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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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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합을 깨뜨린 여인. 요12:1-8. 2015년 1월 25일 주일 예배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1-25 | 조회: 2189
얼마 전에 한 신문에서 동해안에서 그렇게 잘 잡히던 꽁치나 정어리, 명태 등이 씨가 말라 간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동해의 수온이 점점 높아져 가기 때문에 찬물을 좋아하는 이 어종들이 북쪽으로 ?겨 올라가고 있는 까닭이라고 합니다. 과거에도 그런 보도를 읽은 적이 있지만, 다시 한번 섬뜩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지구 온난화가 무섭도록 빠르게 진행되 가고 있다는 것이 전 세계 과학자들의 분석입니다. 이런 속도로 지구 대기 중의 이산화 탄소 비율이 급상승하다보면 앞으로 어떤 현상과 괴변들이 지구상에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공장들, 자동차와 수많은 연소 엔진들, 공공장소와 가정등에 에어컨등 대기 오염 요소들은 정부나 환경단체들이 조정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세계를 덮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해도 이미 자체 환경파괴가 심각한데다가 이웃 중국 대륙에서 불어오는 엄청난 산성비와 황사현상까지 겹쳐 건강에 심각한 위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가정의 윤리도 허물어져가고 있고, 세대간의 위아래 예절도 벌써 옛날이야기처럼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환경도 망가져가고, 인간의 양심도 화인 맞아가는 이 세대가 심각하도록 불안해 보이지 않습니까? 정말 지금은 무엇을 얻어야 할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무언가를 잃지 않도록 정신차리고 주변을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사실 목사로서 염려하는 것 중에 하나가 우리 신앙생활도 예전과 같지 않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일들이 목회 현장에서 보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헌신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 날 교회 부흥은 이 헌신분들의 충성과 희생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헌신이 점점 말라가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말씀은 마리아라는 여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서 주님께 아낌없이 부어드리는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 14:9절에서는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여인의 헌신이 영원히 기억될 가치가 있는 영원한 사건이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위 설교자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한, 그리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이 여인의 존재와 헌신은 계속 기억될 것입니다. 자신의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주는 이 여인의 모습을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1. 이 옥합을 깨드린 마리아의 행동, 그것은 '주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3절에 보시면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 앞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지금 마리아는 온 맘 다해 주님의 발을 그것도 자기 머리채를 걸레로 삼아서 그 발을 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방에 향기가 진동했다고 합니다. 이 나드는 원래 티벳과 인도 접경에 있는 히말라야의 높은 고산 지에서 나는 향료입니다. 너무 귀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다른 향료와 조금씩 섞어서 사용했습니다.

가격면에서도 가룟 유다의 계산대로라면 300데나리온, 곧 노동자가 일 년 동안 수고해서 벌 수 있는 금액에 해당하는 3000만원이 넘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막14:4절에는 "아니, 저 비싼 향유를 저렇게 허비해도 되는가?"였습니다.(4절) 허비했다. - 아무 쓸모없는 낭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말없이 예수님의 몸에서 발까지 흘러내리는 향유로 이제는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주님을 향한 이 여인의 사랑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주님께 아낌없이 부어 드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은 값을 묻지 않습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 주는 것입니다. 값을 따진다면 그것은 사랑의 행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하면 상대방에게 최고의 것을 주게 됩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향유 옥합을 깨서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봅니다. 행복한 신앙 생활을 하는 그룹과 불행하게 신앙 생활하는 그룹입니다.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합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자기 생명을 다 바쳐 주셨다는 그 사실만 생각하면, 그분을 향한 사랑이 항상 가슴에 차 오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분에게 좀더 기쁨을 드릴까. 그분에게 더 좋은 것을 드릴까. 그분에게 더 최고의 것을 드릴까 하는 빚진 마음이 있기에,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시간도 아끼지 않습니다. 돈도 아끼지 않습니다. 내 몸도 아끼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드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얼굴이 밝습니다. 기쁨이 충만합니다. 신앙 생활이 그들의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똑같이 신앙 생활을 하는데 왠지 어두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 것을 내놓지 않으며, 베푸는 데 있어 너무 인색합니다. 지극히 계산적으로 신앙 생활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풍족하게 가져도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늘 내놓지 않으려고 벌벌 떨고 있으니 불행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차라리 안 믿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진정한 사랑은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더 잘해 주지 못해 미안해합니다. 젊어서 연애할 때 다 경험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뭐든지 다 주고 싶고, 더 주고 싶어서 안타까워했던 심정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마리아의 심정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너무 비싸서 드리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마리아의 심정이었습니다.

내 영혼을 살리신 주님, 내 오라비의 생명을 되돌려 주신 주님-이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이 옥합을 깨뜨리게 한 것입니다. 교회사가인 라투렛은 교회역사를 연구하면서 중요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교회를 지켜온 사람들--그들은 신학자가 아니다. 정치가도 아니다. 부유한 사업가도 아니다. 심지어 목회자도 아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의 제단에 사랑을 바친 수없이 많은 성도들 바로 그들이 에클레시아의 주인들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리아 같은 성도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켜온 주역들입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마음-그것은 주를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를 지키는 사람들도 이런 마리아의 영성을 지닌 성도들입니다.




2. 사랑으로 하는 헌신이기 때문에 마리아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주님께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은 뒤 자기의 치렁치렁한 머리털로 그 발을 씻었습니다. 이것을 본 가룟 유다는 속에서 분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저런 식으로 못 쓰게 만들다니. 도대체 저 여자가 정신이 있어 없어?’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습니다. “아니, 차라리 가난한 자들에게나 줄 것이지 이게 무슨 짓이야?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거액을 이렇게 한 순간에 다 날려 버리다니. 원, 세상에.”

가룟 유다는 계산이 빠른 사람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돈을 많이 만져 본 사람이요,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살림을 맡은 회계였습니다. 예수님에게 돈이 있었다 해도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가끔 제자들과 함께 생활을 해야 했기에 어느 정도의 돈은 필요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누가 주든지 간에 헌금이 들어오면 그것을 받아서 장부를 정리하고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지출하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다 보니 그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제정신이 있는 여자라면 그것을 그대로 들고 와서 ‘주님, 이것 받으세요. 값이 꽤 나가는 것이니 팔아서 주님이 사역하는 데 필요할 때마다 쓰세요’ 하고 주님께 드렸을 것이요, 그러면 주님은 그것을 회계를 맡고 있던 나에게 넘겼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시장에 가지고 나가서 300데나리온에 팔고는 장부에는 250데나리온만 쓰고 50데나리온은 내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룟 유다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6절에 보면 요한은 그를 ‘도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금을 슬쩍하는 일이 이전에도 가끔 있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가 한몫 챙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마라아가 날려 버렸다는 생각에 괜히 화가 났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이렇게 불평을 하자 마태복음에 보면 다른 제자들도 그 불평에 동조를 하고 나섰습니다. 그의 선동적인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정말 가난한 자를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중인격자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볼모로 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불과 며칠이 안 되어 그는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자기 선생 되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겼던 것입니다. 은 삼십을 데나리온으로 따지면 약 120데나리온 정도밖에 안 되는 돈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드린 향유 옥합의 액수의 반도 안 되는 금액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겼습니다. 그는 실로 입으로는 자선을 외치면서 속에는 악한 욕심을 품고 무서운 계산을 하는 이런 사람의 눈에는 사랑으로 하는 모든 행동이 허비요, 낭비로밖에 보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유다가 무슨 소리로 비난을 하든 일언반구 대꾸하지 않고 그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사랑은 귀머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화를 내며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를 질책하는 가룟 유다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그를 가만 두어라. 그녀는 지금 나의 장례를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마태복음 26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평소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보고서도 나몰라라 하신 분이었다면 이 말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어느 누구보다도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셨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그 비싼 향유를 허비하는데도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값비싼 향유를 허비한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까? 폴 틸 리히(P. Tillich)라는 신학자는 이 마리아의 행동을 ‘거룩한 낭비’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낭비는 낭비인데, 거룩한 의미가 있는 낭비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칭찬하신 이유는 마리아의 이런 행동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7절에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할 날들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예수님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주님을 위한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순수한 의도로 그랬는데 내게 비난이 쏟아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듣기 싫으니까 안 하면 되는 것입니까? 비난하던 말던 상관치 않고 그냥 그 일을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까? 여러분이 주의 일을 할 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일이라고 해서 항상 칭찬만 받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이었다해도 사람에게 욕을 먹고 괴롭힘을 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제자들입니다. 믿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믿는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잘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는 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제일 견디기 힘든 때가 언제입니까? 같은 믿는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괴롭힐 때 비난할 때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그러면 참고 견딥니다. 오히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그럴 때는 정말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난을 받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견뎌야 할 때가 있습니다.




3.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랑의 헌신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여자가 옥합을 깨고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린 때가 언제였습니까? 12:1을 보십시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은 유월절 주간 마지막 날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사건은 금요일 유월절 시작 이틀 전 수요일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체포되어 십자가로 가시기 불과 9일 전이었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이 예수님께 이 사랑의 표현을 드리지 못하고 주님의 임종의 소식을 접했었더라면 그 얼마나 뼈저린 회환이 되었을까요? 그러나 다행히 그녀는 기회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 베다니의 잔치는 여느 평범한 잔치가 아닙니다. 이 잔치는 결코 흥겨운 잔치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현상수배자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요한복음 11:5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또 11:53절에 보면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내부적으로는 예수님을 죽일 잔인한 음모를 다 짜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마다 예수님을 현상수배한다는 전단을 붙여놓았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예수님을 바로 체포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지 못하도록 -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밉보이면 엄청난 피해와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지금 잔치가 열리고 있는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바로 코앞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시몬은 그런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벌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이라도 걸고 헌신하려는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자신의 옥합을 깨고 자신의 머릿결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이 마리아의 행동에는 이제 이 땅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에 머물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때를 놓칠 수가 없다고 아마도 판단했을 것입니다. 아니 그분이 돌아가시면 그의 사체에 그녀가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살아있는 구세주에게 그녀의 신앙의 고백을, 그리고 사랑의 고백을 드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그녀는 아마도 판단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바로 이런 여인의 심정의 고백을 아시고 받으셨다고 증언하지 않습니까? 본문과 함께 포함된 막14:8절에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준비하였느니라” 믿음의 고백은, 그리고 사랑의 고백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을 때에 해야 합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이런 여인의 이 믿음과 사랑의 고백에 주님은 감동을 입으시고 이 여인의 헌신은 영원히 기억될 일임을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까?

기회라는 말을 우리는 영어로 ‘opportunity'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본래 ob+portu(앞에서+항구)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현대적인 선착장이 마련되기 전 배들은 항구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바라보다가 파도가 몰려오기를 기다려 항구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한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파도가 돌아오는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파도가 몰려 올 때 그 때를 놓치지 말고 응답해야 합니다. 감사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에 그 기회를 잃지 말고 주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회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디 신학교의 총장을 지낸 조지 스위팅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가 묻게 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벌었는가? 가 아니라 그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드렸는가? 가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벌어서 모아놓았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늘에 쌓았느냐 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지금 나를 위해 하늘에 무엇을 쌓고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시간, 재능과 재물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주님을 위해 쓰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 인생의 옥합을 깨뜨리지 않고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단지 부자청년처럼 종교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몸을 찢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트려야 할 때입니다. 잠시 있다 사라질 것을 붙잡고 떠는 인생이 아니라 그것을 복음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드려진 만큼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마음만 찢는 자가 아니라 내가 받은 그 사랑을 가정과 세상에 흘려 보내야 합니다. 그 결단과 행동하는 믿음이 생명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이 은혜가 우리의 삶에 가득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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