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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요일4:7-11. 2015년 1월 4일 주일 설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1-04 | 조회: 1754
1936년 12월 11일, 영국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8세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나는 지금 이 시간 국왕 자리를 포기한다'고 하였습니다.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에 이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임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왕이 된지 1년밖에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왕의 자리를 내려놓는 이유가 뭐냐면 '내가 왕의 자리를 포기하는 것은 내 사랑하는 여인 월리스 심슨과 결혼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발표한 것입니다. 심슨이라는 여인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여인이 어떤 분이기에 국왕의 자리를 내놓을 만큼, 그런 결단을 했습니까?

영국은 국왕도 교회법을 지켜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교회법이 모든 법 위에 있습니다. 의회도 교회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국왕이 결혼을 할 때는 이혼한 부인과는 결혼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심슨이라고 하는 부인은 미국 여자인데 결혼을 두 번이나 한 분이었습니다. 도무지 결혼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에드워드 8세는 대영제국의 왕입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그 강한 나라의 국왕이, 결혼도 안한 총각이 심슨을 사랑한다 해도 어려운데 왕의 자리를 포기할 정도로 심슨을 사랑한다는 거예요. 심슨도 너무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거절하고 본인이 반대했지만 에드워드 8세가 자살하려고 합니다. 얼마나 대단한지 결국 그래서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고 왕궁을 떠나서 조용한 곳에 가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학전집에나 나올 이런 이야기는 인류역사에 다시없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것은 영국을 버리는 게 아니에요. 하늘의 영광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혼한 여인이 아니에요. 죄 많은 우리를 사랑할 수 없으니까, 하나 될 수 없으니까 우리 죄를 위하여 당신이 죽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와 하나 되도록,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삶이 되도록 주님이 일방적으로 나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신 거예요.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역사에 최고의 복음이요 기쁨이요 소망입니다. 이 이상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사랑과 다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 마지막이 상처와 이별과 아픔으로 끝나는 사랑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사랑은 구원입니다. 그 사랑은 생명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언제까지나 가슴속에 머물면서 살아 역사하는 힘이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의 삶을 변화시켰던 그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입니다.

10절 말씀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라는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즉 언어나 관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난 사랑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한 공개적인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또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저의 막둥이가 중학교에 들어 갈 때 아이를 가방을 사주기 위해 시내로 나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우연히 길거리에서 4살이 채 안된 어린 아이를 야단치는 엄마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들은 그 어머니의 말 “난 너하고 다니면 굉장히 창피해, 왜 밖에만 나오면 엄마말도 듣지 않고 네 맘대로 하려고 그러니? 너하고 있으면 너무나 창피해!”가 제 가슴속에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하나님 앞에 제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일을 잘하지 못합니다. 실패도 자주 하고, 하라고 명하신 일을 거역하기도 잘합니다. 심지어 사탄이 보기에 죄를 행하고 나아가서 사람들 보기에도 부끄러운 일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사탄이 주님께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안두익이라는 저 친구, 저렇게 퍼주어도 퍼주어도 소용없는데 왜 사랑하시지요? 죄 짓고 회개했으면 그만해야지 늘 같은 생활 반복하는 어리석은 저 인간을 왜 그토록 사랑하죠? 하나님 실수하셨어요. 저 보세요! 오늘도 하나님 것보다는 자기 것 찾는 저 비뚤어진 마음 좀 보세요. 투자가치가 있나요? 하나님 실수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두익! 난 너를 보면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해. 내가 너를 얼마큼 사랑해야 네가 정신을 차리니? 내 아들까지 주었는데 너는 아직도 그 옛날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니? 옛날 회개했던 것을 오늘 또 회개해야 하는 네가 나는 정말 역겹고 지겨워! 너를 보면 정말 천사들과 마귀 앞에서 부끄러워 죽겠어!”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난 네가 죄를 지을 때 슬퍼하면서 너를 사랑해! 난 네가 믿음 안에서 살 때 기뻐하면서 너를 사랑해! 난 한번도 너를 버린 적이 없고, 한번도 너를 귀찮게 여긴 적이 없고, 한번도 너를 무시한 적이 없고, 한번도 너를 모른 척 한 적이 없단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 사랑의 사도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랑의 사도가 아닙니다. 우레의 이들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과격한 성격을 가진 자입니다. 그렇지만, 나중엔 사랑의 시도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지금 오늘 본문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여기에 참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7절에 ‘사랑은 하나님께 속했다’ 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도 사랑을 말하지만 다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말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하나라서 구분이 없지만, 헬라어에는 여러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사도 요한이 지금 말씀하고 있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요한 일서에 보시면 아가페라는 단어가 동사로 동사형 아가파오라는 단어로 28번 또 명사로 18번이나 등장합니다. 아가페 사랑은 한 마디로 말하면 주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 조건을 넘어서는 사랑, 타산이 없는 따지지 않는 사랑, 철저하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할 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 이것이 아가페적 사랑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을 때 우리는 모 두 이 사랑을 접한 것 입니다. 처음으로 가장 순결하고 가장 고귀한 그런 사랑을 우리는 체험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경험했던 이 사랑은 그냥 정지된 사랑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은 우리 안에서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요한은 3:1절에 이 사랑을 뭐라고 고백을 하는 지 아십니까?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아마 성경기자들 가운데 사도 요한 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강도 있게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특별히 '어떠한 사랑'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얼핏보기에는 매우 단순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어를 살펴보면 절대 단순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이란 말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놀라움과 경탄을 표현할 때 잘 쓰입니다. 마태복음 8장 27절에 보면 예수님이 풍랑이는 호수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자 함께 있던 제자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바람과 바다가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잠잠해진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그들은 '어떠한'이라는 말을 써서 놀라움과 경탄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신을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을 다 담아 낼 수 있는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모든 언어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놀라움과 감격만을 담아서 '어떠한' 사랑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떠한 사랑이라는 단순한 표현에서도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해 얼마나 감격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푸사'라는 표현도 그렇습니다. 우리 한글 성경이 너무나 단순하게 번역을 해놓아서 주고받는다 할 때의 그런 단순한 의미만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베푸사'라는 표현보다 '샤워하다(shower)'라는 표현이 원문의 뜻을 드러내는 데 보다 적절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샤워하면 흔히 몸을 씻는 것을 연상하기가 쉽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런 샤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폭우가 쏟아져 내릴 때 바깥에 나가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그 때는 비옷이나 우산이 비를 막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온몸이 흠뻑 젖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폭우와 같이 우리에게 쏟아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 발버둥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써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또 자녀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사랑에 감격하여 "보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사랑을 폭우같이 넘치게 부어 주셨는가!"라며 흥분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는 이 진짜 사랑에 부딪혀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됩니다. 짝퉁 사랑, 병든 사랑, 함량 부족의 사랑으로 지친 영혼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늘 배고픈 허기진 마음에 안식이 찾아옵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녹아지는 경험이 일어나면 봉사하라 마라 말할 것도 없습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라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누가 나를 사랑하니 하지 않니 원망하고 시비하던 것도 다 사라집니다. 내 삶이 변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만나지 못한 것은 자동차로 친다면 시동이 안 걸린 것입니다. 자동차를 밀고 다닐 수는 있지만 오래 못 갑니다. 신앙생활도 이 자동차를 밀고 가는 것처럼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 사랑에 빠지면 주일이 기다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연서 같고, 내 안의 미움도 내 힘으로는 없앨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내 가슴에 밀려오면 그 미움, 증오, 짜증도 전부 사라집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수의사는 개만 보고도 생면부지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대충 안다고 합니다. 주인에게 사랑받는 개는 눈빛부터 다릅니다. 올드미스가 애인이 생기면 부드러워집니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밥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돈도 아닙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다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르게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살아도 진짜 사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만나면 고기가 물을 만난 것 같이 펄펄 뛸 것입니다.

인생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바로 이 사랑을 갈망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만나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시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 앞에 잠잠히 나아가는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물밀 듯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이제 이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사랑을 알았다면,




둘째로.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웃들에게도 이 사랑을 나타내야 하지 않습니까?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우리를 이같이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 ‘마땅하다’는 ‘헬 오민’이라는 단어는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분명히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것이 의뭅니다. 사랑은 의무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합니다. 자 우리가 순종하는 과정에서 뭐가 필요할까요? 수고가 필요해요 사랑은 수고를 요청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기를 원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 속에 있어요. 교회 나가고 예수 믿는데 사랑해야겠다 이런 마음이 왜 없겠어요? 그런 마음은 있어요.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서 왜 사랑의 열매가 맺혀지지 않을까요 사랑의 수고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칭찬할 때 그들에게 사랑의 수고가 있다는 것을 칭찬 했습니다. 사랑의 수고 우리의 사랑이 열매를 맺을려면 반드시 수고라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런데 우리는 열매를 원하지만 수고라는 과정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큰사랑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눅6:35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사랑은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로 사랑 받고 자기 이기적으로 좋아하는 이런 사랑이 아니에요. 이 사랑은 모욕하는 자는 기도해 주고 저주하는 자는 축복해주고 나를 미워하는 자는 극진히 선대해 주고 원수도 사랑하고 대접해 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행복한 거예요. 어떤 장애물도 없어요. 영원히 영원히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미워하면 미움에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행복할 수 있습니까? 미움의 열매는 큰 사고와 불행까지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누구의 허물도 보이지 않습니다. 벧전4:8절에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허다한 죄가 보이질 않습니다. 남의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 허물이 크고 내 허물이 많을 뿐 누구의 허물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누구도 사랑하게 되고 누구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누구의 사랑이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주님의 사랑을 찾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 세상은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등에 한 번 업혀 살아보십시오. 주님의 손을 한 번 잡아 보십시오. 주 예수의 흘리신 보혈의 그 크신 사랑을 한 번 깨달아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려면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성경공부를 천 년을 해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성도는 당신이 계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행복이 여기 있습니다. 성도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 일평생 사는 삶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할 때에 우리는 눈을 뜨게 됩니다. 일어서게 됩니다. 힘있고 능력 있는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라는 신학자는 재미난 표현을 했습니다. 아마 이 이야기는 여기 모인 우리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경험한 최대의 사건은 요한3:16에서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의 사건일 것입니다. 이 소중한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그들이 바로 여러분과 제가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3:16을 경험하고 이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얼마나 요일3:16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라는 신학자는 요한3:16을 체험한 모든 성도들이 요일 3:16에 순종하고 있지 않는 한 아직 그의 믿음의 삶은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일3:16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어지는 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구원의 복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들끼리 말 먹고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과 세상을 향해 복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의 목적이 바로 복의 근원(=복의 통로)이 되게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축복의 웅덩이가 아닙니다. 흘려보내는 축복의 시냇물입니다.

작고하신 기독교 철학자로 라브리 운동을 하신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을 가르쳐 그리스도의 '제자의 뱃지'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철야기도를 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뱃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달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성경지식을 보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지식도 우리의 뱃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모든 것이 조건적이고 이기적인 세상에서 아직도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이 존재하는가에 세상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교회에서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는 “서로 사랑하며 섬김을 통해 세상을 섬기는 세상을 변화 시키는 공동체”란 표어를 가지고 이 한해를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프러포즈입니다. 하나님의 애타는 구애입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나를 위해 죽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나를 살리셨습니다. 그 사랑이 나를 구원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도 나의 사랑을 거부할 거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에 아멘 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겨나면 그때부터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넉넉하게 하고, 자유하게 하고, 모든 고통에서 살 소망이 되며, 능력 있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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