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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그 후의 은혜 룻1:20-22. 2015년 3월8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3-08 | 조회: 1547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미국이 모든 사람에게 성공의 기회를 준다는 이 말은 기회 균등이 보장된 미국 사회에서 능력을 발휘해 돈과 명예를 얻어 보겠다는 의미입니다. 한국인에게 이 말은 단순히 문자적 의미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간 학생 수가 82만여 명인데, 한때는 한국이 제일 많다가 이젠 중국, 인도 다음으로 9만여 명이 한국 유학생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는 영주권자와 시민권자를 뺀 수치이므로 이들을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나게 됩니다.

이 수치 하나만으로도 미국이 한국 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토플 접수 대란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비자 발급을 위해 늘어선 줄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렇다 보니 미국 대사관 직원들은 고압적이며 사무적으로 사람을 대할 뿐 아니라 불친절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그 앞에서 고분고분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OK”라는 이 한마디를 학수고대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아메리칸 드림은 실재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함에 있어서 더 좋은 환경이나 조건은 참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조건이나 기준으로 삼으면 엉뚱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멕렉은 환경적인 조건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가 살고 있던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듭니다. 그런데 그가 제일먼저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모압 땅을 선택합니다. 적어도 신앙인이었던 엘리멜렉은 그렇게 쉽게 선택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눈에 보이는 절망적인 환경과 자신의 연약함을 뛰어넘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눈에 보이는 장애물들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다보면 이 장애물을 만날 때, 얼마나 당황하고 또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한 채 무너지는 아픔을 겪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오미 가정은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갔다가 이민 생활 10년 만에 남편과 두 자식을 잃습니다. 나오미에게 있어서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은 그의 인생이 어쩌면 다시는 일어 설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상처와 완전한 상실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이 1장 곳곳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널려있습니다. 남편의 두 아들만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서 젊음과 재산, 의욕도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가슴속에 실낱같이 남아 있던 희망과 꿈까지 물거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재기를 위한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오늘의 나오미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믿고 의지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살을 시도하며 매일 40여 명의 사람이 목숨을 끊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오미는 직접 들은 것도 아닌 소문에 불과한 소리, 자신이 지난 날 살았던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그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사실 이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지 않습니까? 모압에는 남편과 두 아들의 무덤이 있고 십여 년간 흘린 그녀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출세해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많은 말을 하겠습니까! 뒤에서 쑥덕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런 일을 감수하고서라도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여기 22절을 보십시오. “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 ” 여기 ‘돌아왔다’ 나오미의 귀향! 이것은 단지 지리적 이동에 불과한 게 아닙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겁니다. 아직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지만,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이미 회복이 시작된 겁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나오미라고 부르자 어떻게 하죠? 20-21절 보세요.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의 장계로 인생이 괴롭게 됐는데 무슨 나오미냐 이겁니다. 그 이름이 무슨 뜻인가 하면 ‘희락’ ‘기쁨’ ‘즐거움’ 즉 단맛이란 뜻입니다. 그 이름 부르지 말고 대신 뭐라고 부르라고 하죠? 마라! 마라는 ‘슬픔’ ‘쓰라림’ ‘괴로움’ 즉 쓴맛이란 뜻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제 자기는 인생의 쓴맛을 본 불쌍한 여인이라는 겁니다. 나오미는 자신을 ‘나의 즐거움’이란 뜻을 가진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괴로움’이라는 뜻의 ‘마라’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형편이 여호와의 징벌로 괴롭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이 고백 안에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 번에 걸쳐 반복되는 ‘전능자’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전능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이 고백 앞에 나오미가 그의 시선을 하나님께 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 원어로 직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나를 비통하게 만들었다’입니다. 이 말씀은 얼핏 보기에는 ‘하나님이 나를 치셨다’ ‘하나님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이 한 동안 몰랐는데 고난 앞에 원망과 불평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지금의 상황 앞에 자신의 인내치 못하고 순종치 못함을 통해 이 어려움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난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전능자’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엘샤다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최악의 상태에서 최상의 상태로 바꾸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지금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첫 고백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 ‘샤다이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나오미의 입술에서 ‘샤다이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의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살았던 고향으로 돌아 오는 결단을 택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고 비로서 자신을 돌아본 것입니다. 보다 나은 인생으로 살기 위해 나선 길이지만, 결국 모든 것을 다 잃은 자신의 모습 속에서 그는 결심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만이 자신에게 유일한 살길임을 깨닫습니다. 여기 나오미는 소문에 불과한 그 소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양 속담에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맡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한계상황에서 전능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내 인생의 한계 상황에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입니다. 내가 낙심하고 절망할 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엘 샤다이 하나님이십니다. 기다리다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만나 주시는 하나님이 엘 샤다이 하나님이십니다. 내 꿈이 깨어져 갈 때에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 엘 샤다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끝은 언제나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인간의 위기는 언제나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인간의 막다른 골목은 하나님의 새로운 길이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 1:7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결코 두려움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선물로 주신 것에 감사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하고, 감사하고, 기뻐해야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적극적으로 살아야합니다.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비록 실직을 했어도 생명이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업에 실패했어도 건강하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건강을 잃었더라도 나을 수 있음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진급이 되지 않았더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음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진학에 실패했더라도 아직 젊음이 있기에 다시 도전할 수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큰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 9:4)고 하였습니다. 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경멸을 받는 동물입니다. 그에 비하면 사자는 가장 힘이 세고 위엄이 있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비록 온갖 경멸을 받는다 할지라도 살아있는 것이, 존경을 받으며 죽은 것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있음으로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실패하고 경멸과 모멸을 받더라도 만회할 수 있는 역전의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2. 모든 것을 상실했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그 후의 은혜’를 예비해 놓고 허락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오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을 붙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가장 적절한 때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축복의 장소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베들레헴은 더 이상 흉년의 땅이 아닙니다. 22절에 “보리추수 시작을 할 때”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새로운 회복의 물결이 그들의 삶을 덮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삽니다. 어거스틴은 ‘내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전에는 진정한 평안함이 없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묻습니다. 여러분 성경책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니까? 오늘 왜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왜 그토록 신앙생활을 오래하고도 우리 마음에 변화가 없습니까? 그 이유는 성경을 수없이 읽으면서도 이 애타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우리가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음성을 듣는 자는 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음성을 들으십시오. 나오미의 가정을 다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이 오늘 당신을 찾으십니다. 당신의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일상적인 사건과 고통의 순간 속에서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의 추적을 받고 濂 돌아온 사람들의 예를 우리는 교회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감리교를 창시한 웨슬레는 평범한 교인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배를 타게 되었어요. 그 배가 풍랑을 만납니다. 도저히 살 가망이 없을 정도의 큰 풍랑이었어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죽으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저쪽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모여서 너무나 평안하게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 비로소 웨슬레는 자신이 그저 교회를 형식적으로 다니는 교인이었음과 구원의 확신이 없는,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돌아가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가 요한 웨슬레가 되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방황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신앙의 의미를 붙잡지 못하고 명문 브라운 대학에 다니면서 무신론자 친구의 영향으로 이신론자(사실상 무신론자)가 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4년 과정 대학을 3년에 졸업하고 졸업 여행을 떠났다가 시골 여인숙에서 옆방에서 밤새도록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듣고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이튿날 그 옆방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바로 대학 시절 자기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든 바로 자기 친구였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고 인생의 실존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다가 어린 시절에 찬양하던 예수님 앞에 돌아오기로 결심합니다. 회심한 것입니다. 그는 미안마에 최초로 선교를 떠난 아도리람 저드슨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르틴 루터, 기독교 역사를 바꾼 그는 평범한 교인이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어느 날 친구와 들판에 놀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더니 벼락이 쳐서 옆에 있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어요. 너무나 놀란 마르틴 루터는 그 자리, 나무 밑에서 부들부들 떨며 주저앉았습니다. 처음에는 겁이 났습니다만, 그 순간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날 이후 마르틴 루터는 변화되고,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루터에게만 말씀하셨나요? 웨슬레에게만 말씀하셨나요? 아도리람 저드슨에게만 말씀하셨나요? 아담에게만, 사울에게만, 나오미에게만 하나님이 말씀하셨나요?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얘기하십니다. 내가 지금도 너를 부르고 있노라! 질병을 통해, 자식의 아픔을 통해, 사고를 통해, 친척간의 괴로움을 통해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분은 결코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실 겁니다. 끝까지 여러분을 온전한 자리에 앉히기 위해 노력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그 부르심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불행했던 나오미의 삶이 메시야의 가문을 이루는 것처럼 오늘 당신의 가정을 바꾸고, 당신의 인생을 바꾸고, 당신이 속한 이 사회를 한번 바꾸어 보지 않겠습니까? 여기 “보리추수 시작을 할 때”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이제 나오미의 삶의 답답함과 쓴물의 인생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품에 안겼을 때, 새로운 기쁨이 이러나는 또 하나의 시작입니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삶의 정황이 좋아진 다음에 하는 감사가 아니고 고통 한가운데 서서 고통을 바라보면서 다시 고통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시 그 후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정태기 목사님이 쓴 칼럼집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책을 보면 정 목사님의 귀한 경험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때 정 목사님이 신앙의 위기를 만난 적이 있어요. 도대체 기도가 목구멍으로 나오지 않았고,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모든 것이 짜증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기도원으로,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 목사님은 가방을 하나 들고 소록도로 향했습니다. 도착하던 날이 수요일이었는데 마침 낮 기도 모임이 있어서 거기에 참여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통성 기도가 시작되었는데,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기도가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그를 파고드는 기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머리를 치고 가슴을 후벼파는 소리였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주신 은혜가 어찌 이리 큽니까? 주님, 어찌하면 제가 주의 은혜를 갈을 수 있겠는지요?" 기도 소리는 계속되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이 큰 은혜에 제가 어찌하면 만 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나이까?" 정 목사님은 궁금했습니다. '도대체가 무슨 은혜를 그렇게 많이 받았기에 저런 기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뒤를 돌아보았더니, 거기에는 60세가 넘은 흉측한 환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나병에 시달리다가 나았지만, 그 나병이 얼마나 심했던지 얼굴의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머리카락이 한 올도 남지 않은 머리, 떨어져 나가서 움푹 패인 코, 짓무르다 못해 위아래가 붙어버린 눈은 더 이상 사람 같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손목만 남은 손으로 박수까지 치며서 목이 터져라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때 정 목사님의 가슴속에서 피처럼 붉은 통곡이 터져 나왔습니다. 오랜 시간을 뜨겁게 기도한 후에 목사님은 그 노인과 함께 나무 그늘에 앉았어요.

거기서 목사님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뭐가 그렇게 고마우세요? 무슨 은혜가 그렇게 큰거에요?" 노인이 한참 먼 산을 바라보다가 말했습니다. "내가 문둥병에 걸리자 세상도, 피붙이도 나를 버렸어. 물론 친구들도 떠나버렸고, 그런데 말이야 이 소록도까지 나를 따라 온 분이 계셨어. 그리고 내게 소망과 기쁨을 주셨지." "야~! 할머니가 따라오셨군요?"하고 묻자, 그 노인이 말했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예수님이 따라오신 거야." 목사님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어요. 그리고 일주일 동안 그 노인과 같이 지내면서 엄청난 변화를 받았고, 마음 속에는 까닭을 알 수 없는 기쁨이 출렁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부두에 나올 때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정 목사님은 평안과 기쁨이 넘쳐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정 목사님은 한 번도 영적인 탈진 증세를 앓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목사님이 만난 그 한센병환자는 그 혹독한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기쁨이 충만했고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은혜가 내 심령에 임하면 나는 더 이상 옛것에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생애를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내 마음의 이런 상처, 저런 아픔, 고통으로 겹겹이 쌓여 열등감 많은 내 생애를 모든 사람 앞에 온 세상 앞에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쳐대는 당당한 인생으로 우리의 생애를 바꾸십니다. 그래서 인생의 남은 시간을 가장 값지게 만드시는 손에 이끌려 살아가는 승리자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후의 은혜 -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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