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반응마2:1-12. 2014년 12월21일 성탄 주일 예배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12-21 |
조회: 1300
이제 연말이 되면 한해 동안 일어난 국내, 국외의 사건들 가운데 10대 뉴스를 선정하여 발표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놀라는 것이 당시에는 엄청나게 느껴진 사건들을 너무 쉽게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통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큰 사건이 일어나도 자기와 관련이 없으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자기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사건에는 특별하게 영향을 받지 않음으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자기와 연결되거나 자기의 이익과 관련이 있으면 그 일은 엄청난 바람과 태풍이 되어 우리를 강타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입니다.
요즘 불황 속에서도 엄청난 소설계에 바람을 일으키는 여류 소설가가 있습니다. 가정이 깨어지는 아픔을 경험한 그 소설가는 어느 날 자신의 전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속에 가장 처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내 머리채를 잡고 모욕을 주던 그 남자의 모습이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아쉬움이 아니라 자신에게 모욕을 주었던 모습이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어느 기자와 인터뷰에서 “인간을 용서하기가 정말 힘들더군요. 그러다보니 기도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 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한생을 함께 살다가 헤어질 때, 그 상처가 모든 아름다운 것을 다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한 사람의 죽음보다는 자신과의 연결된 작은 사건하나가 더 크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신앙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믿음 안에서 살던 그 첫 사랑이 식어진 사람들을 보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관련된 사건에 대해 주님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시는지가 더 크게 느껴 질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여기 성탄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1. 첫 번째는 헤롯 왕의 반응입니다.
그 당시 유대를 다스리고 있었던 헤롯 왕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로부터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는 소식입니다. 궁궐 안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지 않았는데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현재 자신이 유대의 왕인데 자기도 모르는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니 당연히 긴장하게 되었지요. 물론 헤롯은 그러한 속마음은 감춘 채로 8절에 보면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가로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12절과 16절을 보면 헤롯의 속마음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왕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인생의 계획도 스스로 세우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컨트롤(control)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지배받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헤롯이 왕으로서 다른 왕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들은 나 외에 다른 것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 외에는 자기 위에 다른 권위를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만이 자기의 왕입니다. 자기의 조종자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자기의 인생의 계획을 스스로 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청소년들은 어떤 대학, 무슨 과에 갈 것인지, 또 젊은이들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 어떤 사람과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할 것인지, 결혼한 사람들은 아이는 몇을 낳을 것인지, 자녀교육을 어떻게 시킬 것인지, 돈을 어떻게 벌고 관리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인생을 살 것인지… 등의 모든 계획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의 왕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나 외에 나를 다스리고 간섭할 다른 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2. 두 번째는 일반적인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에 계시 는지에 대하여 묻는 동방의 박사들의 질문을 듣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3절을 볼까요?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은 소동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큰 소동이 났습니다. “아니, 왕이 탄생하셨다고?”하며 온통 난리였습니다. 소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가면서 시끌벅적했을 것입니다. “왕이 탄생하셨대”하며 한창 시끄럽게들 반응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호외도 뿌려졌겠지요.
9시 뉴스의 톱뉴스로 등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의 반응이 없습니다. 그저 한때의 소동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이 어디인지 몰라서도 아니었습니다. 5절, 6절을 보니까 서기관들에 의해 아기 예수님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동안 뜨겁게 반응했지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3. 세 번째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반응입니다.
동방박사의 방문에 당황한 헤롯 왕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메시아가 어디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되었는지 묻습니다. 4절부터 6절을 볼까요? “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헤롯 왕의 질문에 구약성경 미가서 5장 2절의 말씀을 통해 유대 땅 베들레헴에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대제사장이라면 당시의 유대교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일종의 성경학자들입니다. 모두다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식적으로는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그 이상은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사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듣고 그 탄생한 곳이 어디인 줄 알았다면 신속하게 그곳으로 달려갔어야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성경을 통해 예언된 메시아를 손꼽아 기다려왔던 자들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달려가지도, 그리고 예수님께 경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지식이 지식으로만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러한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해박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의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탄절이 바로 그러한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아마 그러한 문제가 성경퀴즈 문제로 나온다면 거의 대부분이 정답을 맞힐 것입니다.
그런데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잘 다니는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알기는 잘 알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으로 부딪히지는 않습니다. 그저 머릿속의 지식으로만 끝납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님께 경배하고 자신을 드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다니는 청소년과 청년들도 크리스마스에 같은 젊은이들끼리 어울려 all night을 하면서 선물교환하고, 캐럴을 부르고, 재미있는 게임을 하고, 새벽에 새벽송을 도는 것으로 크리스마스 행사를 치릅니다. 그리고 정작 성탄절 아침 성탄축하예배 때에는 꾸벅꾸벅 좁니다. 서로는 선물교환을 하지만 정작 예수님께는 그 어느 것도 드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진정으로 축하하고 기뻐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생신을 빙자한 저희들끼리의 축제일 따름입니다. 혹시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4.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동방박사들의 반응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사막을 횡단하여 진리를 찾아오는 동방 박사들입니다. 저들은 별을 따라 와야 했기에 낮에는 방향을 알 수 없었고 밤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하루 이틀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2000년 전 교통수단은 걷거나 말이나 낙타를 타는 것입니다. 고대 문헌을 보면 이 거리를 이동하는데 적어도 두 달 정도는 족히 걸리는 거리입니다. 왕복을 생각해 보면 적어도 너 댓 달 정도 걸립니다. 그리고 경배하며 머무르는 기간을 따져보면 거의 반년을 필요로 하는 여정입니다. 그리고 또 경비는 얼마나 들었을까요? 반년 동안 하던 일을 그만 두었으니 수입이 줄었을 것이고 반년이나 여행을 해야 하니 그 경비가 얼마나 됐을까요?
도대체 그 먼 거리를 그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또 그렇게 많은 경비를 지출하면서 왜 왔을까요? 누가 오라 한 것도 아닙니다. 또 누가 가라 한 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왔을까요? 본문에서 단지 그 답은 하나입니다. 경배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경배란 무엇입니까? 경배란 영어로 “Worship”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가치’라는 뜻의 “worth”와 ‘새기다, 매기다, 간주하다’라는 뜻의 “ship”이란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럴 가치가 있다고 간주하는 행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한다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내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가지신 분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요 12장을 보면 베다니의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온 이유는 청을 드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 분에게 위로를 받고 힘을 얻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자기의 마음을 담아서 자기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마리아는 무려 삼백 데나리온의 값이 나가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면 노동자 1년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현재의 가치로 볼 때 2-3천만 원은 족히 넘는 큰 금액입니다. 이성적으로 볼 때 이것은 낭비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신 분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그것뿐이어서 그것 밖에 드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경배입니다. 최상의 가치를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그랬습니다. 탄생하신 메시야는 세상 그 어떤 가치로도 비교할 수 없이 귀한 분입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킬 왕이십니다. 이 땅에 놀라운 구원을 시작하실 분이십니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분입니다. 그렇게 귀한 분께 마음을 드리는데 그 먼 거리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경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행 돝 생길 그 어떤 위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침내 9절하에서 10절을 보면,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자!! 보세요. 이들은 이방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별을 따라 엄청난 길을 걸었습니다. 마침내 그들 눈 앞에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아기 예수가 있는 집 앞에 당도 한 것입니다. 여기 동방 박사들의 이 현장 앞에 어떤 모습을 보여 줍니까? 큰 기쁨을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이런 환희 찬 감격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역시 오늘 이 성탄이 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정말 눈물이 터져 나오도록 기쁨이 있습니까? 그러나 성탄절이 정말 모든 사람에게 다 기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에 대하여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부터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왕이었던 헤롯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15분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순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싫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감각합니다. 매일 신문 방송에는 온갖 의혹 사건들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태어났다는 성탄절에 대하여는 왜 잠잠한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다고 사방에 써 붙여 놓았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교회 외벽에 “축 성탄”이라고 써 붙여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그가 인간이 되셨고, 예수님이 정말 동정녀에게서 나셨으며, 예수님이 진정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시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 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하지만, 아들을 보내는 그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아들이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인데, 그것도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을 것인데, 죄의 저주를 뒤집어쓰고 죽을 것인데, 그 아들을 보내는 하나님의 마음은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운 날이라는 것을 우리는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기 11절을 보세요!! 그들은 경배하기 위해서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11절에 보면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가장 귀한 것들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물론 어느 학자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예물들에 영적인 의미를 덧붙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황금은 보석 중에 가장 귀한 것입니다. 유향과 몰약은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얻을 수 있는 향유 가운데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린다는 것, 그것은 그들이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여행을 하는 도중에 여비가 부족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예물을 팔기만 하면 얼마든지 넉넉하게 여행을 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소중한 예물을 절대로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가장 존귀한 것을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드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어제 밤 12시에 한 성도가 저의 집을 찾아 왔습니다. 사랑의 쌀을 위해 500만원을 가지고 왔습니다. 요즘처럼 불황 속에 배금사상이 만연되어 있는 때에 자기 쓸 것도 벅찬데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이런 성탄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 그들은 목숨걸고 베들레헴까지 와서 주님을 경배하고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드리고 이제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꿈을 통해 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헤롯왕을 만났을 때, 헤롯왕은 "베들레헴에 가서 자세한 사항을 알아보고 메시야를 찾거든 돌아올 때에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라"고 했는데, 꿈에 "헤롯왕에게로 돌아가지 말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주어졌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은 그 말씀대로 다른 길로 해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경배와 참된 예배의 모습입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습니다. 만약 그들이 경배는 멋있게 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헤롯왕을 만났다면 그들의 경배는 불완전한 경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첫 번 크리스마스를 맞는 다양한 사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셨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비극적인 삶의 행렬의 선두를 장식했던 헤룻이나, 서기관들처럼, 이 아침! 여러분 가운데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또 알 것은 다 알면서도 그 이상은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니십니까? 성경의 가장 슬픈 구절 중의 하나는 요1:11절이라 생각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께서 자신이 만드신 이 땅에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불순종과 거역을 참으시고 이 땅에 당신의 영광의 옷 자락을 펼쳐 놓으십니다. 상관을 하지 않으시는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살아 계신 그분으로 인한 감동과 환희와 희열을 가지고,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찬양하는 성도들이 어디 있습니까? 성탄의 종은 그들을 위해 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아직도 그 주님을 자신의 마음과 삶 속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왜 아직도 그 분을 위해서 살지 못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욕심 때문입니까? 이기심 때문입니까? 무관심 때문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재미 때문입니까?이 시간! 여기 모인 우리 모두, 누구하나 예외 없이 어느 해인가 인생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그리스도에 관한 멧세지를 들으면서도 진정으로 그 분을 만나지 못한 채 주님 앞에서야 한다면, 그리고 주님을 영접했으면서도 참으로 그 분을 경배하는 살자 못하고 부끄러움과 후회 속에서 그 분을 만나야한다면, 그때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성탄절이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 앞에 경건한 헌신을 드릴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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