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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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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살길이 있습니다. 룻1:6-18. 2015년 2월22일 룻기 강해?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2-22 | 조회: 2045
연어는 귀소 본능과 모험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물고기 입니다. 연어는 원래 민물에서 태어나 민물에서 자랍니다. 그러나 얼마쯤 자란 다음에는 반드시 바다로 내려가 삽니다. 바다에서 짜디짠 물을 먹고 그들의 뼈가 자라고 살이 올라 어른 연어가 되어, 넓고 깊은 바다를 마음껏 휘저으며 삽니다. 3~4년 동안 이렇게 살다가 산란할 때가 되어 반드시 본능적으로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연어의 <귀소본능>을 설명해주는 한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원래 나이아가라 폭포에는 연어가 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짓궂은 어류학자가 미시시피 강으로 산란하러 올라오는 연어를 잡아다가 나이아가라 폭포 위쪽에 산란하도록 했답니다. 그렇게 해서 연어 치어가 태어났고, 그 치어들은 그곳에서 얼마쯤 자라다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따라 내려가서 넓은 대서양으로 가서 자랐습니다. 어류학자의 관심은 대서양으로 간 그 연어 치어들이 과연 나이아가라 폭포 위쪽으로 올라오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연어의 <귀소본능>이 얼마 만큼인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몇 년 후 그 연어들은 산란의 때가 되자 어김없이 나이아가라 폭포 밑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나이아가라 폭포 위로 점프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세차다고 불리 우는 폭포의 쏟아지는 물에 도전했던 것입니다. 연어들은 점프에 실패해 주둥이가 깨지고, 아가미가 터지고, 지느러미가 찢어져 피가 철철 났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피로 물든 몸으로 계속해서 도전하여 마침내 연어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어류학자가 설치해 놓은 그물에 걸리면서, 연어의 엄청난 <귀소본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고향은 어디십니까? 지난 한 주간 몹시 바쁘셨지요? 금년에도 어김없이 고향 냄새를 따라 고향 길을 가는 ‘연어인생’들로 이 땅의 길들이 북새통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설 명절에 고향으로 또는 가족이 모처럼 나들이로 분주하셨을 것입니다. 항상 그렇듯이 귀성길은 고생길이 아닙니까? 그 고생이 하도 심해서 귀성전쟁이란 표현까지 씁니다. 그래도 고향 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한결같이 환합니다. 그만큼 고향은 좋은 것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하지만 명절이 되도 고향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향민입니다. 남북이 분단된 우리나라의 경우 얼마나 많은 실향민들이 있습니까? 그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명절 때가 되면 그 고통이 심해져 임진각에 가서라도, 아픈 마음을 달래야 되는 분들도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고향 길을 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가정은 고향으로 가긴 가지만, 모든 것을 다 잃고 비틀 거리며 힘든 걸음으로 겨우 고향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가정은 인생의 흉년을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등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이 가정의 남편은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고도 안타까운 것은 엘리멜렉이란 이름의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 아버지가 신앙적 소원을 담아 그렇게 지어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과 정반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게 아니라, 자기가 왕 노릇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흉년이 왔는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고향인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갑니다. 이건 단순히 지리적 이동이 아닙니다. 모압은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우상숭배 국가입니다. 단지 육신적으로 살기 편하다고 찾아간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난 영적인 행위였습니다. 결국 고향을 떠나 타양살이 10년 만에 이 가정은 풍지박살이 나버렸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살길을 찾으러 떠난 모압에서 죽고 맙니다.

흉년을 피해 살길을 찾아 떠났던 이 길이 이처럼 비참해 지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누가 그 길을 선뜻 나서겠습니까? 남편이 죽고 이어서 두 아들마져 이방 땅에다 묻고 마는 이 가정은 분명 실패한 가정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흉년이 들었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자연 재해라 여기고 지나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 8km 지점 위치하고 있는 평원입니다. 그 이름이 뜻은 ‘떡집’입니다. 그 이름이 암시하는 베들레헴은 풍요로운 곳입니다. 웬만한 가뭄쯤은 끄떡없어 농사가 잘 돼서 잘 먹고 사는 그런 곳에 흉년이라니! 이건 정말 이상한 겁니다. 예삿일이 아닙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내리신 징계였다는 겁니다.


여기 1절에 보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란 말이 있습니다. 사사시대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살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삿21:25절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다는 겁니다.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기 욕심대로! 사는 인생들입니다. 고향을 등졌던 이 가정은 결국 자기들 마음대로 고향을 떠났다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그런데 잿더미 위에 앉은 이 나오미는 한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이 버렸던,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떠났던 고향에서 한 희망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바로 흉년이 멈추고 살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 소식을 들은 그들은 실패의 자리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버렸던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자리는 어떠합니까? 만약 여러분 가운데 인생의 흉년을 맞았다면 그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1. 살기 위해서는 떠나야 됩니다.
여기 6절을 보세요.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무슨 말입니까? 모든 것을 잃고 난 나오미는 결심을 합니다. 자신이 등졌던 고향을 향해 가기로 다짐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 ‘그 소식을 듣고’ - 무슨 소식입니까?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말입니다. 6절 말씀에 보면 세 가지 중요한 동사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듣다”라는 단어입니다. 어떤 소식을 들었습니까? “그 여인이 모압지방에서” 즉 버려진 그 땅에서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단순히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우리 백성을 찾아오셨다! 여호와께서 다시 우리 백성을 품에 안으시고 돌보신단다!

둘째 “일어나다”라는 단어입니다. 물론 이 말은 어떤 행동을 시작하는 관용적 표현이지만 이 여인들이 슬픔과 고통의 자리를 툴툴털고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누워서 못 일어나면 그건 죽는 일입니다. 일어나면 삽니다. 기독교는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를 사자성어로 고쳐보라고 했더니 젊은이들이 “기립발광”이라고 했답니다.

셋째 “돌아가다” - “슈브”라는 단어입니다. 6절 이하 1장 전체에서 이 “슈브”라는 단어가 무려 12번이나 나옵니다. 1장 전체에서 너는 모압으로 돌아가겠느냐.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제 7절을 보면 “있던 곳에서 나오고” “있던 곳!” 미운정 고운정이 배어 있는 곳입니다. 남편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아프고 쓰라린 추억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특별히 함께 따라 나서는 두 자부는 바로 그곳에서 태어나 청년시절을 보내 온갖 정이 묻어 있는 곳입니다. 부모 형제 친구 일가친척이 살고 있는 고국 - 어머니의 땅입니다. 길거리 나무 한 그루 돌맹이 하나까지 정들지 않은 것이 없는 땅입니다. 이 모든 마음을 담아 저자는 “있던 곳에서 나왔다”는 한 마디 말로 표현합니다. 엄청난 결단과 각오입니다.

제가 언젠가도 말씀했습니다. “인생은 해석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주요한 것은 들려진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입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그치고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인간적으로 듣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신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는 힘,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부분에서 실패한 대표적인 인물은 삼손이 아닙니까? 삿16:20절에 보면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삼손은 이미 하나님이 떠나셨는데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복을 복으로 여기며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여기선 룻이 있던 곳을 떠났다는 이 말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신앙적 결단에 비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프랑스가 낳은 유명한 세계적인 작가 빅토르위고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1841년까지 너무나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작품도 그의 모든 활동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모든 권력자들과 함께 그는 능력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떠난 자기 자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주변에 가정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왔지만 그는 그걸 몰랐습니다. 드디어 사랑하는 딸 레오가 강에 목숨을 던 져서 자살해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이 레오의 유서에 놀라운 것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품안으로 속히 돌아오십시오 언제까지 그렇게 사시겠습니까’ 하는 것이 나와 있었습니다. 자기의 방탕이 아버지 없는 삶이 많은 자녀에게 고통을 주고 주변에 고통을 주는 것을 이 빅토르위고는 몰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파리의 생활을 다 정리하고 시골로 갔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작품도 버리고 인기도 버리고 명예도 버렸습니다. 권력 도 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찾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 순간 그는 내 자신이 살게 되고 내 영혼이 살게 되고 그리고 새로운 길을 또 열어주셨습니다. 그는 회개한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또 새로운 작품을 썼는데 그 작품이 ‘레미제라블’ ‘노틀담의 곱추’ ‘지불라’ ‘노틀담 파리’ ‘빛과 그림자’ 얼마 나 좋은 작품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세계적인 작품이 나왔습니다. 여기에는 딸과 관계가 되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의 과거의 삶을 비추어 주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는 위대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전 국민의 존경과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귀중한 말을 한마디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순간 그 사랑의 품에 안긴 순간 내 인생의 저주는 사라졌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여기 또 하나의 결단을 하는 룻을 보시시오.
14절 말씀을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가 자기의 자부들에게 자신들의 갈 길을 가라고 권고할 때에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붙좇았더라’는 말씀을 히브리어로 ‘다브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굳게 결합하다. 붙들고 늘어지다.” 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야곱을 아시나요? 그는 성공이라면 남의 발을 잡아땡겨서라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요, 남을 짓밟고서라도 성취감을 가지는 정말 이기적인 인생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인생철학이요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오던 그 날 밤 얍복강 나루터에서 그가 환도 뼈가 부러질 때 자기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노력하고 애써서 얻은 성공도 어느 한계에 부딪히면 사라지고 결국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 흙으로 돌아갈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환도 뼈가 부러진 야곱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진정한 자기 실체와 자아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메달리는 것입니다. 창32:26절에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지금 야곱은 이 나루터에서 발버둥과 매달림의 차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진정 누구를 위해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될지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신앙은 발버둥이 아닙니다. 신앙은 매달림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진정 누구를 위해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될지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신앙’의 시작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전부라는 것을 깨닫고 그분 앞에 바짝 매달려서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 룻이 붙좆은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룻이 도저히 나오미를 따라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오미도 룻이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네 동서도 돌아갔으니 너도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16-17절에 보면 뭐라고 나옵니까?「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 보면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룻이 그동안 나오미의 삶을 지켜보았습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이방 모압까지 와서 쫄땅 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오미의 믿음이 회복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비록 고난의 한 복판에 있었지만, 오히려 순결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그 믿음을 본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부들에게 이야기할 때, 여호와 혹은 전능자라는 단어를 1장 속에 무려 7번이나 사용합니다. 대화의 주어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7번이나 사용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남편이 죽을 때에도, 자신의 큰아들이 죽을 때에도, 둘째 아들이 죽을 때에도 죽음 앞에서도 철저하게 신앙 고백을 했던 그 나오미의 모습입니다. 남편을 따라 왔지만,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여기고 절망의 한 모퉁이에서 잃지 않은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희망이 없어 좌절하여 주저앉아 울고 싶을 그 순간에 절망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내 삶이 하나님께 있노라. 내 운명이 하나님께 있노라. 내 축복이 하나님께 있노라.’ 고백하며 인생의 거친 길을 걸어가는 모습 속에서 룻은 시어머니가 붙들고 있는 이 신앙, 이 믿음을 알았습니다. 지금 어머니를 따라 간다는 것은 소득없는 무모한 일인지도 압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놓치지 않는 그 하나님을 붙잡은 것입니다. 룻은 자기에게는 갖가지 축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축복을 주시는 자와 동행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분명 이 자리는 그의 삶의 실패처럼 느끼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실패처럼 여겨지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3. 어떤 환경 앞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는 다 잃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즉시 하나님께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급하면 지푸라기를 잡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잡습니다.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시편에서 다윗만큼이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하고 자주 찬양을 부른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공중에 떠있는 구름처럼 막연하게 부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건져주시고,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을요"(시50:15)

나오미를 보십시오. 아무리 앞뒤를 돌아보아도 자기 손에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으니까 그 대신에 채워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8절입니다.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노라」 ‘선대한다’는 히브리 단어 “헷세드” 그는 고난의 한 복판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비록 우리가 깨지기 쉬운 존재일찌라도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놓치지도, 결코 포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넘어지고 실수하는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를 끝까지 믿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실망 어린 나를 품에 안으시고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나의 강팍한 가슴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불꽃으로 임하셔서 내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지금 여러분을 향해 ‘너를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여겼나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는 연습이 없습니다.
오늘이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 마음대로 뜻대로 살아왔는데 변화가 없었다면 인생의 궤도를 수정해야 될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대로 살아가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가는 인생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십시오. 주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떠나 우리 마음대로 살 때에, 여기에 행복이 있다 저기에 행복이 있다고 방황하던 지나간 모습을 알고 계십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서 흘리던 눈물을 하나님은 알고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품에 안아주신다고 약속합니다. 쉴 틈 없었던 인생, 기관차처럼 달려왔던 인생, 피곤한 몸 한군데도 기댈 곳 없었던 내 인생을 주님께서 그 품에 안아주신다고 약속합니다. 젖 먹는 아이가 엄마 젖을 충분히 빤 후 품에서 느끼는 그 평안함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 은혜가 내 심령에 임하면 나는 더 이상 옛것에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생애를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내 마음의 이런 상처, 저런 아픔, 고통으로 겹겹이 쌓여 열등감 많은 내 생애를 모든 사람 앞에 온 세상 앞에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쳐대는 당당한 인생으로 우리의 생애를 바꾸십니다. 그래서 인생의 남은 시간을 가장 값지게 만드시는 손에 이끌려 살아가는 승리자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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