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가장 값진 선물 요1:10-13. 2014년 12월7일 주일 예배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12-08 | 조회: 1437
아마 여러분은 어느 누구 예외없이 여러 가지 선물을 드려보았거나 받아보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 받은 선물 가운데 기억에 남는 선물이 있지 않습니까? 아마 기억에 남는 선물은 비싼 선물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선물입니다. 비싼 것은 아니더라도 마음과 정성이 담긴 선물은 받는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선물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입니다. 그래서 선물을 하려고 할 때 사람들은 무엇을 선물할 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품목을 결정하면 그 다음에는 가격은 얼마 정도로 해야 할지, 색깔은 무슨 색으로 할 지, 포장지는 무엇으로 할 지, 심지어 전달은 어떻게 할지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선물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정말 소중한 선물은 사랑하는 이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받은 선물은 그것의 값어치가 얼마이든 상관없이 그 사람의 사랑과 정성이 담겨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최소한 나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선물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 한 사람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은 별로 가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로 값진 선물은 나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세상적인 가치,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은 언젠가 그 가치가 하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선 당장은 소중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중에는 그것이 별로 소중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 아침!!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귀한 선물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제가 바로 그 선물을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12절을 보시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눈을 번쩍 뜨게 하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캄캄한 세상에 소망의 빛과 같은 말씀입니다. 먼저 ‘믿음’, ‘하나님의 자녀’, ‘권세’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 보석과도 같은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은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란 어떤 것입니까?”

첫번째는 이 선물을 받은 자는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엄청난 권세입니다.

여러분, 신분이란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내가 어디에 속해있으며,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으면 인생이 흔들립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를 믿고 사는 우리의 신분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가장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칭호입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에 우리의 신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 였습니다. 요 8장에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하고 소망이 없는 존재입니까? 로마서 5장에서는 죄인의 신분이었고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였습니다. 도무지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릅니다. 전혀 새로운 신분을 얻은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갖춘다고 해도 새로운 신분을 얻지 못하면 헛된 일입니다.

몇해 전에 tv 방송에 인기 프로 중에 하나인 진품명품이라는 코너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본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진귀한 물건을 소유한 사람들이 자기 물건을 나름대로 가격을 매겨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면, 전문가들은 그 물건이 진품인지 아닌지, 진품이라면, 명품의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해 가격을 산출합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출연자들의 얼굴은 희비가 엇갈립니다. 자신은 수 천 만원의 가치가 있는 진품인 줄 알고 소중히 보관해 오다가 가져옵니다만, 전문가들의 감정 결과 “이것은 가짜입니다. 이-삼십 만원에 지나지 않는 모조품입니다. ” 라고 말 할 때 그 물건을 들고 나온 사람들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이 소장한 물건이 진품인지 아닌지 미심쩍어 그저 확인 차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격도 대충 몇 십 만원 정도 매겨 가지고 나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물건을 감정 한 후 뜻 박의 결정을 내립니다. “이 물건은 보기 드문 진품입니다. 부르는 게 값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억대가 넘습니다. ” 뭐 이 말 한마디에 혹시나 했던 그 물건의 주인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아주 어렵게 결정해서 나왔다 하면서 옛날 한 문서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오랜 세월 가문의 영광처럼 생각하며 지녀 온 것인데 이 내용이 어떤 것인지 잘 몰라 하던 차에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심사위원들이 한 참 감정하더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생님, 이것은 노비 문서입니다.” 그 순간 그 의뢰인의 얼굴은 백지 장처럼 하얗게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가문이 노비였음에도 그 문서가 얼마나 얼마나 자신들의 선조들을 얽어 매놓은 것을 가보로만 간직하고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는 양반 상놈 제도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양반은 조선시대 시대 초기에 전체인구의 약 10%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비가 40%나 될 정도로 상놈이라는 아픔을 가진 자들이 많았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이 신분을 가지고는 과거 시험도 볼 수 없고 가문대대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머슴이나 종으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정식 이름은 없고 그냥 그를 부르기 위한 호칭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3월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삼월이’라고 불렀고, 마당을 쓰는 머슴은 ‘마당쇠’라고 불렀습니다. 힘이 좀 세고 일을 잘하는 머슴은 ‘돌쇠’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진짜 이름이 아니라 주인이 부르기 위해서 그렇게 불러준 것뿐입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우리나라 신분제에 일대 동요가 일어나게 됩니다. 양반들은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도망치기에 바쁜 반면, 일반 농민과 상민, 서민들이 의병을 조직해 관군보다 더 큰 전과를 올리게 되자, 백성들 사이에 양반과 지배층에 대한 회의와 저항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비롯한 지배층이 한양을 비우고 평양과 신의주로 떠나자 가장 먼저 불태워진 것은 노비문서가 보관되어 있던 관청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후에는 전쟁으로 인해 바닥난 재정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돈 많은 서민과 양민들에게 돈을 받고 양반직을 파는 공명첩(空名帖)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 공명첩을 사면 자신의 신분이 달라집니다. 노비들도 일정량 이상의 양곡을 바치면 공명첩을 살 수 있었고, 그러면 노비는 평민으로 신분이 상승됩니다. 그래서 돈 좀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공명첩을 사서 신분상승을 얻게 되었습니다. 10% 밖에 안되던 양반의 숫자는 철종 때에는 양반의 수가 무려 50%를 넘게 되었 鳴 합니다. 어떻하든 신분 세탁을 할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를 믿기만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 자녀의 권세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했나요? 12-13절.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the right)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여기서 ‘권세’라는 단어는 ‘합법적 권리’라는 뜻입니다. 이런 권리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나요? 오직 개인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인간의 유전으로 되질 않습니다. 혈통적으로 세습되지도 않습니다. 인간적인 노력(종교적인 고행, 금욕, 수도 등 의지적인 노력)으로도 되질 않습니다. 돌은 아무리 닦아도 돌인 것처럼 죄인인 인간이 제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여전히 죄인일 뿐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약속입니다.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도 따를 뿐입니다. 미국 국적법을 예로 들어보죠. 그 나라는 부모의 국적에 관계없이 미국 땅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심지어 불법 체류자의 자식이나 원정 출산으로 태어난 자식이라도 미국 시민이 됩니다. 황당해 보이지만 자기들이 정해 놓고 그렇게 하겠다는데 누가 뭐랍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고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합니까? 그대로 믿고 따르면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겁니다.




두 번째는 이 선물을 받은 자는 신분과 더불어 거기에 걸맞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고도 그 권세의 내용을 잘 모르거나 확신하지 못하면 충분히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바보 같이 살 수 있습니다. 큰 손해를 보는 것이죠. 여러분,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미운오리새끼」를 잘 아시죠? 어미 오리가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알에서 오리 새끼들이 깨어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 큰 알이 아직 나오질 않습니다. 계속 품었더니 며칠 후 큰 알도 깨어났는데, 생김새가 좀 목이 길쭉하고 털이 희끗희끗하고 덩치만 큰 미운 오리 새끼였습니다. 다른 오리들이 조롱을 하고 미워합니다. 그는 외톨이가 됩니다.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갑니다. 이곳저곳을 배회하는데 너무 쓸쓸합니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고 미운 오리 새끼가 자라 모습이 점점 변화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조가 나는 것을 봅니다. 얼마나 멋있어 보이는지! 그런데 연못에 비춰진 자기 모습이 똑같았습니다. 자신도 본래 백조였던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미운 오리새끼로 고민하며 바보처럼 살았던 겁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미운 오리새끼처럼 바보 같은 세월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상처받고 조롱받으며 힘없이 ... 그러나 이건 아니죠!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깨닫고 그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정말 하나님 자녀로서 위풍당당하게,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자녀가 된 그의 제자들을 보고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 보십시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저 새는 심지도 않고 추수도 않고 곡간에 쌓아 두지도 않았어. 그러나 너희 천부께서 다 기르시고 먹이시지 않느냐." 또 자녀 된 제자들 보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의 백합화는 길쭉하고 보기 싫 은 꽃이지만 유대나라 백합화는 새빨간 것이 얼마나 이쁜지 모릅니다. "들에 저 백합화를 봐라. 저렇게 아름다운 백합화에 누가 저렇게 옷을 잘 입혔냐. 하나님이 입히셨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공중에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들에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료를 보니 지구상에 있는 조류가 약 1000억 마리 정도 된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 새들이 어떻게 매일 먹고 사는지 상상이 잘 안갑니다. 우리나라에 절기 따라서 왔다갔다하는 제비에 대해서 어느 교수가 연구한 자료를 보니, 제비는 새끼에게 하루 100번 이상 먹이를 갖다 준다고 합니다. 숫놈과 암놈이 번갈아 가면서 곤충을 잡아다가 100번 이상 먹인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루에 줄잡아 7000마리의 날파리 곤충을 갖다가 새끼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끼를 키우는 3주간 동안에는 무려 15만 마리를 먹이는 것입니다. 우리 보고 그렇게 제비에게 먹을 것을 주라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비가 한 두 마리입니까? 하나님이 그 모든 날짐승을 다 먹이고 키우신단 말입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날짐승도 먹이고 키우는데 하물며 나일까 보냐,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날짐승을 먹이시는 하나님, 들판에 있는 풀도 키우시는 하나님. 그것에 비해서는 너무나 중요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가만히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볼 때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너무 사랑 받는 자녀이기에 우리에게 있는 모든 악과 죄와 모든 범죄를 예수의 십자가로 깨끗이 씻으시고, 이제는 죄와 흠이 하나도 없는 거룩한 자기 자녀들처럼 날마다 보시면서 그 머리터럭도 다 세시고,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고, 어디를 가나 동행하시고 모든 기도를 귀담아 들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공중에 새도 저렇게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소중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신앙생활이란 자녀됨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은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을 구하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 하기 때문에 옵니다. 자녀에게는 안정감이 있습니다. 기도 안 들어주셔도 좋고 그냥 깊은 내적 평안이 있습니다. 상속권자가 누리는 특권은 내가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everything I have is yours)” 누리면 되는데 누리지 않고 해준 것이 없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원망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마음껏 누리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살면서 어려움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풍파가 있고 시련이 있어요. 제 설움이 제일 큰 것 같지만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축복의 계속을 갖고 있어도 레드 카펫 깔아 놓는 게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 극복하고 승리하도록 도와주실 뿐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과잉 사랑 같은 것 안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항상 도와주심을 기억하십시오. 고전10: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험 범위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항상 동행하며 도와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결국 승리합니다. 잠24: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고난에 관한 한 어느 누구 못지않게 시련을 많이 당했던 사도 바울이 외칩니다! 롬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구절은 A. 링컨이 특별히 좋아했던 말씀입니다. 그는 무수히 실패한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때마다 자기 이름을 A. Lincoln이라 쓰면서 자신을 격려했습니다. 자신을 보면 한심하지만 자신을 하나님 자녀 삼으신 하나님 때문에 A 학점을 줄 수 있었던 겁니다. 마침내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역사에 남는 위대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성탄의 은혜는 도무지 자격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기 위해 영광의 보좌를 내려놓으시고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 영접하는 것과 믿는 것은 같은 뜻입니다. 믿는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영접한다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귀한 손님을 집으로 초대하듯이 기꺼이 열린 마음으로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11절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세상의 특징은 거부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제 성턴절이 다가 오지만,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누기 받아들이고 영접했나요?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성탄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영접한 사람의 숫자는 그 당시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기뻐하고 영접했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천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 짓밟힌 자, 실패한 자, 병든 자, 죄인으로 몰린 자,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오심을 기뻐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빈방 하나를 구하기 위해 외치며 다니는 그 처절한 외침을 외면한 우리 인간이 도대체 누구길래 저 구유에까지 당신의 자리를 펴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까?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하면 안되었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을까요? 내가 무엇이길래 저 거룩한 영광의 보좌를 포기하시고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합니까? 도대체 내가 무슨 가치가 있다고,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고 그런 수모, 그런 수치를 감당을 하셨습니까? 암만 생각해도 이것은 말로 달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 앞에 여기 먼저 부름 받은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서 그렇지 그 십자가의 보혈로 적셔진 우리는 그 엄청난 은혜 앞에 기뻐해야 하지 않습니까? 만약, 예수님을 믿고 사는데도 기쁨이 없다면 그 마음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 세상의 일에 마음을 빼앗겼거나, 예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보다 세상의 것들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성탄절은 이웃을 돌아보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이 영광스러운 현장을 가장 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신 섬김과 나눔의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연약하기 때문에 나만 생각하고 나의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누이신 일을 생각하며, 나의 메마름 때문에, 나의 무정함 때문에 버려지는 사람은 없는지 생각해 보고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받은 사랑으로,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풀 수 있는 뜻 깊은 성탄을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에도 교회는 자양동과 등대 교회에 여러분 가슴에 담긴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저들에게 나누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니다. 아-멘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