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원하는 교회가 무엇입니까? 행3:1-10. 2015년 2월8일 주일 설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2-08 |
조회: 1718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의 말씀은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지, 기독교가 세상에서 무엇을 줄 수 있는 지를 설명해 주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나 능력으로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남의 도움이 아니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힘으로 걷지도 못합니다.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한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앉은뱅이로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는 그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한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되자마자 나타난 많은 이적기사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을 한 가지 들어서 자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중년 남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으로 뛰어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은 내용자체가 지 의미도 대단한 것이지만 예루살렘 교회에 미친 영향 역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기독교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지를 보여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기독교를 알고 싶다면, 기독교가 세상에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성령이 주시는 음성에 잘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서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한생을 살면서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고, 또 살면서 물질에 쪼들려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정말 원치 않는 일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옥스퍼드 대학의 맥그래스 교수가 쓴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책에 보면 인생을 묘사한 한 구절이 참으로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그는 “짧고 상쾌한 산책일 줄 알았던 것이 미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마라톤으로 바뀐다.” 어린 시절, 철이 없을 때는 인생이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걷는 산책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span> 그러나 좀 더 걷다 보면 미처 준비가 안 된 채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 되어 버립니다. 이 마라톤을 달리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쳐 쓰러지고 탈락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는 인생길입니다.
그런데 오늘 2절에 보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앉은뱅이라는 말이죠. 이 사람은 구걸하는 장소에 스스로 올 수조차 없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구걸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거지였고, 사도행전 4장엔 그가 40여세가 되었다고 하는데 40여 년 동안 장애자로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기능과 역할을 상실해 가치가 없는 존재로 버려졌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얼마를 적선해주느냐에 따라서 그 날 하루 삶의 질이 결정되는 사람입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그가 있는 장소가 ‘미문’입니다. '미문'은 한자어로 '아름다울' 미( 美)자와 '문' 문(門)자를 사용하여, '아름다운 문'이란 뜻입니다.
그 아름다운 문 앞에 가장 대조적으로 희망을 잃어버린 채 구걸로 인생을 살아가는 이 앉은뱅이가 앉아 있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40년 동안, 단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그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40여 년을 살면서... 하체가 마비된 고통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희망이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때는 일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10년 20년 세월이 흐르고, 30년 40년을 살았지만,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그는 절망하다 못해... 체념한 체로 하루 하루를 고통 중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가족들의 원망과 탄식을 들어야만 했을 것이고,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비아냥도 참고 많은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비록, 성전 문 앞에까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그의 필요를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길거리에서 동냥이나 해서 먹고살라고... 그를 길거리의 거렁뱅이로 방치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성전 미문에 누군가가 데려다 놓으면 늘 상 해왔던 대로 구걸하는 인생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 3절에 보면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여기 ‘구걸’했다는 단어는 우리말로 ‘동냥’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어떻하든 좀 더 애처러운 모습을 하고 수간 순간 지나가는 사람들의 동정심을 사서 자신의 빈 그릇에 돈을 채우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입니다.
보세요 그가 앉아있는 현장은 성전 문 앞입니다. 성전에 나가면서도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거나 영생을 얻기를 원한 것이 아니고 물질만을 원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리 중요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전에 나가는 사람들의 돈주머니였습니다. 사실 그들이 던져주는 돈이 앉은뱅이에게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책임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향하여 예배를 드리려 가지만, 어느 누구하나 이 구걸하는 병든 영혼에 대하여 부담을 지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배하러 가는 사람들 중에는 간혹 그가 원하는 돈 한푼을 던져주며 그의 형편에 동정할 뿐이지, 어느 누구도 이 불쌍한 영혼을 일으키려는 열망이 없는 모습입니다.
얼마 전에 세계적인 건축가인 홍콩사람 아론 탄이란 사람이 서울의 야경은 회색 도시라는 혹평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서울 야경은 온통 십자가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부정적으로 이야기한 그는 우리나라의 워커힐 호텔의 W호텔을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입니다. W호텔은 동양에 단 두 곳 밖인 7성 호텔인데 이 사람이 설계를 했다면 실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이런 세계적인 건축가가 말한 이 한마디가 일파만파가 되어 네티즌들이 벌떼처럼 교회를 비판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심각한 고민에 빠졌었습니다. 그것은 왜 이렇게 교회가 많은 데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 C.S.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을 통해서 그런 고민에 빠진 우리에게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 답이 무엇입니까? 교회다운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 교회다운 교회가 없다. 참 심각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세상이 원하는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1.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리고 6절에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한푼 동냥에 인생을 걸었던 그 앉은뱅이에게 베드로는 외칩니다. 나는 네가 원하는 돈은 없다. 그것을 구하려면, 너는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주노라. “예수의 이름!!” 도대체 오늘날 배금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에게 이 메시지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기독교 교인들의 의식을 조사하는 연구 보고서들에 의하면 교인들이 목사님들이 설교에서 언급하지 말았으면 하는 주제 중에 1위가 돈(헌금)이야기이고, 2위는 정치 이야기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칼빈 당시에도 그런 문제의 제기가 있었던지 “오늘날의 교회의 문제는 돈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돈에 대하여 바르게 말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말했다고 알려 집니다. 돈은 삶의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돈을 피해서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청년이 소원 성취의 요정이 들어 있는 요술 항아리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청년이 요정을 불러내자, 요정이 “주인님, 무슨 소원을 들어 드릴까요?”하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청년은 지체 없이 “저는 돈과 여자와 결혼을 원합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요정은 곤난한 듯 “꼭 세 가지를 다 원하시나요?”하자 다시 청년은 “예, 저는 여자 결혼 세 가지가 다 필요한데요”했답니다. 그러면 “할 수 없지요. 소원대로 해드리지요” 그래서 그 청년은 얼마 후 돈 여자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돈 여자와 결혼 안하시고, 돈 인간으로 살지 않으시려면 돈에 대한 바른 생각, 돈에 대한 바른 헌신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주님은 결코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나, 장래를 위해 물질을 저축해 두거나, 적절한 한계 내에서 물질을 누리는 것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필요를 인정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물질이 우리 인생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질이 목적이 되는 징후가 무엇일까요? 물질을 쌓아두는 그 자체에서 보람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서서히 물질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물질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닌 물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이 맘몬주의의 우상에 빠진 삶의 모습입니다.
보세요.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물질을 거뭐쥐어야만, 삶에 안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돈을 잃는 것은 무엇보다 인생의 안전장치가 제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악착같이 물질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인생의 안전을 보장하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물질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경제위기 속에서 주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물질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랑하는 동성교회 여러분! 오늘 저자 거리에서 베드로가 외쳤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 예수의 이름이 무엇이기에,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노래한 그 노래들은 지난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수없이 많은 노래들의 사연들을 보면 꼭 예수 이름 때문에 복 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오히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의 한 복판에서도, 이 이름 하나 때문에 위로 받고 용기를 얻었고 힘을 얻었던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떤 분은 병상에서 그 예수를 그 이름을 부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은 건축자가 내버린 돌맹이처럼 하찮게 내버렸지만 어떤 사람의 가슴속에는 그 것이 어느 보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귀한 보석으로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4: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예수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은 없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자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 다른 이름을 “두번째 이름(second name)”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예수 이름 이외에 구원받을 수 있는 두 번째 이름 즉, 다른 이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오직 구원은 예수이름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구원의 기쁨, 섬김의 기쁨은 그분의 이름이 지닌 영광의 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높여 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증거 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지상의 모든 이름들을 잊을 마지막 순간에도 붙들어야 할 유일한 이름입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금과 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의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외친 베드로와 요한도 본래는 앉은뱅이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 평생 하루 벌어 하루 먹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당시 이들은 세상 앞에 소외된 자들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던 천민들이었고, 배운 것도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제자가 될 만한 어떤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신경질적이고,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들입니다. 혈기 부리기가 일쑤이고, 3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으면서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 없는 행동하다가 예수님께 책망들은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앉은뱅이를 불쌍히 여길 마음이 일어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살아 계시는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 마음속에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삶이 변화하기 전의 눈으로 볼 때까지만 해도 앉은뱅이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에 주님이 주시는 사랑이 넘치기 시작할 때 비로서 그들은 주님의 관심과 뜻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게 하셨기에, 이제는 주님의 마음을 담은 두 사람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앉은뱅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여기 보세요!! 여기 7-8절을 보십시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여기서 베드로의 놀라운 위대성을 봅니다. 그는 앉은뱅이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확신이 없으면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오늘 여기 모인 우리 역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말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 삶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죽어 가는 자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자살하려는 자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혼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자기의 인생을 파괴해 버리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새 생명을 주어 일으켜 세우는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망 없는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의 계기는 바로 기도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령한 것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성령이 불같이 임한 것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력으로 말하자면 한번 설교로 삼천 명을 회개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교인 수로 말하자면 메가급 처치인 성공한 교회였고, 교회의 재산으로 말하자면 수많은 사람들의 재산이 교회 수중에 있었으며, 성도들의 가슴에 불러일으킨 헌신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일상적인 모든 생활을 떠나서 함께 모여 기도하며 공동생활을 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지도자 두 사람이 시간이 되매 기도하러 올라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절실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쁜 가운데서도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며 회심한 성도들은 교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 있던 교회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가 있었고, 또 그들의 필요와 그들의 문제를 끌어안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기독교의 위기입니다. 교회가 구제와 사회봉사를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에 좋은 프로그램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에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다른 것들을 행하는 기독교를 향해 마틴 로이드존스는 기독교의 이름을 가장한 사이비종교라고 규정합니다. 그것을 “자선 베풀기”라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40년 간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걸인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몇 푼의 자선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망가진 우리를 일어나 걷게 하는 복음이었습니다. -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성전 미문에서 먹고 살만한 걸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자선만을 베푼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진정한 기독교, 진정한 기독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구걸하는 인생 아닌 뛰어 서서 걸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 목마른 인생이 아닌 소망과 기쁨이 충만한 인생으로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9-10절 보세요.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여기서 ‘놀라니라’라는 말은 원문에 명사형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헬라어로 ‘엑스타시스’입니다. 이 말에서 영어의 ecstasy(황홀경)이란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 보고 많은 무리가 깜짝 놀라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이제 ‘살아있는 증거’가 된 셈입니다.
특별히 11절을 보면 그 사람 스스로 어떻게 합니까?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여기서 ‘붙잡으니’ 이 말은 영어성경을 보니까 cling to(붙어 있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베드로에게 붙어 다녔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베드로의 복음 증거에 대해 시청 각 자료 역할을 한 겁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 어떤 일이 생깁니까? 그 사람에게 나타난 변화가 증거가 되어 놀라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예수를 믿겠다고 결신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한 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까?
행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오순절 성령강림 후 3천 명이 되었고, 이제 5천 명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이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불이 한참 타오르고 있는 곳에 휘발유를 뿌린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겁니다. 심지어 베드로와 사도들이 핍박받은 상황에서 방패막이가 되어줍니다. 행4:14절에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당국자들이 사도들을 잡아다 취조를 하고 핍박했지만 그 사람의 명백한 증인으로 옆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훈방 조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앉은뱅이 인생에서 일어나 걷는 인생,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일으키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수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내게 금과 은이 없을찌라도 내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를 한번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막대기 하나와 물맷돌을 가진 다윗의 손을 붙잡고 골리앗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립니다. 삼손의 손에 들려진 마른 나귀 턱뼈, 모세에 손에 때묻은 마른 지팡이 하나, ... 다 보잘 것 없는 것들이지만, 이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 질 때 세상은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교회는 은과 금이 남아도는 교회가 아니라, 다만 예수의 이름만 가득한 교회-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이 오직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오직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오직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경제 위기 속에서도 우리 교회 성도들이 예수의 이름을 붙들면 일어 설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정도 우리 사업체도 예수의 이름을 붙들면 다시 재기 할 줄로 믿습니다. 주인 되신 주께서 친히 주의 이름을 위해 사는 그 가정, 그 사업 그 공동체를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이런 승리를 누리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저는 전도를 생각할 때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CCC 김준곤 목사님의 <백문 일답>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무슨 질문을 하던 대답은 하나라는 확신말입니다. 한번 해 볼까요? 자, 제가 무슨 질문을 하던 대답은 하나-<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민족의 소망은 누구입니까?(예수 그리스도) 우리 가정의 소망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친구들의 소망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역사의 소망은 누구입니까?(예수 그리스도)우리가 평생을 걸고 전해야 할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을 우리는 누구에게로 데려와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나누어야 할 최고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우리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가슴 벅찬 열매의 계절을 누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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