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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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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 사랑의 향기가 넘치는 곳. 잠17:1. 2015년 1월18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1-18 | 조회: 1657
요즘 영화관에 상영되는 영화의 대부분이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것이 대부부분인데 모처럼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국제시장이라는 영화인데 ‘국제시장’은 실제 북한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의 노점들이 모여 만들어진 부산에 있는 시장입니다. 저도 거기서 태어났고,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호기심 반, 기대 반을 가지고 아내와 함께 영화를 관람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꼭 볼 영화라 생각합니다. 영화 ‘국제시장’은 대한민국의 헤아릴 수 없는 모질고 아픈 역사 중 단연 최악이랄 수 있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이별사 그리고 아버지 없는 가정의 장남으로 살아야 했던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웃음과 눈물을 버무려 만든 영화입니다.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때 한 가족이 피난길에 오르다 흥남부두에서 미군함정을 타기 위해 목숨을 건 행동을 합니다만, 가족 가운데 등에 업은 여동생을 바다에 떨어뜨립니다. 이 바람에 아버지는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장남인 덕수에게 입히면서?아버지가 없으면 네가 家長(가장)이다?는 말을 남기고 딸을 찾기 위해 바다 속을 뛰어 들어갑니다. 이게 아버지와 이 땅에서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맙니다. 천신만고 끝에 부산까지 내려가 국제시장에 고모가 운영하는 꽃분이네 직물가게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는 덕수는 어려서부터 구두닦이와 생선 괴짝을 만들며 살아가는데 남동생이 얼마나 공부를 잘하는지 결국 서울대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러나 생선괴짝 수만개를 만들어도 턱없는 동생 학비를 벌기위해 독일에 광부를 지원합니다. 말이 광부이지 지옥 같은 작업환경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돈을 법니다. 집도 마련하고 이젠 좀 사는가 해서 어렸을 적 소원이었던 마도로스(선장)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해양대학교 시험을 치르고 합격통지서를 받게 되지만 그 기쁨도 순간, 여동생 결혼문제와 가족들의 편안한 생활을 위해서 학교도 포기하고 독일에서의 모진고생을 함께 했던 아내의 만류를 애써 외면하고 전쟁터에 나가는 그 모습은 가난하고 못 살았던 우리들 세대와 아버지 세대의 애환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평생 자신의 인생도 꿈도 버리고 오직 가족의 행복과 가장이기에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고 생사의 현장을 넘나들었던 주인공 덕수의 인생이 바로 오늘을 있게 한 우리 아버지들의 세대요 또한 우리들 세대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즘 이 영화에 관객이 1000만이 넘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를 시사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요즘 우리나라의 가정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가정 붕괴가 너무 심각합니다. 그동안 버팀목처럼 생각하던 가족간의 희생이라든지, 견딤이라든지 하는 단어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너무 쉽게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자고 나면 사건이 터지는데 뭐,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고 자식을 죽였다... 아이를 버렸다,,, 이런 일을 보다 보면 우리의 가정이 정말 사랑이 고갈되고 말라버리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짧은 구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육’은 화목제사를 드릴 때 쓰는 좋은 고기로 만든 반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쓰인 제물은 언제나 최선의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흠 없고 온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가장 좋은 짐승을 제물로 잡아 바칩니다. 새번역 성경은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 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 그렇게 좋은 고기로 만든 최고급 반찬을 놓고 식사하는 가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가정에 행복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육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조건들을 상징한 말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이 조건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건강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건강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모릅니다.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결혼 조건에서도 돈을 얼마나 가졌는지를 따집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좋은 직장에 다니느냐 하는 것을 보는 것도 결국은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 계속해서 돈을 벌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런 조건이 우리의 삶에 어느 정도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기왕이면 건강한 것이 좋고, 기왕이면 돈에 여유가 있어 풍족하게 살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의 필수 조건은 아닙니다. 건강하고 돈이 많다 하더라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조건이 우리에게 행복을 담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그 행복을 잃는 때가 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한결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어느 순간에 건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도 어느 순간에 그 가진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건으로 인한 행복은 그 상황이 바뀌면 행복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없어도 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삶에, 우리의 가정에 행복을 만들어주는 것은 ‘조건’이 아니라 ‘화목’입니다. 마른 떡을 먹고 살아도 화목하면 그 가정에는 행복이 넘쳐납니다. 여기 ‘화목’(쉐레바)이라는 말은 ‘마음의 평정, 평안함, 고요함’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식구들의 마음이 평안함이 있을 때, 마음에 평정심을 유지할 때, 그 가정은 화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보세요. 여기 '마른 떡'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떡입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떡을 자주 만들어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곰팡이가 슬지 않도록 오래 보관해도 되게끔 마른 떡을 만들어 먹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산다 할지라도 화목하기만 하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돈이 가져다 주지 못하는, 어떤 조건이 가져다 주지 못하는 행복을 말합니다.


지난 1월 초에 서울 강남에 살고 있는 48세의 한 가장이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가 왜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스런 두 딸을 살해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외국계 IT기업에서 일하면서 상무의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는 분명 출세한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11억이 넘는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고, 통장에 3억이 넘는 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평생 행복할 것만 같은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정말 모두가 부러워하는 조건을 다 갖춘 가정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50세도 채 안된 나이에 직장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늘 아침마다 출근을 합니다. 원룸을 얻어서 주식에 투자했을 때 돈을 벌기는커녕 2억이 넘는 돈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그 상황을 이길 수 있는 평정심이 없었고 변화에 대처하면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가정을 파괴하는 비극을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찾아오는 어려움 속에서도 마음에 평정심을 유지하며 이후의 삶을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웠다면 그의 가정에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세상을 살며 환란을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얼마든지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파산을 당할 때도 있고, 사업이 실패할 때도 있고, 행복한 삶을 위해 결혼을 했지만 결국 갈라서야 하는 아픔도 있고, 사랑하는 이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도 있고, 아침에 멀쩡했던 아이가 불행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한치 앞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비극을 당하여 몸부림칠 때 하나님께서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을 바꾸어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로 빠져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같이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을 가랑잎처럼 흔들어 놓는 인생풍랑 가운데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한 분의 인격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분 앞에 선,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 생명이 코의 호흡에 붙어있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중에 죄인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있던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시고, 그 위에서 살으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죄사함의 은총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을 지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주의 영원한 나라에 면류관의 주인공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하신 그 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지금은 내가 나의 이 현실과 처한 환경 앞에 왜 이 어려움이 있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분께서 나의 머리털 하나까지라도 세신바 된 그 뿐께서 나의 작은 신음 마져도 응답하시기를 원하시는 그분께서 내가 당하는 고난의 현장에 그리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가운데도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평정심을 잃었을 때 우리에게 흔히 일어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다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다툼이 우리의 가정에 행복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며 산다 하더라도 다툼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싸움이 시작됩니다. 정말 싸울 거리가 아닌 것을 가지고 화를 내고 다투고 싸웁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대부분은 평정심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평정심을 잃었을 때 우리는 정상적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다툼과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자기주장이 일어나게 되고 양보가 없게 되면, 상상도 못할 결과가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롬5:10-11절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를 통해서 원수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입은 자들은 화해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8-19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 화목하게 하는 직책은 반드시 자기희생이 들어갑니다.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늘 변합니다. 수시로 변합니다. 때로는 좋은 방향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때로는 좋지 않는 방향으로 바뀝니다. 내 마음에 기쁨을 주는 일들도 생기지만, 때로는 결코 반갑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내 마음에 큰 고통을 주는 일도 일어나고, 내 삶을 어렵게 만드는 일도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서 평정심을 잃게 만들고, 그것이 결국 우리의 삶에서 행복을 앗아갑니다. 우리의 가정에 일어나는 그런 변화들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에서 평정심을 잃게 되면 우리의 가정에서 행복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영원히 동일하신 우리 주님을 모시고 살면, 삶에 일어난 변화 가운데서도 우리는 중심을 잡고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삶에 중심이 되시고 내 마음의 중심에 계시면 우리는 변화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살게 됩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구원의 감격, 하나님을 여전히 뜨겁게 사랑하는 구원의 감격이 우리의 가슴에 남아 있으면 우리는 삶에 일어난 수많은 변화에도 평정심을 갖게 됩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감격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언행에 거짓되거나 헛된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구원의 감격은 용서받는 감격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하늘나라 백성 삼아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늘 감격 속에 고백하며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만일 내 가족, 내 형제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에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내 영혼이 방황 때에도, 내가 상처를 입었을 때에도, 나를 여전히 품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용서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이 바로 가족입니다. 가정에서 먼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가정은 용서하는 장소입니다. 가족은 어떤 허물인든 덮어줄 수 있는 관계입니다. 가족 가운데서도 부부가 먼저 사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부부가 사랑하며 살 때 아이들도 부모님의 모습 속에서 사랑을 배웁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부부의 행복입니다.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에서 아이는 가장 사랑받는 아이로 성장하게 됩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 하면서 서로 다투기만 한다면 그 속에서 아이들은 좋은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부모에게서 용서를 경험한 아이가 나중에 용서하는 넓은 마음을 품은 아이로 성장하게 됩니다. 사랑과 용서는 내가 받은 것만큼 베풀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아빠에게 중학교 1학년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빠! 세계 3대 악처가 누구죠? 소크라테스 아내인 크산티페와 톨스토이의 아내인 소피아와 그리고 한 명이 누군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아요.”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트’라는 답을 몰랐던 아빠가 아들에게 알밤을 먹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임마! 네 엄마 이름도 몰라!” 과연 자신의 아내가 세계 3대 악처 중의 한 명일까요?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이 그렇게 만든 것이겠지요.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부메랑처럼 이 믿음과 사랑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오늘 요즘 1000만 관객을 울게 만든 국제시장을 이야기하며 시작을 했습니다. 고생 끝에 고모 가게를 인수하고 여동생 결혼도 시키고 그럭저럭 살고 있던 주인공 덕수에게 1983년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쓰나미가 몰아칩니다. 거기서 생사를 몰랐던 여동생을 찾게 됩니다. 미국으로 입양이 되어 그렇게 한 세월을 살았던 것입니다. 여 동생을 찾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주인공 덕수의 나이는 인생을 다 달린 할아버지가 됩니다. 설 명절 미국의 막순이네 가족까지 온 가족이 모인 덕수네 집은 북적대는 자녀들로 넘쳐나고 어린 손주 손녀들의 재롱으로 한껏 가족들의 분위기가 고조되는데 주인공은 혼자 안방으로 들어갑니다.

"네가 이제 가장이다"하면서 아버지가 입혀주었던 외투를 꺼내 방 바닥에 놓고 아버지 사진을 바라보면서 ?아버지 이 정도면 가장 노릇 잘 한거지요? 막순이도 찾았어요! 아버지! 정말 힘들었어요.?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 장면에서 참았던 눈물이 퍽터지는데 뭐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이 정도면 가장 노릇 잘 한거지요? 막순이도 찾았어요! 아버지! 정말 힘들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신 이유는 우리가 가정을 통해서 하늘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는데, 그 행복을 가장 먼저 맛볼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사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우리의 조건이 남들보다 더 낫기 때문에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에 화목함이 있을 때 우리의 가정은 행복해집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살 때 하늘의 기쁨을 늘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 평정심은 우리의 의지나 감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 때 그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고 구원의 감격을 갖고 살 때 우리의 가정에는 행복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안고 사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행복을 만들어갑니다. 그게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용서하며 사십시다. 가정에서부터 서로 사랑을 실천하며 사십시다. 가정에서부터 구원의 기쁨이 가득하게 만드는 삶을 사십시다. - 사랑의 향기가 넘치는 곳 - 가정입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내 가정에서 내 가족부터 소중하게 여김으로 내 가정에 행복이 회복되는 한 해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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