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조국을 사랑합니다. 롬9:1-3. 2015년 3월1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3-01 |
조회: 1388
오늘은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96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입니다. 3.1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한 민족의 지도자 33인 중에 기독교인 수가 16명 정도였고 이 중에는 유명한 목사님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기독교인이 그리 많지 않은 점에서 보면 상당히 높은 숫자입니다. 우리 한국의 인구는 1천 6백만 명 정도였고, 이 중 기독교인들은 불과 20만 명 정도로 한국인구의 약 1.3 내지 1.5% 정도에 해당하는 숫자였습니다. 그런데 민족지도자들 중에 기독교인이 많이 들어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3-5월까지 두 달간 전국적인 독립운동의 물결이 메아리칩니다. 이에 당황한 일본 군대와 경찰은 무자비하게 폭력을 동원하여 진압했습니다. 그 결과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체포자 46,948명이었습니다. 부서지고, 불에 탄 주택이 715호, 학교가 2곳이었습니다. 그리고 47개의 교회가 불에 탔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독립만세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삼일독립운동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철저하게 비폭력, 무저항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건 구국운동이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3·1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얼마나 교회를 탄압했는지 모릅니다. 특히 1919년 4월에 경기도 화성에 있는 제암리 교회에 성도 23명을 교회 안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뛰어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23명이 순교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을 가옥 30여 채를 불살랐습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사람의 살이 타는 냄새가 10Km 밖에까지 진동했다고 합니다. 이런 가혹한 핍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초기 기독교는 소수였지만 이 민족을 이끌었습니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 절망 가운데 지쳐있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불어 넣었습니다.
보세요. 일제 강점기 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민족의 고난을 대신 지고 국민을 계몽시키는 교육을 일선에서 감당하였습니다. 50년 이상 된 근대화된 학교시설은 대부분 기독교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이화여대, 연세대, 고려대 등 유명 사학들이 신앙인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신식병원은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세브란스 병원, 동산병원, 예수병원 등 병원을 세워 백성을 살렸습니다. 민영익을 살려낸 것도 궁중에 들어간 알렌 선교사였습니다. 독립투사 중 절반 정도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도 안중근도 기독교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로였고 김구 선생님도 기독교인이었고 건국 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여운영 선생님도 신학을 공부한 전도사였고, 건국 준비위원회 지방 위원들은 대부분 목사나 장로가 할 정도였습니다.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 개회될 때 임시의장 이승만은 단상에 올라가 사회봉을 잡고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말로 개회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일동 기립한 가운데 이윤영 의원(목사)가 기도하고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96년이 지났는데 지금 우리 신앙인은 나라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까? 3.1절을 맞이하여 우리 신앙인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대한민국에 건전한 영향력을 미치는 국민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1. 나의 조국을 사랑하는 자는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독립선언서 공약 제 3장의 두 번째 나오는 내용에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 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사명의식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 케네디가 저격당하기 전날 밤에 만찬회에서 행한 인상 깊은 연설이 있습니다. 케네디는 그 연설에서 우리 모두가 개척자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역사의 법정 앞에 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자리에서 네 가지의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첫째, 당신은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었습니까? 둘째, 당신은 현명한 판단을 했습니까? 셋째, 당신은 당신의 맡은 일에 성실을 다했습니까? 넷째, 당신은 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을 하였습니까?”
그는 이 연설에서 사람들에게 참으로 용기 있게 살았는지, 아니면 타협하면서 비겁하게 살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현명하지 못한 판단으로 인하여 후회스러운 일은 없었는지, 내가 맡은 일에 성실을 다했는지, 그리고 그 일에 전적인 희생과 헌신을 했는지를 물어보라고 요청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이 연설에서 우리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이끌어 가는 사명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가 처한 상황에서 용기있게, 지혜롭게, 성실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헌신을 하며 섬기는 사명자들을 사용해서 역사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힘들고 어렵다 하여 불평하고, 피하거나, 때로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쓰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에 보시면 바울에게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큰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1절에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그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큰 근심이 되었고, 그 근심이 지나쳐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육체가 아픈 것을 고통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아픈 것을 슬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아픔이 지나쳐서 그것이 바울에게는 육체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자기 동족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하는 걱정 때문에 큰 근심이 되었고, 이 근심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나중에는 큰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큼 고통했느냐 하는 것은 3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는 말씀에서 저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인데,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명령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물론, 그 성에 있는 물건 하나까지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불태워서 없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데마’가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리 없지만, 끊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형제, 나의 친척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열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사명의식이 없다면 가질 수 없는 고백입니다.
2. 조국을 사랑하는 자는 그 누구보다 책임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그들에게 한 때 도움이라도 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이들은 바울에게 어떤 관계입니까? 바울이 피를 토하듯 끌어안고 기도하며 사랑했던 그들은 다름 아닌 바울을 배척했던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같이 바울은 일생동안 자기 동족으로부터 쉬지 않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바울은 평생동안 괴롭히고 해를 끼친 사람은 이방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 사람도, 태장을 때린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재판에 붙인 사람도 동족이요, 감옥에 가두어 놓은 것도 동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벌인 자도 동족이요, 사사건건 미움과 박해를 가한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어찌 이런 자들을 사랑할 수 있으며 기도할 수 있으며 자기의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생명을 바칠만큼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갈며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미워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핍박할수록, 견딜 수 없는 자리까지 고난에 빠뜨려도 오히려 바울은 자기 동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더욱더 간청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자리에 서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임감있는 삶은 그로하여금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워해 달라고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그는 안타가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습니다. 10: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동족을 보면서 바울은 끊임없이 고통하고 괴로워했습니다. 바울의 고통에는 자기 민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원통해서 답답해하는 마음, 무엇이나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이처럼 자신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준 자신의 동족을 위해 이 몸부림치는 기도는 다른 데 있었던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인생인데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도까지 되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기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보았습니다. 견딜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이 얼마나 큰가를 보았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신을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였던 자기를 그 완악함과 그 더러움을 다 받으시고 십자가의 용서의 진액으로 사랑의 보혈로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가슴을 안고 자기를 핍박하는 동족을 향해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바울도 섬김과 희생과 봉사로 그들을 복음으로 끌어안습니다.
사실 독립 선언문을 만들고 3.1운동을 주도했던 분을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하지 않고 남강 이승훈 선생님을 이야기합니다. 이승훈 선생의 전기를 쓴 오병학씨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3.1 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남강 이승훈이라는 한 사람의 진두 지휘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기미년 독립 만세운동은 거의 남강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부언했습니다. ‘3.1 운동이 남강의 작품이었다면 그의 일생은 곧 하나님의 작품이었으리라.’ 정확한 진술입니다.
그는 수 차례 일경에 의해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다 당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면 언제나 단정히 무릎을 꿇고 이렇게 통성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오 은혜로우신 하나님!, 당신은 항상 이런 어려운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고 더욱 크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연단해 주시는 분이심을 압니다. 오 하나님!, 이 고난과 시험을 잘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로 저를 지켜주셔서 제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 해 주시고 담대함과 강건함을 주소서.? 그는 옥중에서 구약성경을 20번 신약성경을 40번이나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민족과 백성 앞에 당당히 나아갈 때 이민족은 나라를 빼앗긴 아픔 속에서도 3.1운동을 일으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그런 고통을 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에게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정치는 사색당파가 서로 물고 뜯으면서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에 힘이 없는 우리는 일본의 침략을 막아 낼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나라에 정치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네가 하니까 나는 반대야!”라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국민이 뭉치고 정당이 협력해서 나라를 강하게 세우려고 함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다른 나라가 보면 “대한민국은 대단한 나라”라고 할 것입니다.
둘째, 적이 우리보다 강했기 때문입니다. 강한 자가 침략을 합니다. 독립선언서에 우리 조상들은 “우리는 일본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길 정도로 허약한 나라를 만들어서 온 민족을 고생하게 했으니 스스로 채찍질해야 합니다. 3.1절을 맞이한 지금도 우리의 지도자들과 국민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태도를 바꿔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와 후손들이 이 땅에서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살면서 외세에 무릎을 꿇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자유와 진리와 사랑 속에서 힘차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권을 빼앗긴 결과는 죽도록 고생하는 것입니다. 독립선언문에도 “생존권을 빼앗겼다”, “정신상의 발전의 장애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자유가 없으면 창의력이 말살됩니다. 노예근성이 생기고 정신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의 동족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자신이 받은 구원의 감격을 보답하는 책임이라는 것을 알고 고통, 저주, 이런 단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3. 그렇다면 3.1정신을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계승을 해야 합니까?(10:1)
이 땅에 구원의 열매가 일어나도록 우리 가슴마다 복음의 깃발을 꺼내 들어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나라를 위해서 기도할 때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남 왕국 유다는 의인 한 명이 없어서 결국 바벨론 70년간의 포로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 찾고 계신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애통한 마음을 가지고 이 조국 대한민국의 아픔을 끌어안고 기도해야 합니다. 눈물의 기도가 있는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묻습니다. 이렇게 조직화 되고 어떤 틀이 있는 이 사회에 내가 무슨 힘이 있냐고 질문을 합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라는 말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본래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가 연구 발표한 이론인데, 그가 발표한 논문 제목만 봐도 어떤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 주에 발생한 토네이도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 입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멀리 떨어진 곳에 영향을 끼쳐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여기 바울 한 사람이 온 땅에 복음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 설교인 "일사각오"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로 제단이 더렵혀져 가는 모습을 보고 울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에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 세대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구나."고 외쳤습니다. 애통하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애통할 줄 아는 백성이 있는 나라는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셨던 눈물이 바로 이런 눈물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통계상 어마어마한 성장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세계 1위라는 것들이 이젠 낯설지 않습니다. 세계 조선 산업 1위입니다. 세계 철광 제조산업 1위입니다. 반도체 생산률 1위입니다. 컴퓨터 보급률 1위입니다. 초고속 통신망 보급률, OECD국가중 초고속무선인터넷 보급률100%는 대한민국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는 8년째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근로시간, 흡연율, 음주율, 낙태율, 성형율, 이혼율, 교통사고 사망률, 사교육비, 청소년불행지수 세계 1위입니다. 가정이 중독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국민 8명 중 1명이 알코올이나 인터넷, 도박, 마약에 중독돼 사회경제적 비용만 연간 109조 5,000억 원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2011년 현재 알코올 중독자는 155만 명, 인터넷 중독자는 233만 명, 도박 중독자는 220만 명, 마약 중독자는 10만 명으로, 우리나라 인구 약 5,000만 명 중 618만 명이 4대 중독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인명을 경시합니다. 범죄 시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도 8시간 10분마다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점점 사람 생명의 존귀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명경시 풍조는 자연스럽게 황금만능주의, 쾌락 지상주의로 연결이 됩니다. 일 년 술값으로 14조, 성매매로 24조가 소비된다고 합니다. 성매매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수는 33만 명으로 이는 20, 30대 여성 취업 인구의 8%나 된다고 합니다. 쾌락이면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을 찾아가는 불나비처럼 쾌락의 불더미로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나의 조국을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아직도 일본은 잊을 만하면 망언을 해서 우리의 상처를 건드리곤 합니다.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위안부 등으로 끌고 간 100만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에게 개별적으로 피해 보상을 해주기는커녕 사과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몇해전에 미 의회가 위안부 문제를 일본의 분명한 잘못임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법적 책임이 없다고 큰 소리를 치지 않습니까?
심지어 ‘역사를 왜곡해서 만든 교과서를 버젓이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니 정말 가슴이 미어지듯 통분하는 심정입니다. 거기에는 위안부 문제 같은 것은 아예 빼버렸고 대신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젠 아예 극우 보수 진영들이 나서서 다케시마 행사를 독려하는 후안무치한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이런 모습 앞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이 민족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6-25 승리나 8-15해방은 우리들이 쟁취한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때 우리민족이 얼마나 기도했습니까. 애굽에서 압제받던 이스라엘 민족의 눈물의 기도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출애굽을 시키셨듯이 우리민족의 눈물의 기도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해방도 6-25의 승리도 주셨습니다. 6-25가 발발하고 종전되는 과정에 있었던 국제적인 숨은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직간접적으로 역사하셨는지를 보고 모두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통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올해가 광복 7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입니다. 이제 더욱 더 이 나라의 통일과 통일된 이 조국이 전 세계에 복음의 빛을 발하는 그 날을 믿기 때문에 삼일 기념예배를 쉬지 않고 드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 나라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통일된 조국이 속히 되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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