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올라가라 창35:1-7. 2015년 1월 11일 주일 낮 예배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1-11 |
조회: 1687
목사가 설교를 한마디 하면 그 한마디 한마디를 따라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미국에 가보면 특히 역동적인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교회가 그렇게 예배드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교회에서 한 목사님이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다같이 화답합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헌신해야 합니다.”
“교회는 걸어야 합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교회는 걸어야 합니다.”
“교회는 뛰어야 합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교회는 뛰어야 합니다.”
“교회는 날아야 합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교회는 날아야 합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한 껏 고무된 목소리로 목청을 높여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돈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 헌금이 필요합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조용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한 구석에서 한 성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걸읍시다. 그냥 걸어야 합니다.” ^^
- 자, 이 유머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믿음을 고백하기는 쉽지만 믿음의 결단대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믿음의 결단대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의 결단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하는 본문의 내용을 보면, 세겜 땅에 머물던 야곱의 가정이 감당치 못할 풍파가 몰아쳤습니다. 사랑하는 외동딸인 디나가 이방 남자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동생에 이 수치스러운 사실을 안 오빠들은 동생을 강간한 자뿐 아니라 세겜의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는 복수극을 벌입니다. 이 일로 인해 가나안에 있는 이방 사람들이 야곱의 가족을 몰살시키려는 위기에 봉착합니다.
지금 야곱은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처해 있습니다. 아들들이 세겜 땅에서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바람에, 그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 한 성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렸습니다. 남자들은 전부 죽여 버렸고 아이와 여자와 재산은 모조리 빼앗아 왔습니다.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는 미친 사람일 것입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빨리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요단 강을 건너 하란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애굽으로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혹시 간다고 해도 도중에 습격을 당해 죽을 확률이 컸습니다. 세일 땅으로 가서 에서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수 있었지만, 사실은 에서도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가나안 땅으로 오긴 왔지만, 도저히 여기에서 살 수 없는 곤경에 부닥치고 말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5: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한테는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지느러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반드시 이 땅 위 어느 사회에 소속해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어떤 어려움이 생겨서 도무지 자기가 속해 있는 그 사회에 발 붙이고 살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카드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대금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자꾸 마시다 보니 나중에는 수천만원으로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택한 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살이었습니다. 외상값을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으니까 그냥 자살해 버렸어요. 더구나 야곱의 아들들은 단순히 외상 술을 마신 정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습니다. 한 성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고서도 거기에서 발붙이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도 아니지요.
야곱은 가나안 땅에서 살 길이 없었습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가나안 사람들과 싸우다 죽느냐, 잡혀서 죽느냐 둘 중에 하나밖에 없었어요.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은 바늘 구멍만큼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야곱에게 들렸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야곱이 에서를 피해서 도망치다가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는 바로 그 벧엘이라는 곳으로 가서, 그 때 그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단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 벧엘로 올라가라고 한 것입니까? 이는 그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던 것을 다시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다 같이 읽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여기 '환난'하면 날마다 신앙 때문에 쫓겨 다니면서 핍박당하는 것을 연상하기 마련인데, 원래의 뜻은 뜻밖의 불행한 일을 만나서 근심과 불안에 싸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환난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뜻밖의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위기 앞에서 고통하고 고민하고 근심할 때가 자주 있지 않습니까?
야곱은 그 동안 하나님의 도움은 별로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때도 자기의 지혜를 썼고, 아내를 얻을 때도 자기가 14년 간 애써서 얻었습니다. 거부가 되어 고향에 돌아갈 때도 삼촌의 집에서 자기가 노력했고, 자기가 머리를 잘 써서 삼촌의 재산이 자기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형 에서가 죽이러 왔을 때도 에서와 잘 이야기해서, 결국 자기의 지혜로 원수 관계가 풀어지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자기의 노력과 애씀과 재치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가정에 일어난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났을 때,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베여 들었습니다. 자신의 딸이 강간을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더욱 힘든 것은 자기의 아들들 내면속에 있는 잔인함,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보다 더 잔인하게 행하는 복수극을 보면서 야곱은 깊은 회의를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의 결과란 말인가? 이것이 내가 얻기 위해서 추구하고 또 추구했던 결과란 말인가?’ 마음속에 깊은 생각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자녀들을 나무라지만, 자녀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나요? 오히려 대꾸합니다. 일일로 더군다나 그 지역에 있는 다른 족속들이 야곱의 집을 공격해 오리라는 것은 눈에 보듯 뻔한 사실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야곱은 피할 곳이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삶의 결과가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과 더불어, 자녀들에게 기댈 수도 없고, 이방 민족으로 부터도 피할 곳이 없는 그 때에, 하나님은 그를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한번 택한 내 인생 절대로 용도 폐기 처분용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1절에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잊혀졌던 한 가지를 기억하게 해 줍니다. “형의 칼을 피해서 도망갈 때 제단을 쌓았던 그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서 거하라” 라는 주 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피할 길을 또 열어주신 것을 봅니다. 그때서야 비로서 잊혀졌던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누렸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창세기 28장에 약속하신 그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축복이라는 사실을 드디어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야곱이 아바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가지고 도망칠 때, 루스라하는 벧엘에서 쓰러져 잠을 잘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창28:14-15절에 “네 자손이 땅에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 16절은 그때 야곱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처음에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감격 속에 살았던 우리들, 그런데 점점 그 예배가 지루해지고 시간낭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만나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 야곱도 그랬습니다. 에서의 추격을 피해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도망치던 시절, 그는 루스라는 한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습니다. 여기에 대해 야곱은 창28:20-22절에서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생각해 보세요! 벧엘에서 서원했던 그 일이 벌써 30년이 가까이 지난 거예요. 그동안 서원한 것을 새까맣게 잊은 겁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잘 될 때는 내 잘난 맛에 거드럭거리고 살아갑니다만,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니까 비로서 자기를 돌아보면서 얼마나 자신이 교만하게 살았는가를 안 것입니다. 여기 “벧엘로 올라가라"는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올라가라’는 말은 지형적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거룩한 장소로 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야곱에게 이제는 하나님께 가까이 오라는 겁니다.
2. 이제 그는 가족을 모으고 중요한 결단을 합니다.
2절입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지금 야곱은 식구들에게 그 말씀을 전달하는데 아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먼저 우상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결하게 하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영적으로 육적으로 더러운 모든 것을 청산하라는 겁니다. 대청소하고 성결을 유지하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자세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사실 야곱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인 벧엘로 가는 길에 이 세겜에 들렀다가 여기 주저앉은 겁니다. 학자들은 이 기간이 한 10년 정도로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수완이 뛰어난 야곱의 눈에 이 세겜은 황금의 땅입니다. 여기서 벧엘로 올라갈 것을 사는 동안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마냥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야곱은 천년만년 세겜의 숙곳이란 곳에 둥지를 틀고 사는 재미에 빠져 있을 때 이 환난이 난 것입니다. 그것이 ‘디나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보금자리 속에서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 정도면 행복해. 나는 더 이상 바라지도 않아. 나는 만족해.“ 하며 꿈같은 세상을 보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이 이상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음속에 몹시 불안한 감정이 일어나서 잠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업이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부부간에 심각한 문제가 개입될 때도 있습니다. 자녀에게 부모가 원치 않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자기 자녀로 선택해 놓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나의 삶의 보금자리를 흩어 놓을 때가 많습니다. 이는 세상의 잔에 취해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을 끌어내어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개가 세상 적으로 형통하면 이런 시험이 옵니다. 주님은 무엇이라 경고합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절대로 굴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가끔 보면 우리 가운데 영적 위기를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를 하나님이 깨우시는 날이 옵니다. 우리의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는 날입니다. 흩으시는 것입니다.
3. 이제 야곱은 모든 익숙한 것과 소유를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4절에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야곱은 여기 보세요. 썩어도 준치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날라리, 나이롱 신자라고 해도 그래도 뼈대는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녀들과 아내가 지금 무엇을 들고 나옵니까?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여기 상상치도 못한 우상들이 그들의 손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특히 아내 라헬은 아버지 집에서 나올 때 아버지가 신주 모시듯 하는 ‘드라빔’을 훔쳐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문제가 터지고 보니까 모양만, 무늬만 예수 믿는 빗깔이지 전혀 예수와 상관이 없는 이방 사람의 문화에 젖어 있는 야곱의 가정을 보게 됩니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것은 야곱 가정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제대로 신앙생활 합니까? 오늘 우리의 가장 큰 문제,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의 걸림돌 역시 우상입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보다 더 집착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은 나의 관심과 정성을 다 뺏아 갑니다. 계속 집중하게 하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모두가 나름대로 하나 이상의 우상을 간직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만은 포기 할수 없다. 이것만은 버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이 우상은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것만 건드리면,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것, 그 순간 하나님도 온데간데없어지는 바로 그것,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땅에 던져 묻으라는 것입니다. 마치 구제역에 걸린 생축을 미련없이 땅에 묻는 것처럼 결단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특별히 오늘 현대인들에게 ‘물질’은 무서우리만큼 집요하게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보여도 결정적인 순간에 돈의 위력 앞에 직분, 신앙의 연조, 주일 성수도 소용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그렇게 믿음 좋아 보이던 사람들이 돈에 걸려서 얼마나 많이 넘어 집니까? 아니, 교회 자체가 돈 때문에 흔들리는 실정입니다. 주님보다 더 관심을 갖고 더 집착하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지금 야곱이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은 것은 단순히 이방 신상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이방 신상과 함께 자신의 가슴 아픈 과거를 함께 묻었습니다. 세겜에서 사랑하는 딸이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오직 하나밖에 없는 딸입니다. 시집가야 할 딸이 강제로 추행을 당하고 만 사건은 딸 디나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 전부에게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세겜을 떠나오면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신상과 귀고리를 묻었다는 말은, 그런 가슴 아픈 과거를 함께 묻었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겜을 떠나면서 야곱이 가슴 아픈 과거를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버린 것처럼, 우리도 지난 삶에 겪었던 슬프고 괴로웠던 일들, 가슴 아팠던 일들을 모두 묻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실패하고 괴로웠던 일들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실수와 실패는 빨리는 잊는 게 유익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자꾸만 되살아난다면 우리는 그 때마다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쓰라린 과거 때문에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또 다시 고통의 쓴잔을 마셔야 합니다.
자! 여러분! 5절을 보세요. “그들이 (떠났으나)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여기 발행이란 단어는 ‘날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상상이 갑니까? 도무지 일어설 것 같지 않던 야곱의 가정이 마치 독수리가 솟구쳐 오르는 듯한 힘찬 모습으로 세겜을 벗어납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당시 야곱이 두려워했던 이방 사람들이 오히려 야곱의 가족을 두려워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은혜요. 이것이 축복입니다.
6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 무슨 말이에요? 드디어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벧엘로 돌아온 것입니다. 믿음의 결단대로 살고자 다시 벨엘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났기 때문입니다. 9절 보세요.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렇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사람들에게 강간을 당한 후 야곱의 아들들이 보복을 해 더 이상 세겜에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분노로 인해 시원하게 보복했지만 보복 후의 두려움을 감당할 길이 없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놓였을 때, 야곱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환란 날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지금 또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이 야곱의 믿음을 다시 일깨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벧엘로 돌아오자마자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만나기 위해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 벧엘=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결단대로 살기 위해서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찬양을 부르고 소리쳐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만나지 못했다면 믿음의 결단대로 사는 삶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의 결단대로 사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가 살아가야 할 2015년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정말 정말 힘든 한해가 될 것입니다. 인생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 필요한 생각과 사고와 가치관을 우리는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것이 나를 존재케 했던 것이었더라도, 하나님 앞에 서는 벧엘로 가기에,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다시 버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나중에 시간 내서 정리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우상을 꺼냅시다. 무엇이 나를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답답하게 만들었는지,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를 싫어하시게 만들었는지, 그 모든 더러운 습관과 취미들을 꺼내서 파묻고, 가장 낮은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합시다.
버린 만큼 삶을 채워주십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면서 어떤 역사가 일어났는가 보니, 요셉을 하나님의 역사무대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12아들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게 한 구체적인 영적 훈련이 바로 벧엘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는 인생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주의 은혜로 늘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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