” 이것이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이 시대의 현실이라니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다들 잘 살아보겠다고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힘에 겹도록 수고하고 있는데,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 이처럼 눈물겹게 노력하고 있는데, 현실은 왜 이런 혼미함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어버렸습니까?
우리 삶은 우리가 예상한 대로 정확하고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일들이 불규칙적으로 다가옵니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겼던 일을 경험하며 인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희비가 교차하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우리의 계획을 변경시키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숱한 사연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왜 이렇게 인생이 힘든가가 아니라, 내 삶이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 겉돌고 있는가입니다.
1704년 독일의 베냐민 슈몰크 목사님 내외분이 심방을 갔다 집에 와 보니 집이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어린 형제가 집에 있었는데 불러 보았지만 대답이 없습니다. 혹시 하고 잿더미를 들추어보니 어린 두 형제가 부둥켜안은 채 죽어 있었습니다. 그 두 어린 아들의 시신을 앞에 놓고 망연자실 했습니다. 그때 별생각이 스쳐갔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순간 분노와 서운함과 의문이 몰려 왔습니다. 인간적인 오기도 서려왔습니다. 그런 생각에 휩싸여지자 온 몸에 소름이 끼쳐 왔습니다. 그 순간 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여기에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에 평온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영감이 넘쳐 나왔습니다. 그때 주어지는 감동의 영감을 글로 적어 놓았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온 영혼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사 뜻대로 하소서“ 여기에 홀부르크라는 분이 곡을 붙였는데 그 것이 오늘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549장 찬송입니다. 행복이나 기쁨이나 감사함의 삶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환경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왜 이렇게 인생이 힘든가가 아니라, 내 삶이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 겉돌고 있는가 입니다. 우리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흘러간다면 history(히스토리, 역사)이지만, 하나님과 관련되어지면 his story(히즈 스토리, 그의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이끄셔서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어렵고 힘든 순간이 와도 너무 빨리 끝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인생의 결론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끝은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삶은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함께 하실 것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선택한다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반전을 일으키실 줄 믿습니다.
은혜보다 더 강력하고 완벽한 삶의 보장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 역전극의 위대한 스토리에서 얼마든지 우리도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우여곡절과 수없는 의문의 일들이 있지만, 우리가 은혜를 입은 사람이 되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일을 제쳐 두고 우리를 돕는 신기한 일들이 많아집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특별대우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지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증거입니다.
은혜는 시련 속에서도 찾아옵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 고난받고 이용당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고 함정으로 몰아넣어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니 가는 곳마다 복을 누리게 됩니다. 심지어 감옥에 가서도 사랑을 받고 형통하게 됩니다. 바로앞에 서도 한눈에 인정받고 신뢰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위기에 내 몰려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헤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기대하면 은혜의 꽃은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과거에 여러분이 얼마나 많이 실패했는냐? 얼마나 심하게 불행한 삶을 살았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준비하고 초청하십니다. 마음에 있는 불행의 장벽을 무너뜨리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눈을 크게 떠서 하나님이 이제부터 안겨주실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은혜가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 줄 것을 의심없이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은혜입기를 소망하며 기도하십시오. 전화위복의 하나님, 꼬인 것을 푸시는 하나님을 믿고, 일상에서 작은 믿음의 선택 속에 그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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