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흉년을 만났을 때 룻1:1-5. 2015년 2월15일 룻기 강해 ①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2-16 |
조회: 2355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강남에 살고 있는 48세의 한 가장이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동안 싸워왔던 삶의 모습들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가장은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외국계 IT기업에서 일하면서 상무의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해왔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지난 2012년 직장을 잃으면서 그의 인생은 비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실직으로 수입이 끊기자 그는 아파트를 담보로 5억을 빌렸습니다. 그 돈으로 그는 자신이 실직하지 않는 것처럼 매달 아내에게 4백만 원의 생활비를 주면서 실직한 사실을 숨겼고, 매일 근처 고시원으로 출퇴근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주식에 손을 댔지만, 2억이 넘는 돈을 날리게 되었고, 남은 돈은 1억 3천만 원 정도였습니다.
그는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 범행을 저질렀다고 경찰에 털어놨습니다만, 그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강남의 아파트는 시가가 10억이 넘고 아내의 통장에는 3억이 넘는 현금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직도 무엇인가 희망의 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나야만 했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추구한 것을 한 손에 거뭐 쥐어도 문제를 만날 때,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채 이런 엄청난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어쩌면 강남의 세 모녀 살해 사건은 그런 우리 시대의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보여주는 한 예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는 엘리멜렉 가정은 단란하고 아름다웠던 가정이었습니다.
엘리멜렉- ‘하나님은 나의 왕’이란 뜻입니다. 이름만 뵈도 믿음이 좋고 경건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아내 나오미는 ‘기쁨,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경건한 남편, 기쁘고 사랑스런 아내가 믿음의 땅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에 예기치 않은 흉년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흉년을 피해서 삶의 자리를 모압이라는 땅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모압 땅으로 옮긴 엘리멜렉의 가정은 흉년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이민 생활 10년 만에 가장과 갓 결혼한 두 아들이 죽고 세 명의 과부만이 남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지금의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떠난 이 가정은 이젠 어쩌면 회복이 불가능한 것처럼 처절하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미래가 더 나은 삶이 되기를 바라고 살지 않습니까? 그래서 노력을 하고 삽니다. 그런데 이처럼 인생의 파탄의 자리에 설 때 이 상처와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은 한 여인의 아픔을 들어보십시요!! 룻1:20절에 “나오미기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느니라” - 여기 “나를 나오미 - 즉 기쁨, 희락이라 부르지 말고, 마라 - 즉 괴로움, 슬픔이라 부르라” 이처럼 나오미는 기쁨이란 뜻입니다. 기쁨을 얻기 위해 떠난 길이 슬픔으로 변한 삶!!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묻고 싶습니다. 이 흉년이 어디에서 일어났습니까? 이 흉년은 유다 베들레헴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름 자체도 ‘떡집’, 오늘날로 말하면 ‘빵집’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에 어떻게 흉년이 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정말 이상한 일 아닙니까? 살다 보면 도저히 흉년이 일어나면 안 되는 곳에 흉년이 찾 틸윱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저렇게 예수를 잘 믿는 가정에 저런 아픔이 찾아올 수 있을까?’, ‘예수를 잘 믿는 저 사람에게 어떻게 저런 인생의 흉년이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하는 의구심으로 가득한 것이 인생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인생의 흉년이 몰아닥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고난이 왜 오는지 우리는 그 답을 다 담아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현장 앞에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지, 아니면 다시 일어날 것인지는 그 판단 여하에 따라 엄청난 결과가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자신에게 찾아온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씨름하는 대신에 모압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이 흉년을 피해 찾았던 모압은 어떤 곳입니까?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너무 좋은 곳입니다. 수자원이 풍부해서 농사도 목축도 잘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악한 곳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상의 사술이 있고, 죄악이 관영합니다. 따라서 모압으로 갔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이나 장소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가정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져 있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흉년을 피해서 좀 더 나은 삶, 좀 더 행복한 삶을 살려고 떠나온 삶인데 다 잃은 것입니다. 그들은 10년 만에 가진 것 마져 다 잃어버렸습니다.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마저도 죽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 모두 잃었습니다. 가장과 갓 결혼한 두 아들이 죽고 세 명의 과부만이 남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가 이럴 줄 알았으면 베들레헴을 떠났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원치 않는 이 고난이, 이 흉년이 왜 우리에게 찾아옵니까? 저는 어린 시절 산골마을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흉년 보릿고개를 몇 번 넘어 봤습니다. 사람들은 깊은 산에 들어가 칡뿌리를 캐 먹고 들판에 흩어져 쑥과 나물을 캐다 끼니를 때우고 우리네 부모님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떡을 해 먹었습니다. 하물며 3000년전 팔레스틴 농경사회, 유목사회에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들었다면 그 고통이 오죽했겠습니까?
오늘 정보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흉년은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을 잃어버려서 가족의 생계가 막막해 지신 분들, 사업에 실패해서 사채 따위로 전전긍긍하시는 분들, 경제적인 흉년을 만난 것이 아닙니까? 건강에 자신감을 잃어버려서 ‘이러다 잘못되는 것 아니야’,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의사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할 때에 건강의 흉년이 온 것입니다.
행복했던 가족관계가 깨어지고 부부관계 혹은 부모자식 형제들의 관계가 깨어졌습니까? 교회 안에서 함께 사랑해야 될 성도들간에 관계가 사소한 말다툼이나 의견차이로 점점 골이 깊어져서 이제는 대화가 안되는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까? 인간관계에 흉년이 온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말씀이 읽기 싫어졌습니까? 분명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해야 되겠는데 기도의 문이 막혀져 버렸습니까? 내 영적인 향상이 사라져버렸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신앙생활의 흉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멜렉은 자신에게 찾아온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씨름하는 대신에 모압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것은 현실 도피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모압 땅을 선택합니다. 적어도 신앙인이었던 엘리멜렉은 그렇게 쉽게 선택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엘리멜렉’ 그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엘리’는 ‘나의 하나님’이고, ‘멜렉’은 ‘왕’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의 부모님은 엘리멜렉에게 “ 너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라.” “네 삶의 최고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라.” 그런 깊은 뜻으로 엘리멜렉이라는 좋은 이름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는 어려움이 닥치자 고향 땅을 등지고 이방 땅을 선택합니다. 이는 신앙인으로서 궤도 이탈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삶을 말합니다.
모압이 어떤 나라입니까? 모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원수의 땅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행진할 때 이스라엘을 집요하게 방해했던 사람들이 바로 모압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모스와 몰렉’이라는 우상을 섬기던 자들입니다. 자식을 몰렉신에게 바치는 우상의 땅입니다.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모압 땅으로 이주하는 것은 한번 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멜렉은 경제적인 안정을 좇아 이주를 합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철저하게 실패합니다. 엄청난 상실의 아픔을 경험합니다. 자신도 죽었고, 두 아들마저도 잃었습니다. 세상의 환경과 조건을 보고 모압 땅을 선택한 엘리멜렉은 철저하게 실패합니다. 우리들도 종종 엘리멜렉과 같은 선택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소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 앞의 두 갈래 길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윗이 쓴 시편 11편1절이 얼마나 귀한 고백인지 모릅니다. 다윗이 인생의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빠져서 한치 앞도 안보이는 절망의 골짜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자식이 등을 돌려 아버지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알았을 때, 얼마나 고통이 컸겠습니까? 다윗은 인생의 절망적인 그 흉년에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시11:1절에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인생이 고난을 만나면 그 앞에 두 갈래 길이 펼쳐집니다. 하나는 다윗이 선택한 길, 여호와께로 피하는 길입니다. 또 다른 길은 세상 사람들이 권하는 길입니다. 새처럼 날렵하게 산으로 도망하는 길, 현실 도피의 길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고난이나 흉년을 만나면 하나님을 찾지 말고 우리 방식대로 살길을 찾아 도로로 나가라고 권합니다. 날렵하게 ‘네 산’으로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산으로 도망가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피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은 자기 방식대로 잘 살아 보겠다고 모압으로 피해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도 모두 몰락시키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의 선택을 생각해 보세요. 갈등이 생겼을 때에 아브라함이 조카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롯은 소알 뜰을 바라봅니다. 그곳은 물이 많고, 땅이 비옥합니다.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게 보입니다. 당연히 롯은 자기 입장에서 경제적인 부요가 보장된 소알 땅을 선택합니다.
아브라함은 할 수 없이 모래바람 부는 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경제적인 안정이 보장된 땅이라고 여겼던 그곳은 소돔과 고모라가 됩니다. 그들의 풍요로움이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를 짓습니다. 성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그 후손들이 타락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유황불을 내려 그 땅을 철저하게 심판하십니다. 환경과 조건을 좇아간 롯의 선택은 철저하게 실패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모래바람 부는 언덕이었지만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은 환경이나 조건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 같은 곳이었지만 그곳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의 땅임을 알았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됩니다.
환경이나 조건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품고 나가십시오. 환경적으로는 좋지 못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기에 더 좋은 환경이라면, 그곳에 머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더 풍성케 하시고, 창대케 하시는 축복이 임합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하나님 앞에 실패하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볼 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모습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우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아름다운 선택입니다. 성공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너무 쉽게 뒤로 물러납니다. 내 앞에 홍해가 나타나고, 여리고 같은 성벽이 버티고 있고, 골리앗과 같은 적군이 있을 때 우리는 쉽게 포기합니다. 포기는 언제만 쓰는 단어라고 했지요? 배추를 한 포기 두 포기 셀 때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포기라는 단어를 지워버리십시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막은 불같이 뜨거웠습니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목이 마르고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아들은 원망에 가득찬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입니다. 더 이상 걸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죽는 편이 낫겠어요" 아버지는 아들을 타일렀습니다. "애야. 조금만 더 가면 틀림없이 맑은 물과 마을이 나타날 거야. 힘을 내렴" 그때 두 사람 앞에 커다란 무덤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아들은 더욱 절망해서 울부짖었습니다. "이 사람도 우리처럼 죽은 거예요. 이젠 우리도 이곳에 죽게 될 거예요. 우리 앞에는 죽음밖에 없어요"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아들아, 무덤은 희망의 징조란다. 무덤은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희망의 표시란다." 아버지의 말대로 조금 더 갔을 때 마을이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가끔 '사막의 무덤' 같은 시련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징조, 절망의 징조가 아닌 희망의 징조입니다. 어려움이 다가오면 어떤 사람들은 '아이고 죽겠다'고 말합니다. 절망 가운데 빠집니다. 포기합니다. 낙심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죽겠다'가 아니라 '주께 있다'로 바꾸어야 합니다. 죽겠다는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절망과 포기라는 독화살을 맞으면 죽게 됩니다. 그러나 비록 내가 견디기 힘든 고난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바라보며 나의 모든 소망은 오직 주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자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더 큰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우연이 없습니다. 우연 속에는 필연이 있고 그 필연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보세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그분은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문제 앞에 두려움이 있고, 인생의 흉년이 와도 한가지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봅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 인생의 흉년이 해결되지 않은 채 오래 지속되면 참 힘듭니다. 확신도 흔들리고, 계속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도 어렵습니다. 기도도 막힐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때때로 낙망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명심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럴 때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성숙도는 인내의 여부로 측정됩니다. 인내하는 신앙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인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당장 이뤄지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를 맞춰서 이루어 주십니다.
어제가 무슨 날입니까? 발렌타인데이죠? 그러나 어제 안중근 의사가 31살의 나이로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에서 죽음을 당한 날입니다. 이제 광복 70년이 올해가 되는데 정말 나라를 위해 국가의 흉년 앞에서도 절개를 지킨 분들이 이 땅에 많습니다. 극동방송국에 부사장으로 계셨던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인 주광조 장로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아버지가 순교한 지 1년 4개월만에 이 나라에 8. 15해방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때 가족과 교회는 돌아가신 목사님을 생각하며 흐르는 눈물을 수없이 닦아가며 감사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당시 그의 어머니는 위암으로 언제 돌아가실 지 모를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는데, 하루는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찾아와 어머니에게 돈과 남산동의 적산가옥문서 그리고 논밭문서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항일투사인 주기철 목사의 숭고한 정신에 감복해 김일성이 보낸 포상금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완곡하게 사절을 하며?주목사님은 이 세상의 포상을 받기 위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순교했으니 하나님의 상을 받기를 바랄뿐이요!“ 완강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자신은 마음에 커다란 갈등이 왔다고 합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어머니, 그렇다면 이 험한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기 위해서는 저 돈이 저 재산이 필요한데” 어머니는 그런 자기를 의식하였는지 그들이 돌아간 다음 아들을 앉혀놓고 성경구절을 찾아 읽으라고 했답니다. 시37:25-26절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의롭게 산 자가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들이 구걸 당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저는 항상 은혜를 베풀므로 그 자손들이 복을 받았도다?
사실 주 목사님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 주었습니까? 그렇다고 가르치기를 했습니까? 남겨준 물질적인 유산이라고 배고픔과 원망과 좌절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놓치지 않았던 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엔 세상이 주지 못하는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엄청난 유혹 앞에서도 그 집문서를 뿌리 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묻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가난한 게 문제가 아니예요. 실직이 문제가 아닙니다.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를 만날 때마다 그 문제에 가려져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른 게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은 온갖 시련들로 가득한 흉년의 현장입니다. 이런 저런 어려움들이 날마다 닥쳐옵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이 고난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입니다. 오히려 이 인생의 흉년에 승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분명한 것은 시험에는 범위가 있고, 하나님만 의지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시험을 통해 겪는 고난보다 더 큰 은혜, 더 큰 축복의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디 이런 사실을 명심하시고 어떤 인생의 흉년이 와도 낙심치 말고 꼭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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