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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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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의 인생 신34:1-8. 2014년 12월28일 송년 설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12-28 | 조회: 1513
우리는 지금 한해가 저물어가는 2014년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이란 단어가 그렇게 좋은 이미지를 주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를 거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연말이 되면 늘 느끼는 바입니다만 세월이 정말 빠릅니다. 「2014」란 숫자를 낯설어하면서 한 해를 시작하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52주가 다 흘러 오늘 송년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친숙해진 2014년이란 연도를 사용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빨리 흘러가다 보면 한 해가 끝나듯이 우리 인생도 언젠가 끝나겠지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면 저절로 마음의 옷깃이 여며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 보면 모세가 그토록 갈망하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서게 됩니다. 본문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 편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이스라엘 최북단)까지 보이시고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 까지 보이시고”

여기 비스가산은 해발 850M가 되는 꼭대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가장 높은 산입니다. 여기서 가나안 땅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셨던 땅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대망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430년 동안이나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왔던 지도자 모세에게 있어서의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또 달리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멀리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모세는 지난 날 자신이 살아왔던 파란만장한 삶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갔을 것입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40년 동안 호의호식하면서 자라던 일, 민정을 시찰하다가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는 애굽인을 보고 참을 수 없어 그를 쳐 죽였던 일, 그 일이 탄로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쳤던 일,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 딸 십보라와 결혼을 하고 40년 동안 양치기 생활을 했던 일, 그러다가 어느 날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지팡이 하나를 들고 애굽왕 바로에게 도전했던 일, 열 가지 재앙들, 홍해를 건넜던 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리방황하였던 일, 때로는 물이 없다고, 때로는 양식이 없다고, 때로는 고기가 먹고 싶다고 원망 불평을 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죽이려고까지 했던 일 등등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여기 오신 교우 여러분 가운데는 새로운 한 해를 맞는 각자가 느끼는 것도 다양할 것이고, 또 생각하는 것도 많은 차이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특별히 여러분 각자가 처한 형편이 어떤가에 따라서 많이 달라집니다. 건강하고 형통한 사람은 밝은 눈으로 새해를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병들고 실패하고 좌절감에 빠져 있는 분들은 세월이 흐르는 것이 더없이 처량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또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해서 이 한해에 많은 걱정들이 쏟아져 들어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한 나이로 보아서 어떤 연령에 지금 속해 있느냐에 따라 한 해를 보내고 맞는 감정이 틀립니다. 젊은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 나이가 든 사람들이 새해를 맞는 모습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또 어떤 연령층에 속했든지 간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함께 받을 수 있는 귀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보시면 그 날이 오기를 40년 동안 오매불망 학수고대 해 왔던 모세였을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그 한이 맺히고 피가 맺힌 꿈이 거의 다 이루어져 가나안 복지를 코앞에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모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아마도 우리들 같은 보통 사람이었더라면 틀림없이 '하나님 세상에 그럴 수가 있습니까? 바로 저 땅에서 태평 성세를 누리고자 이 엄청난 고난의 언덕길을 넘어 왔는데, 왜 건너가지 못한단 말씀입니까? 하나님 해도 너무 하십니다' 하면서 크게 원망했을 법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가나안까지 이끌어가는 모세는 누가 뭐래도 광야 여정 길에 최고의 지도자요 일등공신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이 가나안 땅을 밟지 못했습니까?




첫째는 인생은 미완성의 삶임을 보여 줍니다.

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고 말씀을 합니다. “건너가지 못한다” 참 서운한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그토록 충성했는데 서운할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배워야할 지혜는 무엇보다 내 인생에게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여기 아마 40대 이상의 분들은 어린 시절 동네 한 구석진 마당이나 아니면 동네 학교 마당에 한 구획을 정하고 방과 후 친구들과 어울려 해가 저물 때까지 공놀이, 자치기, 줄넘기, 땅 뺏기, 숨박꼭질 게임을 하고 놀던 추억을 안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맨 처음 전도사로 부임한 교회는 마당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하교 길이 되면 국민 학생들이 올라와서 교회 마당에서 놀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심방을 하고 오니까 학생들이 교회 마당에서 땅따먹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네모난 선을 긋고 뼘을 그려 놓고 병 뚜껑을 뚱겨서 가는 곳에 선을 긋고 3번에 뼘 안으로 들어오면 자기 땅이 되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이 놀이를 하다가 싸움이 생겼습니다. 서로 밀고 당기고 이 땅은 내 땅이다, 이 땅은 내가 딴 땅이다 하며 싸움이 생겼습니다. 깔리고 깔고 하다가 피가 흐르는 심한 싸움판이 벌어졌습니다. 이 시끄러운 소리에 교회 사찰 집사님이 빗자루를 등 뒤에 숨기고 와서 전도사님 어쩔까요 쓸어버릴까요 하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한참 내 땅이라고 싸우는데 집사님이 빗자루를 들고 썩썩 쓸면서 “야! 이놈들아 어찌하여 이 땅이 너희들 땅이냐 교회 당이지” 하며 다 쓸어 버렸습니다. 서로 자기 땅이라고 싸우던 이들은 멍하니 섰다가 툴툴 털고 내려갔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우리 역시 어느 날 인생의 놀이터에서 해 저무는 줄 모르고 게임에 분주한 우리에게 저 하늘에 계신 분이 “그만 놀고 집으로 오너라”고 부르실 순간이 온다는 자각이었습니다. 거기에 누가 항변을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여기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여호수아를 불러서 그에게 안수하고 모세는 느보산에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후진에게 길을 열어주고 자신은 과감하게 물러난 것입니다. 더군다나 성경에는 모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왜 모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했을까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웅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때문에 만약에 모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면 아마도 모세는 죽어서 까지도 마치 우상처럼 백성들의 섬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봐 두려워서 이스라엘은 모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기꺼이 따랐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 인물이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기 위해서 산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과감하게 모든 것을 뒤로하고 여호수아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청기지의 삶입니다. ‘청지기’라는 더 실용적이고 더 감동적인 정신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청지기가 무엇입니까? 청지기는 주인이 자기가 아닌 관리자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는 주인의 뜻을 따라 주인이 맡긴 것을 일시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우주 만물을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청지기는 자기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무소유의 사람이 아니라, 맡은 자로 주인의 뜻을 실현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자신이 청지기임을 잊고 자신을 주인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욕이 아닌 야욕을 위해 맡겨진 것을 사용하는 타락이 우리를 추하고 슬프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주인의 임재 안에서 매 순간 순간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즉 죽도록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습니까? 사랑에 눈이 먼 연인들에게는 둘이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살집이 좀 작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찮습니다. 고생을 해도, 욕을 먹어도 견딜 수기 있습니다. 그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같은 원리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세상에 이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행복이 마음속에 담겨 있어야합니다.



둘째로 모세는 아름다운 영혼의 모습으로 떠났습니다.

여러분, 모세의 모습을 보십시오. 떠나가는 그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7절.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 하였더라” 그가 육신적으로 강건했다는 겁니다. 혹자는 이 말씀을 보면서 “아, 저 정도면 더 살 수도 있었을 텐데 ... ” 하면서 아쉬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충분히 자기 수명을 살고도 건강한 모습으로 따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겁니까?

그런데 모세에게 있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인격과 영혼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10절(하). “ ...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 ” 그의 영혼이 얼마나 투명하고 맑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깊은 기도 생활을 통해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깊이 만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민12:3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민수기를 모세가 썼지만 이것은 모세 자신의 자화자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겁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온유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본래는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40세 때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기도 했습니다. 성급하고 과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계속 낮아지고 낮아져서 겸손하고 온유한 인격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한해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삶의 모든 것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만큼 닮아 가고 계십니까? 내 삶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지고, 사람들이 나를 보면 그리스도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나요? 과연 내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오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나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음식이 있습니다. 오래 묵힐수록 맛이 깊어지는 음식이 있습니다. 묵은지나 장독에 묻어둔 장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음식들은 오래 될수록 썩어서 먹을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그 인격이 숙성되어 푸근함이 묻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그 품에 안기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영적인 삶이 안되면 인격이 천박해 지고 악취가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책을 보고 예수를 믿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보고 예수를 믿는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먼저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편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성품으로, 우리의 습관이나 언어생활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셋째 모세는 아름다운 이별의 모습으로 떠났습니다.

모세가 떠나갈 때, 그리고 떠난 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백성들이 슬피 울며 애도하였습니다. 8절.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맞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여러분, 모세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성경을 통해 쭉 정리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습니까? 백성들의 반역과 핍박, 심지어 모세를 죽이려고 달려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끊임없이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끊임없이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면서 고운 정도 미운 정도 깊이 들었습니다. 그도 떠날 때 백성들과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웠을 겁니다. 백성들도 떠나가는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울며불며 30일 동안이나 애곡합니다. 아름다운 이별의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평가입니까? 나의 쾌락과 즐거움입니까? 모세처럼,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주님 뜻 이뤄드리고자 겪는 현재 나의 고난과 고통을 아신다는 것을 잊지 않고 그 가운데서도 영원한 상 주실 것을 확신하며 살아간다면 잠시잠깐 지나가는 이 땅의 희생과 수고는 허무하거나 의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관심이 머물러있는 백성과 함께 고난과 고통 받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생각했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땅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과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말은 내 말이 아닙니다. 이오니카 선교사로 떠났다가 꽃 한번 피지 못한 채 순교한 짐, 엘리어트의 이야기입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에 인생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도, 부도, 명성도, 성공도, 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설령 내가 그것을 누렸다 할찌라도 바닷물을 들이키듯 갈증만 더 날 뿐입니다. 그러나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붙잡고 계신 예수 바로 나의 주님입니다. ‘젊음’은 지나갑니다. ‘명예’도 지나갑니다. ‘인간적인 야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주 앞에 마지막에 순결하게 서기 위해,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으로 주 앞에서는 놓칠 수 없는 마지막 영광을 위해 세상 적인 잣대를 포기하는 자, 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공생애를 시작을 하시기전에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고 나니까 사탄이 찾아와 제안을 합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와서 발을 붙들어 줄테니 염려하지 말고 뛰어내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놀라게 될 것이고 예수님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이 사탄의 주장이었습니다. 얼마나 그럴싸한 이야기입니까?

성전에서 뛰어내리고 천사들이 와서 발을 붙들어 주는 일은 신기한 일이기는 하지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을 해서 얻어지는 영광은 헛된 영광으로 끝까지 붙잡아 둘 수 있는 참된 영광은 아닙니다. 사탄은 끝까지 붙잡아 둘 수 없는 헛된 영광을 예수님으로 하여금 붙잡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십자가를 놓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끝까지 붙들 수 없는 헛된 영광을 버리고 결코 놓칠 수 없는 십자가를 붙잡으심으로 사탄에 대하여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모세의 마지막 떠나가는 뒷모습이 ... 저는 정말 부럽습니다. “아! 나도 저렇게 살다가 저렇게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에 솟구치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한 해를 뒤로 하고 떠나가는 나의 뒷모습이 어떤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그것이 장차 하나님이 부르실 때 떠나갈 ‘나의 뒷모습’에 대한 예고편인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만족하십니까? 모세 같은, 아니 비슷하게나마 아름다운 뒷모습입니까? 그렇다면 더 아름답게 가꾸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혹시 나 자신조차 안타깝게 여길 만큼 부족한 모습입니까? 그래도 아직은 괜찮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시간을 더 주셨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있고, 남은 생애가 있습니다. 부디 한 해를 뒤로 하고 또 다른 한 해를 향해 나아가는 송년의 계절에 뒷모습이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 하리라 새롭게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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