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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배려 - 사랑의 다른 이름. 롬15:1-3 2015년. 2월1일 주일 설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2-01 | 조회: 1574
인도의 성자 선다씽의 전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사람이 히말라야 산을 넘어가다 추위에 쓰러진 사람을 길에서 보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내 한 몸도 추스르기 힘든데--"하며 그대로 지나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 바로 뒤에서 따르던 선다씽이 지체 없이 그를 들쳐 업고 산언덕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얼마를 걸었을까요? 산 넘어 내려가다 보니 앞서 쓰러진 사람을 외면하고 떠났던 이가 길모퉁이에 역시 추위에 쓰러져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던 이웃을 들쳐 업고 있는 자기는 아직도 땀을 뻘뻘 흘리며 살아있는 스스로를 확인하면서 너무나 소중한 진리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남을 살리는 것이 바로 자기를 살리는 길이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이 '믿음의 길'은 어떻게 보면 산행과 같습니다. 모두가 산뜻한 마음으로 산행길을 나서지만, 산행을 하다보면 너무나 힘겨워하며 쉬어 가는 사람, 때로는 지쳐 넘어져 있는 동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혼자 둘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다면 함께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아갑니다. 다양한 만큼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다양한 연령, 그리고 삶의 환경이 다르고 또 각자의 위치에 따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하나에로의 모습, 더 나아가 예수를 닮는 성숙한 공동체로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 영적으로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바라보는 일에는 밝지만, 자기의 문제를 보는 것에는 어둡습니다. 이것은 죄인의 특성입니다. 남의 죄는 잘 보지만 자기의 죄는 보지 못합니다. 죄인은 자기 눈이 가려졌기 때문에 자기 죄를 성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는 들보가 있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봅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도 나쁘지만, 더 나쁜 것은 자기도 그 죄와 동일하거나 더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일을 열심히 한 사람들은 자신의 열심을 자기 의로 여기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자리에 서려는 태도가 많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정확하게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만은 자신에 대한 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자신도 모르게 교만에 빠지게 되고, 자신을 포장하고 다른 사람은 폄하하는 자리에 자신도 모르게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면서 말세라고 말하지만, 자신을 보면서 말세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너무도 매몰찬 것이 죄인의 특성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왜 문제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잘 못하면 바리새인처럼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져갈지도 모릅니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신을 의인화하게 되고 결국엔 하나님이 필요 없는 상태에 빠집니다. 이것이 당시 바리새인들이 빠졌던 오류입니다. 인간이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날마다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얼마나 악한 자인가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고는 십자가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미화하고 포장하기 때문에 십자가는 자랑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을 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죄인이라고 말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까지 나아가지 않았다면 엄밀히 말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가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고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실패와 연약함을 보면서 판단하기 보다는 나도 저 자리에 있었다면 실수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자기 겸손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인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입니다. 깨달은 죄인과 깨닫지 못한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자리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자신은 선하다는 의인의식이 있는 유대인들은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못하고, 그 말씀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당시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갑니다. 아주 나쁜 태도입니다. 죄인의 특징 중 하나가 말씀 적용을 남에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에도 바울은 건강한 교회, 성숙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할 일이 있음을 말씀을 합니다.
1절입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정말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배려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 배려라는 말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 여러분에게 있는 ‘강한 믿음’은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은사와 능력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봉사하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뜨거운 감자가 바로 갑을 관계가 아닙니까? 힘 있는 자의 배려가 없기 때문에 오는 상처와 아픔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뭐, 이야기를 안해도 잘 알 것입니다. 요즘 어느 항공사의 땅콩사건이라든지, 한국의 샐러리맨의 가슴을 후벼 판 미생이라는 프로도 강자의 그 냉혹함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힘을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이 강한 자는 다른 뜻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바로 선자를 말합니다.

왜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까? 세상에는 강한 자가 판을 칩니다. 그리고 강한 자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약한 자의 약점을 이용해서 존재합니다. 여러분의 형제의 약점이나 부인의 약점으로 장난하지 마십시오. 남편의 약점을 가지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약점이 있다면 보호하십시오.

그 약점은 여러분이 사랑해야 할 부분입니다. 왜 우리는 연약한 형제의 약점과 치명적인 상처를 보호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덕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휴머니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선행이나 윤리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인임을 알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고 우리의 병도, 절망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예수님 앞에 끌려 왔습니다. 이 여인은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부끄럽고 추한 모습으로 주님 앞으로 끌려 왔습니다. 세상의 모든 여인들은 남들 앞에서 아름답고 깨끗하게 보이기를 원하는데 이 여인은 추한 몰골로 끌려와서 예수님 앞에 내동댕이쳐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 나아오는 인생들의 모습은 참 다양합니다. 성공하고 출세해서 목에 힘주며 자랑스럽게 나오는 이들도 있지만, 실패하고 갈데가 없어서 두 손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이들도 있습니다. 경건한 구도자의 모습으로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오는 이도 있습니다. 반면에 지난날 저지른 허물과 죄에 대하여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한없는 긍휼과 용서를 구하며 찾아오는 이도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모습과 백인백색의 목적으로 주님을 찾아 나오지만, 그들을 맞아주시는 주님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대통령이라고 버선발로 달려오시지 않습니다. 유식한 사람이라고 해서 환대하지 않으시고, 무식한 사람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힘 있는 사람, 힘없는 사람, 돈 많은 사람, 돈 없는 사람, 잘생긴 사람, 목생긴 사람, 남자, 여자, 어른 , 아이 할 것 없이 예수님은 모두를 따뜻하게, 기뻐 맞아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여인의 간음죄는 결코 용서 할 수 없는 죄였습니다. 마땅히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였습니다. 하지만 죄의 결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그 처절한 여인의 모습에,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신 예수님의 긍휼이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여인은 기꺼이 용서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찌 그 여인만 그런 긍휼하심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자신 역시 그 은혜와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까? 죽어 마땅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 이것은 세상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특혜 중에 특혜입니다. 롬8:33-34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여기 보세요.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고 누가 나를 판단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 앞에 당당하게 살아가야 할 뿐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 큰사랑을 입었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의 그 긍휼하심처럼 긍휼의 마음을 품고 남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고통당하는 이들과 연약한자들을 돌보는 삶이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었다면 우리는 살길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나 실수를 지적하시고 심판하셨다면 이곳에 살아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다 예수님이 눈감아 주시고 못 본척하시고 안들은 척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렇게 은혜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았으니 우리의 연약한 형제를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약한 자를 도와주면 그때부터 예수님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깊이 안 사람들은 상대를 배려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갑니다.




둘째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마땅히’라는 단어입니다.
‘마땅히’라는 말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은 우리가 의무적으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약점에는 부족한 것, 모자란 것까지도 다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길 원하시는 것을 누리지 못한 것도 연약한 자들의 약점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그것까지도 먼저 믿고 먼저 구원의 감격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마땅히 담당해주어야 할 연약한 자들의 약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져야할 죄의 짐을 대신 져 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 져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인해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면, 그래서 우리 안에 구원의 감격이 있다면 우리도 우리 주님처럼 연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대신 짊어질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 약점을 담당한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여기에서 ‘담당했다’고 하는 이 말은 ‘내가 짊어진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의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짐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짊어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약점과 허물은 내 어깨에 지워진 내 짐입니다.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비난하고 그것을 떠벌리고 다닌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허물과 약점을 드러내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약점을 담당한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내 짐이기 때문에 내가 돕고 내가 덜어내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어깨에 지워진 무거운 짐이라면 미련스럽게 그 짐을 끝까지 지고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덜어낼 수 있는 짐이라면 덜어내고서 가볍게 만들려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약점과 허물을 보았다면 그 약점과 허물이 덮어지고, 그것이 그에게서 없어지도록 기도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내 약점이고 내 허물인 것처럼 가슴 아픈 심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 약점을 극복하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 강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지난 1월 5일 미국 고등학교 농구대회에서 161대 2라는 큰 점수 차이가 나는 경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기가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관심을 끄는 것은 그 경기 결과로 인해 한 고등학교 농구팀 감독에게 2경기 출전 정지라는 징계가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161대 2로 끝난 경기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한 감독에게 징계를 내렸다면 어느 팀 감독에게 징계를 내렸을까요? 무려 159점 차로 이긴 팀의 감독에게 징계를 내렸겠습니까? 아니면 한 경기에서 단 2점 밖에 내지 못하고 159점 차이로 진 팀의 감독에게 징계를 내렸을까요? 정답은 159점 차로 크게 이긴 팀의 감독에게 징계를 내렸습니다. 아로요 밸리 고등학교의 농구팀은 그 지역에서 최강팀입니다. 다른 고등학교와 경기를 할 때에도 보통 70점 차 이상으로 승리를 거둘만큼 실력이 대단한 팀입니다.

그리고 패배한 블루밍턴 고등학교 농구팀은 약체 중에 약체입니다. 다른 경기에서도 91점 차이로 진 적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최강팀과 최약체팀의 대결에서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승리팀의 감독에게 징계가 내려진 이유는 ‘지나치게 많은 점수 차이로 이긴 것은 스포츠맨쉽에 어긋난다.’는 지역리그의 판단 때문입니다. 똑같이 5명씩 하는 농구경기에서 있을 수 없는 결과가 만들어졌고, 패배한 팀에게 망신을 주었기 때문에 징계를 내렸다는 뜻입니다. 이 경기에서 전반전은 104대 1로 끝났습니다. 그러자 이긴 팀에서는 후반전에 주전 선수들을 모두 빼고 후보 선수들로만 경기를 치 떽윱求 /span>. 그런데도 약체팀의 선수들이 상대방 코트로 넘어간 것이 불과 4,5차례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강팀에서 (농구용어로) 풀 코트 프레스 수비를 펼쳤기 때문입니다.

미국 고등학교 농구대회에서는 큰 점수차가 나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합니다. 전문적인 선수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취미로 농구하는 아이들로 팀을 꾸려 대회에 출전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9년 1월에는 텍사스 주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100대 0이라는 결과가 나와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100대 0으로 진 팀은 집중력이 부족하고 주의가 산만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결국 이긴 학교가 사과문을 내고 이긴 팀의 농구부 감독은 해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참 여러 면에서 부러운 미국사회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경쟁에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 내가 승리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미국의 스포츠 문화에서는 무조건 이기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 내게 이길 힘이 있어도 때로는 그것을 절제할 수 있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161대 2, 100대 0이라는 점수로 이긴다는 것은 다른 선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포츠를 즐기는 다른 사람들의 의욕을 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스포츠를 단순한 경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힘없고 약한 사람을 조금이라도 배려하는 마음, 남을 좀 더 배려하는 마음이 담긴 생각들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마음이어야 하고, 신앙인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이유는 우리가 구원받고 하늘 기쁨을 누며 살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부르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하늘의 기쁨과 복이 나눠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제가 처음 부임 받은 전도사 시절에 한번은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년초 제직 수련회를 했는데 제가 교인들을 모시고 산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1월에 추위 속에 산 기도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산에서 기도를 인도하다 짐승 소리 때문에 겁에 질려 40여명의 성도들과 함께 기도도 못한 채 산 아래로 도망쳐 온적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시던 목사님이 이 갑작스런 우리들의 행동에 얼마나 당황하셨겠습니까? 자초지경을 듣던 목사님이 갑자기 우리 일행을 모아놓고 호통을 치십니다. "기도하러 간 사람들이 나무뿌리는 뽑지 못할망정 이게 무슨 망신이냐"고, 평양신학교를 나오신 분이라 평안도 사투리로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뚫어지게 보시더니 나보고 다시 올라가 기도하랍니다.

참 부끄럽기도하고 뭐 어떻하겠습니까? 그 날 따라 겨울 산에 진눈깨비가 앞을 가릴 정도로 쏟아지는데 정말 난처하더라구요. 안 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발걸음이 안 떨어지지만, 밤에 혼자 산에 올라갔습니다. 기도가 되겠습니까? 가뜩이나 겁을 먹은데다 또 억지로 왔는데 얼마나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무섭습니까? 한 밤에 진눈깨비에다 세찬 바람이 섞여 볼을 때리는데 그 순간, 차라리 꿈이었으면 했습니다. 기도가 안 나와요. 찬송도 했지만, 목구멍에서 맴돌다 말아요. 한 두시간이 지났나봐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 앞 맞은 편에서 바람을 타고 낯이 익은 기도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바로 담임 목사님의 기도소리입니다. 저를 보내놓고 목사님도 저의 뒤를 따라 맞은 편 골짜기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야! 눈물이 확 쏟아집니다. 얼마나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그때부터 어떻게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한참 기도하다보니까 목사님이 그 깊은 산 속에서 내 곁에 서서 계시는 것입니다. 한 젊은 전도사가 사역의 현장에서 실수한 그것은 정말 잘 못한 것입니다. 연초에 계획을 세우고 제직을 데리고 산에 왔는데 저의 두려움 때문에 모든 것을 헝크러 놓은 것은 어쩌면 책망 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목사님은 기도의 자리에서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눈물로 나를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때 그 사랑의 배려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목회 사역을 접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목회를 하면서 나도 이 사랑을 받았는데 이 사랑을 쏟을 힘이 부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순간 순간 메말라 있는 나의 모습을 볼 때마다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변화되면 받아 주겠다.' '좋은 믿음을 갖게 되면 받아 주겠다.' '회개하면 받아 주겠다' 하고 조건을 내걸지 않으셨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용납하시고 받아 주시고는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먼저 받아 주시고 나서 회개하게 하시고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깨우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넓은 가슴으로 여러분을 품으십니다. 여러분의 과거가 부끄러운 실수와 허물로 더러워도 개의치 않으시고 받아 주십니다. 여러분이 변화되지 못하고 아직 죄의 습관에 사로잡혀 있어도 책망하지 않고 받아 주십니다. 여러분이 결심하고는 수없이 넘어지고 실패하며 초라한 모습이라도 불쌍히 여기시고 받아 주십니다.

말틴 루터 킹 목사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자리에서 그는 그의 연설을 이렇게 마무리 했습니다. "아직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사랑하기 위해서 손을 잡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해 네명의 친구들이 손을 잡은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이 12명의 제자들이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는 너희가 온 인류를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12명만이라도 사랑한다면---세상은 변화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믿음이 강한자라면 서로 짐을 나누어지십시오. 배려 그것은 분명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기도 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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