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어디에 바칠 것인가 롬6:15-23. 2014년 11월30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12-01 |
조회: 1589
요즘 한국 교회에 새로운 도전을 주는 좋은 영화 두편이 있습니다. 하나는 손양원목사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이라는 영화이고 또 하나는 ‘제자, 옥한흠 목사’라는 영화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요즘처럼 많은 교회가 거룩성이 실추되고 도덕성이 무너지는 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가 온갖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이 영화가 상영되는 것은 한국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엄청난 것임을 보게 됩니다.
저 역시 ‘제자, 옥한흠 목사’를 보면서 고개를 못 들 정도로 부끄러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날 제가 처음 제자 훈련을 처음 받을 때에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예리한 눈빛으로 거기 모인 목회자들을 향해 카랑 카랑한 차분한 목소리로 ‘당신들은 지금 무엇에 미쳐 있습니까?’ 첫 마디를 던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미치 존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미쳤다'라고 말할 때도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신병이 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 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생명을 거는 것을 말합니다. 가슴에 있는 불을 아무도 끌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광인론을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광인은 글자 그대로 ‘미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에 미친 자 - 그는 제자 훈련을 하면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바로 사람임을 강조하며 한 생명, 한 생명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숫적으로 많은 교인들을 늘리고 교회 건물을 크게 짓는 것을 목회자의 능력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가운데 성장은 다른 게 아니라 한생명이 거듭나서 예수를 닮아가는 것임을 평생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그 모습이 얼마나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제가 지난 주 성례식을 행할 때 롬6:14절까지 살펴보았는데 좀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계속 말씀을 다루어 갈려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구원 받았다면 이제 우리의 삶을 어디에 바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2-13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의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 분명한 대비가 나옵니다. 요약하면 내 단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라는 분명한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 내 삶을 누가 잡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생각해 보세요. 삼손에 손에 들려진 나귀 턱뼈, 다윗에 손에 들려진 물맷돌, 모세에 손에 있는 마른지팡이 다 보잘 것 없는 것들이지만, 이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 질 때 세상은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붙잡고 사용하시면 내 인생은 걸작의 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세상의 학문이, 재물이나 인기가 내 인생을 붙잡고 연주하면 내 인생의 소리는 그것밖에 안 될 것입니다. 누가 나를 연주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주께서 자기를 써 주심을 날마다 감사했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주여! 어찌하여 나를 초지에서 불러내어 이처럼 존귀한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나이까” 푸른 초장에서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을 하나님이 붙잡고 연주하니까 그의 생이 달라졌습니다. 자기를 믿어주시고 자기를 써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 한생을 어떤 자리 어떤 위치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이제 이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자기를 돌아보는 일은 매우 유익한 입입니다.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 하나를 위해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실 만큼 결코 예수님이 놓칠 수 없는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도 보혜사가 되신 성령께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은혜로 붙잡으시며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말씀하신 가장 소중한 존재가 여러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살 맛나지 않습니까? 아무리 세상이 자신도 믿지 않는 말이나 행동으로 남까지 속이는 사람과 도덕 불감증 세태에 있다 할찌라도, 그리고 한밤을 애써 노력해도 손안에 든 것이 없다 할찌라도 우리에게 바로 예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한 것 보다 훨씬 더 귀하고 놀라운 것을 우리를 위해 예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계획은 한 번도 변함없으시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탈진 상태에 있습니까? 깊은 침체와 절망가운데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았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시 고백하기 바랍니다. 이제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리고 관점을 바꾸세요. 그동안 안 되었잖습니까? 왜 그렇게 안 되는 그것에 미련을 두십니까?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내 이름을 부르시기 전에 우리의 인생은 의미와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찾아오신 그 순간부터, 그리고 내가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그 순간부터 내 인생에 밝은 빛이 비치고,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쁨은 부모를 잃고 울던 고아가 엄마를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이요, 폭풍우 치던 밤바다에서 고생하던 배가 등대를 찾았을 때의 안도감이며, 늑대에 쫓겨 사지에 몰렸던 양이 목자의 품에 안기는 환희입니다. 그 순간 엄청난 영적 쓰나미가 내 영혼을 덮어버렸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에 질서가 생기고 영원함을 기약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 다 힘드실 것입니다. 사업도, 직장 생활, 그리고 가정도 근심의 그늘을 벗어나지못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청년들의 현실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마치 저들을 가로막는 거대한 골리앗들이 현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눈만 감으면 미래가 걱정되고 장래가 캄캄하고 불안하고 막연합니다. 한때는 사오정이라고 하더니 또 38선이라고 하더니 오늘은 이구백이라고 합니다. ‘20대 90%가 백수’라는 말입니다. 앞날을 생각하면 뭘 해먹고 사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평생의 라이프 싸이클 중에 신앙의 감격과 기쁨을 잃어버리기 쉬운 시기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감격과 사명의 열정을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 세상과 쉽게 타협하며 마음의 갈등이 가장 심한 시기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바로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갈 때입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생활을 하는 그때부터 사회에 조금 적응이 되는 20대 중반부터 30대 후반까지입니다. 청년 때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명자로 살겠다는 열정에 불이 탑니다. 단기선교를 가거나 농어촌 사역을 지원하면서 돈 한푼 없이도 사역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갖습니다. 그것이 청년들의 기쁨입니다. 사람들이 새롭게 인생을 결단하며 축복의 통로로서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비전입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자신이 꿈꾸었던 것과 세상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 조직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치루어야 할 일들과 갈등이 너무 많습니다. 처음에는 믿음과 사명 그리고 비전에 따라 살겠다고 결단했지만 엄청나게 밀려오는 현실 앞에서 한 장의 휴지조각과 같은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합니다. 첫째 아이를 낳고 나서 타협,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는 변질, 그리고 아이를 하나 더 나으면 절망하게 된다고 합니다. 결혼 전 생각했던 환상적인 결혼생활이 아닙니다.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결혼과 직장생활이라는 의식이 깨어져 버립니다. 단지 현실가운데 생존과 적응이라는 것에 매이게 됩니다. 사명을 생각하기에는 현실의 여유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비전과 사명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이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혼전 순결이 어렵습니다. 십일조 생활 쉽지 않습니다. 술 먹지 않고 믿음생활하며 바르게 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내일을 상징하는 우리의 청년들이 오늘의 현실에 갇혀만 있다면 우리의 미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기 바울은 감격을 담아 큰 소리로 자신이 로마 교인들에게 외치는 이 음성을 이 아침!! 우리 역시 성령의 음성으로 받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17-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바울도 지금 자신이 죄의 종이었던 지난날의 신분에서 의의종이 되었다는 이 신분의 변화 앞에 감격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의의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종이란 말을 썼을까요? 우리나라 말로 종이라고 번역을 해서 그 의미가 강도있게 전달이 잘 안되는데 본문의 원어인 헬라어로는 노예를 가리킨 말입니다. 지금은 노예가 없으니 얼마나 천한 신분인가를 실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로마인구 약 절반에 해당하는 6천만이상이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공장의 기계나 다를 바 없는 생산수단 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생산수단이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노예하고 당나귀는 똑같은데 노예는 말을 할 줄 알고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사람대접을 못 받았습니다. 종은 평생동안 주인의 소유로 물건처럼 취급받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주인이 죽을 때 산채로 무덤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종의 운명이었습니다. 이것이 종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의 지난날의 신분을 ‘죄의 종’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철저하게 사단의 지배를 받는 소망없는 인생임을 말합니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얼마나 자유가 그립겠습니까?
빠삐용이란 영화를 보십시오. 스티브맥퀸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곳을 도망치려고 애를 쓰지않습니까?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유라는 것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한번 누리고 싶은 소중한 것입니다. 아마 탈출의 성공 가능성만 있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탈출을 시도해 볼 것입니다. 감옥 안에는 햇빛이 미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그리운 게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같은 종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외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자신의 신분이 바뀐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엔 죄의 종이나 이제는 의의 종,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분이 바뀌었다면 이제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삶도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 앞에 바울이 강조하는 게 무엇입니까? 이제 의의 종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답게 은혜에서 거룩에로의 삶으로 살아갈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19절입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무슨 말입니까? 지난날의 죄에 속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 신분의 변화를 받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ⅰ)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이요
ⅱ) 적극적으로 구별된 삶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를 들어 어느 한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는 노름을 하다가 빚을 갚지 못해서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어렵게 돈을 구해와 가지고 그를 빼냈습니다. 그러면 그는 그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마도 그 가족들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다시 노름에 손을 대어서 빚을 지고 또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면 누가 그를 동정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갈5:1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제 다시 죄에 빠져 어두움에 속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거룩함에 이르라는 이 말은 죄와 싸워 승리하는 생활 속에서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몇해 전 이 시대에 하나님 앞에 가장 아름답게 쓰임 받았던 라브리공동체의 (포단시스쉐러)박사가 암치료차 미국의 한 대학에서 이런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는 미국의 크리스찬들을 질타하면서 “여러분의 삶의 목표가 행복하다는 것 그 자체에만 매달린다면 불신자와 다른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크리스챤들의 삶의 목표는 행복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거룩함을 삶의 목표로 삼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거룩함” 우리가 의의 종이 되었을 때 그 열매는 거룩함입니다. “거룩함” 이 거룩함의 크라이막스는 영생입니다. 여기 22-23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여기 영생이란 하나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생명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는 삯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던 그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영생은 지금 얻는 것이지만 내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을 때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거룩한 삶을 살 책임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거룩함을 완성하여 거룩하신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나라에 거하게 되는 이 마지막 열매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일에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서두에 옥한흠 목사님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분이 정말 많이 이야기했던 분 중에 한 분이 조지 휫필드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죤 웨슬리(John Wesley) 등과 함께 18세기 영국의 부흥을 이끌었던 분입니다. 이 분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분입니다. 초인적인 힘과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22살에 자신의 고향인 글로스터에서 첫 설교를 한 이후 5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34년간 오직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인데도 그가 설교하는 곳에는 수만 명씩 몰려들었습니다.
그가 인도했던 야외집회만도 무려 1만 8천 번에 이릅니다. 그가 설교자로 사역했던 기간으로 나눈다면 한해 평균 530번이나 야외집회를 가진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집회 한 번에 30분이나 1시간 정도 설교한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에 보통 40시간에서 60시간씩 설교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너무 걱정이 되어서 “좀 쉬면서 하시라”고, “그렇게 하다가 병이 나 쓰러지면 어떻하느냐?”고 걱정하며 조언을 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나는 녹이 슬어 없어지기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1770년,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미국 보스톤(Boston)으로 가는 중에 엑서터(Exeter)라는 마을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곧 쓰러질 것만 같은 몸으로 설교하러 온 그를 보고 한 노인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설교단보다는 침대로 가시는 게 더 어울리겠습니다.” 그러자 휫필드는 “맞습니다. 어르신” 그렇게 대답하고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 예수여, 저는 주님의 일에 지쳐있기는 하지만 그 일에 싫증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직 갈 길을 다가지 못했다면, 저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들판에 가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당신의 진리를 인치게 하신 뒤 죽어 본향에 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그날 설교를 마치고 그 다음날 아침 7시에 조용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설교가 가운데 한 분인 마틴 로이드 존스(M. Lloyd-Jones, 1899-1981)는 조지 휫필드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헤라클레스적인 엄청난 노고를 했던 분이다.” 그런 그의 열정과 열심이 있었기에 산업혁명 이후 혼란에 빠져 있던 영국사회에 변화와 질서가 세워지게 되었고, 불신과 회의, 영적 무기력에 빠져 있던 영국에 신앙회복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제2차 대각성운동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분명 열정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연약한 한 인생이 자신을 분명히 드려야 할 것을 알았기에 정말 후회가 없는 인생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에게 사로잡히면 그때부터 우리는 모든 것에서 자유를 얻을 줄 믿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이 사람일까, 저 사람일까 하지만, 결단하고 이 사람과 결혼해야지 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이성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전성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나를 아낌없이 드릴 때입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안전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보다 더 멋진 일은 없습니다. 괜히 세상에 기웃거리지 말고, 오직 한 분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그분께 매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고 축복이고 승리의 길인 줄 믿습니다.
더욱더 하나님께 더 나아가 집중하고 그 안에서 영적인 성장과 말씀으로 견고하게 세워지면, 더 이상 죄의 세력이 우리를 위협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을 송두리 채 드리는 거룩한 열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은혜가 우리 가운데 가득 일어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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