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 거룩함의 시작 롬 6:3-13. 2014년 11월 23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11-23 |
조회: 1494
요즘 TV 드라마에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다룬 사극이 방영되고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왕이 되는 것도 힘이 들고 그 왕권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는 것을 봅니다. 사도세자는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아버지 영조의 손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정말 불우한 왕의 후손입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을 때 아들 셋이 남아 있었습니다. 세자빈에서 태어난 장남은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조 임금이 되었고, 다른 아들 둘은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들로 당시 천주교인이란 사실이 발각되면서 유배지 강화도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되고 후손들은 모두 강화도에서 왕가와는 관계없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조선 왕조에 왕가에 대가 끊기게 됩니다. 새로운 왕을 옹립해야 되는데 권력을 쥐고 있던 세도가들은 똑똑한 왕을 원치 않았습니다. 왕이 똑똑하면 왕권을 강화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왕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왕조가 전주 이씨의 나라였기 때문에 이성계의 피를 타고난 사람 중에 왕을 세워야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오래 전 강화도로 유배를 떠난 "이씨" 집안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강화도령 철종은 이성계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왕이 되는데 기본적으로 하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다는 것과 왕답게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는 왕이 되었으나 전혀 왕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가 왕답게 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어떻게 국방을 튼튼히 하고,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의 발전을 도모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살게 할 것인지를 배워야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술이나 마시고 궁녀들 꽁무니나 따라다니면서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철종형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으나 전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여기 '알지 못하느뇨?' 이 말은 어쩌면 그 당시 로마에 사는 많은 성도 가운데 자신들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에 휘둘리고, 마귀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무력한 삶을 사는 자들을 향한 질책의 말씀이기도합니다. 뭐 이 말씀은 오늘 우리도 깊이 들어야 할 말씀이 아닙니까? 특별히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분들과 또 성찬을 받는 여러분들도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의 삶을 더욱 더 풍성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세례가 무엇이죠?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세례 받았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을 때 세례요한이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3:14절에 보면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의를 이루는 것이라는 말속에는 아주 중요한 구원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죄 때문에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세례를 자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례가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 바울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보시면 '합하여' '연합한자'라는 단어가 5번이나 등장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고 또한 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죄가 죽고, 새로운 생명, 영생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연합된 것입니다. 이 연합되었다는 말은 무엇보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철저히 죽은 자들이란 말입니다. 나 혼자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죽었어요. 십자가을 쳐다 볼 때마다 나는 죽어지는 거예요. 혹시라도 꿈틀거리거나 무엇인가에 집착하려 하다가도 십자가만 보면 나는 죽어요.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라오는 제자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 핍박과 고통이 있습니다. 때로 자존심이 무너지는 아픔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누리고 싶은 것도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이 땅에서 방해, 핍박, 어려움이 있어요. 그러나 결코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런 고통이 있어야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면 우리에게는 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듯이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고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죽었다면 부활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물론 죽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언제나 손해만 보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남이 나를 못살게 구는데 그에 맞서지 않고 죽은 것처럼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정말 죽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지는 않았으면서 잠깐 죽은 것처럼 위장하며 살고 있습니까? 왜 교회에 와서는 죽은 척하고 살고 세상에 나가서는 기고만장하게 살아갑니까? 죄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듯이 숨을 죽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롬5:6에 보시면 지난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그리스도를 알기 전 나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바울은 좀 고상한 표현을 썼지만, '경건치 않은 자'란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자, 도무지 변화될 수 없는 죄에 찌들대로 찌든 불신과 음란과 거짓으로 물든 소망 없는 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내려가서 8절에 보시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자격 없는 자, 이 소망 없는 인생을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인생황혼에 한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고백합니다. "하나님! 내가 지난 시절 얼마나 당신 앞에 잘못된 삶을 살아왔습니까? 믿는 자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복음을 방해하는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로 살아온 나를 당신의 능하신 손길로 그 모든 것을 덮어주시고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충성되이 여겨 하나님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나를 끝까지 믿어주신 하나님! 나의 연약함을 허물치 않으시고 오히려 격려하시고 소망을 주신 하나님! 내가 어찌 이 사랑! 이 은혜를 감당하겠습니까?" 보십시오. 그는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하나님 사랑을 깨달은 그 날부터 어떤 자리 어떤 환경, 어떤 핍박 앞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쏟았습니다. 자신을 믿어주신 자신을 죄에서부터 건져주신 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은혜 앞에 살아간다면, 더 이상 지난날에 나의 연약함에 머물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 "여길지어다"는 이 명령형의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이 말은 본래 회계사들이 전문적으로 사용하던 말입니다. 나의 통장 계좌에 돈이 입금되었을 때 그것은 현금이나 마찬가지로 '여기라'고 할 때 씌여진 것입니다. '여기다'는 말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카드'가 저에게 있습니다. 저의 통장에 돈이 있을 때 비록 조그마한 카드지만 어디에서든지 당당하게 자신감을 가지고 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기다'는 '생기 있게' 살라는 말입니다. 얼마든지 통장 안에 돈이 있습니다. 부도나는 통장이 아니니까 당당하게 찾아 쓰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이나 능력이나 감격적인 삶이 없습니까? 이는 말씀을 듣기만 할 뿐 확신이 없어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입니다. 이 연합된 자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성어거스틴은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는 죄를 안 지울 수 없는 자였으나 구원받은 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가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주님이 내게 성령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 도우심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이제 우리는 죄의 지배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죄에서 승리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려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바치지 않고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12-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의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여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서 ‘무기’라는 단어는 영어의 (웨폰)이 아니라 도구라는 뜻의 (인스트르먼트)입니다. (인스트르먼트)라는 단어는 ‘악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에 피아노가 있습니다. 이 피아노를 제가 연주한다면 바이엘 10번 정도 그것도 서툴게 연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본 교회 성가대 반주자가 연주하면 동일한 피아노이지만 소리가 달라집니다. 원리는 이와 같습니다.
내 인생, 내 삶을 누가 잡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붙잡고 사용하시면 내 인생은 걸작의 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세상의 학문이, 재물이나 인기가 내 인생을 붙잡고 연주하면 내 인생의 소리는 그것밖에 안 될 것입니다. 누가 나를 연주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주께서 자기를 써 주심을 날마다 감사했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주여! 어찌하여 나를 초지에서 불러내어 이처럼 존귀한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나이까” 푸른 초장에서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을 하나님이 붙잡고 연주하니까 그의 생이 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 세례식을 거행하고 성찬을 받습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 그리고 성찬의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그가 취하시고 축복하시고 깨트리신 떡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나누어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다시 말하면 그가 떡과 잔을 나누어주실 때 그는 단순히 떡과 잔을 나누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몸 곧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 우리는 이제 그의 몸 곧 그의 생명을 먹은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요한6:5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러나 성찬의 은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생명을 받은 자들이 이 생명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눔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나누시기 위하여 그분도 취하시고 축복하시고 깨트리셨던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성찬의 떡을 먹고 성찬의 잔을 마실 때마다 굳게 다짐할 것이 있습니다. 짧은 생을 살면서 과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나를 사랑하사 자기를 십자가에 희생하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고전11:26) 이 말씀 안에 들어 있는 준엄한 명령이 있습니다. '너는 보통 값진 생명이 아니니라. 네가 평생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너 대신에 죽은 예수를 전하는 것이니라.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떡을 떼면서 나를 위하여 죽어 주신 주님을 바라보고, 잔을 바라보면서 나를 위하여 한 방울의 피도 물도 남김없이 다 쏟아 주신 주님을 생각하고, 그래서 내 이 짧은 생애에 내가 할 일이 있다면 그게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대신 죽어 주신 그 주님을 자랑할 것밖에 더 있겠느냐? 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 그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 드리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 이러한 각오와 결심이 있는 자라야 합당하게 성찬식에 참례하는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받은 목숨인데, 내가 누구 때문에 죄 용서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될 사람인데, 나의 삶, 나의 사역, 이 모든 것을 통 털어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 주님을 높이는 것과 연관이 되지를 않는다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삶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을 대할 때 나는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을 마음에 두고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반성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시간 나의 재물 나의 직업 나의 건강 나의 생명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한 사람에게라도 더 많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어야 하느냐? 여러분 항상 이것을 생각 하셔야 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엄숙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죄인중의 괴수와 같은 나를 살리기 위해 흠도 티도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어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시간이요, 그 때문에 내가 죄 용서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노라고 고백을 하는 순간이요, 내 일생에 이 좋은 예수, 이 고마운 예수를 증거하고 전하는 것이,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순간이며, 여기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서로가 느끼면서 체험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의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이와 같은 믿음이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우리 가운데서 아직도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시는 분들은 이 성찬에 참례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오직 주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참으로 내 마음을 주님께 바치기를 원하는 성도들만이 성찬의 떡을 떼고 잔을 마셔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조용히 자기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성찬에 참여할 준비가 바로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은 합당하게 성찬의 떡을 떼고 잔을 마실 수 있습니까? 참으로 주님이 나를 위해서 어떤 분인가를 확인했습니까? 내가 과연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를 생각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나를 구원하여 성도로 세워주신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 복음을 위해 목사, 장로로 불러 주신 이 은혜 앞에 우리의 각오가 오직 나의 삶이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전하는데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습니까?
성찬의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내평생 슬프나 즐거우나/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하는 마음으로 참예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하여 살겠다고 하는 결심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고백이, 주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음을 전하는 것에 내 삶을 드릴 것을 다짐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은 사람만이 성찬식에 참여하도록 합니다. 세례를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과 교인들 앞에서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칫 무분별하게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 최소한 자신을 살필 수 있을만큼의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 죄의 경중은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다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성찬에 초대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죄를 다 아심에도 불구하고 이 성찬에 참례케 하시는 것은 모두가 주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입니다. 이 성찬에 참여하심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놀라우신 축복을 맛보시고, 그 은혜와 축복 속에 사시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시기를 소원하면서, 오늘 이 거룩한 식탁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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