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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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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초월 신앙 살전 1:1-10. 2014년 11월16일 [추수감사주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11-16 | 조회: 1577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금년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한 해인 것 같습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아마 이런 저런 일들로 많이 힘드셨을 겁니다.
특별히 우리 기억에 정말 오랫동안 기억 될 세월호 참사는 수학여행을 가다가 물에 빠진 학생과 가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 전체가 모두 힘들어 했습니다. 그 여파로 경제가 위축이 되고 특히 사업하는 분들이 많이 힘드시리라 생각됩니다. 국가적으로도 과거의 잘못 된 정책으로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분위기 가운데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어수선하고 힘들 때도 진정 감사할 수 있는가? 혹시 그런 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은 하나! 감사할 수 있고, 또 감사하는 게 마땅합니다. 감사는 피조물로서,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 당연한 의무이며 또한 행복의 비결입니다. 한 마디로, 감사는 행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유가 행복의 조건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죠. 아무리 많은 소유를 갖고 있어도 감사할 줄 모르면 불행합니다.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환경이든지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은 늘 행복할 수 있다.” 슈바이처는 어린 시절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아프리카 정글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모든 형편에 처해본 사람입니다. 그런 분의 말인지라 큰 설득력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마음가짐에 따라 초가삼간에서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고대광실에서도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인간은 본성 상 감사하기가 참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인간성이 점점 악해져가는 말세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롬1: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딤후3:1-2절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오늘날 현대인들이 불행한 이유는 무엇이 아직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사네 못 사네 해도, 있네 없네 해도 옛날에 비해 전반적으로 얼마나 풍요로워졌습니까? 의식주 모든 면에서 그런데도 볼행한 이유는 오직 하나 감사하는 마음을 상실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현대인이 부지불식간에 상실한 최고의 자산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경제 불황을 탈출하는 게 아니라 영적 불황인 감사불감증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감사 절을 맞이하여 혹시라도 우리에게 감사의 마음, 감사의 신앙이 상실되었다면 다시 한번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늘 감사하는 신앙으로 늘 행복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 2절에 보면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이니”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바울이 이 성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이들을 기억하고 생각이 날 때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바울이 감사한 것은



1. 이들의 신앙이 너무 아름답게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행전 17장에 나옵니다. 바울과 실라가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참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엄청난 아픔을 겪어야만했습니다. 3이레니까 한 3주, 한 달도 이 지역에 머물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 일행이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조직 폭력배 같은 자들을 동원하여 바울을 잡아들이려고 합니다. 실패하자 야손에게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를 끌어들였다고 하여 반역죄를 뒤집어씌웁니다. 이 때문에 부득 불 도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까지 문제가 되었습니다. 야 손의 권고로 밤중에 몰래 데살로니가를 떠난 바울에 대해서 ‘위험이 닥치니까 성도들을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밤중에 몰래 도망친 비겁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자신이 그런 수모와 오해를 받는 것은 어쩌면 감수해야 하고, 또 받아들여야 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좀 더 오랜 기간 머물면서 믿음을 견고하게 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은 그들에게 제대로 해 준 것이 없는데 마치 광야에서 만식이 된 여인이 아이를 낳고 어떤 연유로 그 아이를 버리고 간 여인처럼 정말 정말 미안하고 죄송한 일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 복음을 전하고 야밤에 도망치다시피 나온 그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들려온 소식은 참으로 놀라왔습니다. 유럽 지역에 믿음의 소문이 퍼졌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3절에 보면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앙생활의 3각대와 같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겸비되는 정말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으로 성장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본이 되었다는 말은 그 지역에 신앙의 모델 교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가 일어났겠습니까? 뭐 이것은 숫자가 많아졌다, 그런 차원의 감사가 아닙니다. 이들의 신앙 성숙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믿음으로 역사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단어보다는 역사(work of faith)를 강조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결과를 의미합니다. 믿음에는 살아서 역사하는 산 믿음이 있고 죽어서 역사하지 않는 죽은 믿음이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 있고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짧은 복음의 역사 속에서도 예수님을 본받고, 바울을 본받아 믿음의 역사를 나타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살아 역사하는 믿음이 있는 교회는 반드시 사랑의 수고가 나타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거짓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랑 역시 거짓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여기서 ‘사랑의 수고’라는 말 속에는 ‘수고’ ‘노동’이란 뜻과 함께 아기를 낳을 때 겪는 산모의 ‘산고’와 ‘진통’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참 사랑에는 아기를 낳고 아기를 기를 때 엄마가 지니는 ‘산고’와 ‘진통’과 ‘수고’를 포함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가 있으면 반드시 소망의 인내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핍박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소망으로 인내했습니다. 참고 견뎠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앞에 조금도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거듭납니다. 새롭게 태어납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절망을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새 소망을 안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거짓되거나 일시적인 소망과 다른 산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진지한 소망이며 영원한 소망 곧 죽을 수 없는 살아있는 소망인 것입니다. - 그 소망 때문에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어떤 자리에서나 사랑의 수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한번 태어나 행복도 맛보고, 고생도 맛보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개인의 행복과 인생의 의미가 어떤 교회를 다니느냐에 의해 상당부분 좌우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정말 은혜를 받았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삶의 의미를 발견했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뒤돌아보아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왕에 다닐 바에야 좋은 교회에 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지만 죽은 송장과 같은 사데교회를 다니고 싶어하겠습니까? 누가 여러분 스스로 자만에 빠져서 아주 식어버린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그런 교회에 몸담고 싶어하겠어요? 평생 고생하면서, 그런 교회 누가 다니겠습니까? 이왕 다닐려면 빌라델비아나 서머나 교회처럼 주님이 칭찬하는 교회를 다니고 싶고 그런 교회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한번 헌신해보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요 심정이어야 겠습니다. 좋은 교회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각 사람이 좋은 신자가 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교회의 전제 조건은 우리 각 사람입니다. 우리 개개인이 주님이 칭찬하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절대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교회의 공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겠습니까? 주님이 핏값으로 세운 교회에 어떤 모습으로 섬기며 살아야겠습니까? 지금 이 데살로니아 교회가 이렇게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아름답게 성장하는 이 모습 앞에 바울의 마음을 울린 것입니다.



2. 생각해 보세요. 이 교회의 신앙의 성장은 결코 이들이 평안할 때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그런 모든 환난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받는 박해는 오늘 우리가 믿음 때문에 당하는 시련과는 많이 다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때로는 직장을 잃어야 했습니다. 장사를 해도 사람들이 물건을 사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생활이 궁핍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들 가운데서 홀로 예수 믿는다면 그는 가족들에게도 미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가족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습니다. 가정에서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사회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를 섬기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왕으로 섬긴다는 것 때문에 범죄자로 몰려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는 환난이나 고난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자주 등장합니다. 1:6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 많은 환난 속에 있었다. 2:2에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2:14에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3:7에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살후 1:4절에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 ‘환난’이라는 말은 곡식을 타작을 할 때 쓰는 타작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일종의 도리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에 곡식을 깔아놓고 도리깨로 힘껏 내리치면 곡식알들이 전부 떨어집니다. 환난은 마치 시자들을 땅에 눕혀놓고 도리깨로 내리치듯이 호되게 다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능욕’이란 단어는 인간으로서는 입에 참아 담을 수 없는 수치를 말합니다. 그리고 박해는 예수로 인해 당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신앙인이 신앙으로 살려 하는 것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당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오늘 여러분이 처한 고난의 환경 속에서도 이 역경의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내 사정, 내 형편이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처지에서 감사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느 그리스도인이 쓴 “하나님이 생각하시다가”라는 수필집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 믿음을 가진 이 부부에게 결혼 후 16년이나 아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아기를 주시도록 기도해 드디어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16년이나 기도하며 기다린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기가 태어났을 때 아기의 아버지는 의사로부터 너무나 충격적인 통보를 받았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아기는 저능아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앞이 캄캄한 절망 속에서 아기를 받아 안고 흐느껴 울면서 병실의 자기 아내에게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기를 아내에게 안겨주면서 의사에게 들은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 속에서 아기를 꼭 끌어안고 몸부림치던 그 엄마가 한참 후에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여보, 괜찮아요. 하나님이 생각하시다가… 이 아기를 어디에 맡길까를 하나님이 생각하시다가, 16년씩이나 아기를 기다려온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죠“ 오히려 16년 동안 기다림 끝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자신들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감사하는 이 부부를 보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상황을 보면 미쳤다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에게도 하나님이 생각하시다가 이런 남편도 맡기시고, 이런 자녀들도 맡기시고, 이런 가정도 맡기신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보시고 하나님의 승리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속에 반드시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 같은 것을 만세전에 아시고 끝까지 간섭을 하시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대신 나를 끌어 안으셨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무엇이 아쉬워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계획 앞에서 나를 보면 나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감사할 것이 없습니까? 이 시간 감사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감사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못하는 것일 뿐 다 감사할 제목이 있습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어떤 감사가 일어나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환경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환경이 좋을 때는 모든 것이 희망적으로 보이지만 상황이 달라질 때는 그 상황 앞에 우리의 삶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 안에서만 인생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왜 이것 밖에 안되지?” 하는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도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을 바라볼 때는 다릅니다. 우리가 일제의 핍박 속에 있을 때 우리 민족에게 용기를 주었던 인도의 타고르라는 시인을 잘 알 것입니다. 그는 당시 탁월한 글을 발표했던 이탈리아의 철학자 크로체에 매료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시인 타고르가 강에서 배를 띄우고 크로체가 쓴 “아름다움에 관해”라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책이 말하는 한 철학자의 눈에 보여진 아름다운 세계에 기뻐하며 감격하고 있었습니다. 촛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었는데 워낙 열중해서 읽다보니 촛불의 심지가 다 타 들어가 꺼진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문득 주위가 캄캄해지고 책을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칠흙 같은 어둠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이제까지 촛불에 가려졌던 세계가 그의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주변이 눈에 익으면서 흐르는 물이 보이고, 달빛에 어우러진 아름다운 모습들이 하나하나 다가옵니다. 타고르는 고백합니다. “나는 그때까지 촛불에 의지해서 크로체의 아름다움을 읽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촛불이 꺼지자 하나님이 빚으신 저 아름다움이 나에게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창공에 떠있는 별과 달의 아름다움,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물결에 굽이치는 달빛, 온 세상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나는 촛불이 꺼진 다음에야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때 내 것으로 차 있었고, 내 노력, 내 의지로 가득차 있어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없었던 본문을 기록한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내 운명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주님 앞에 거꾸러집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이 쏟았던 모든 것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그 순간부터 쓰레기처럼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아름다운 보석들이 각각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낼 때 갑자기 영롱하고 찬란한 다이아몬드가 들어오자, 이제까지 광채를 빛내던 모든 보석이 빛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 참된 인생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삶의 새로운 목표를 발견합니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기쁨. 뜨거운 감격, 가슴 깊은 곳에 저미도록 스며드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사의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알 수 있는 넘치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자리에서도 감사합니다.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감사합니다. 감옥에서 저미어오는 매맞음의 통증을 끌어안으면서도 감사합니다. 살 소망이 끊어진 자리에서도, 지금의 고난은 장차 누릴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며 감사합니다. 그는 신약 13서신을 기록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성도들에게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이 전천후의 감사는 바울의 삶을 능력 있는 삶으로! 승리하는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년 내내 닥치는 대로 살다가 가을만 되면 감사절이라고 해서 의무감으로 감사헌금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결실의 계절 가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기회가 되어지길 바랍니다. 살전 5: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받아주시고, 내 삶을 새롭게 하시고 내게 영원한 소감을 주셨다면, 이제 나룰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어떠하던지 우리는 충분히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을 고백하시기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바랍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이렇게 한번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18세기 영국의 시인 조지 허버트가 이런 아름다운 기도시를 남겼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이제 한 가지만 더 주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을!" 오늘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디 이 감사의 계절에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함으로 감사를 회복하시고 행복한 인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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