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만의 외출 요5:1-9. 2014년 11월 2일 터치 153 새생명 축제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11-02 |
조회: 1489
오늘 교회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걸음이 인생의 가장 값진 걸음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곳까지 오시느라고 많이 힘드셨을 것입니다. 가족의 권유로, 친구 또는 이웃의 전도로 여기까지 오셨지만, 이 분위기가 아주 낯설게 여겨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이 여러분의 인생의 가장 소중한 자리가 될 줄 믿습니다.
2014년도가 엊그제 시작을 한 것 같았는데 벌써 11월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희망을 안고 살아온 한해가 올해는 얼마나 많은 사고와 사건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세월호 참사, 정치의 혼란, 그리고 윤일병의 동료들의 가혹행위로 죽은 사건은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얼마나 무겁게 어둡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피해 당사자들의 부모들의 절규가 무엇입니까?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말, 그 한마디가 던져주는 사회적 파장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뜻하지 않는 문제 纜 얼마나 당황하고 또한 얼마나 무력해지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겉모양으로만 봐 가지고는 그 삶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졌고 남 보다 행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그 속에 어떤 슬픔이 담겨있는지. 또 가슴 깊은 곳에 어떤 아픔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사람들의 겉모습만 봐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앞문은 굳게 닫고 오십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도 제가 봐도 괜챦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모습뿐이지, 그 삶의 옆문이나 뒷문으로 들어가 보면 어느 가정, 어느 개인 할 것 없이 예외 없이 깊은 탄식과 자기 연약함과 죄의 상처와 자기만의 안고 있는 삶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목마름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베데스다라는 연못입니다. 우리는 연못하면 무엇을 연상합니까? 비원에 가보면, 정말 아름다운 연못이 있습니다. 저는 해외를 많이 다녀보지 못했지만, 중국의 졸정전 같은 연못은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낼 만큼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이 연못에는 아름다움은 고사하고 인생의 막장 같은 곳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이 모여 있는 절망촌 같은 곳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고칠 수 없는질병을 가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마 유명하다는 병원, 용하다는 의사 다 찾아다녀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좋다는 약은 다 써봤을 겁니다. 그러나 별 효험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의 의술로는 가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베데스다 연못가는 마지막으로 실오라기 같은 한 가닥 소망을 붙잡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얽힌 전설이 있었는데, 무슨 내용입니까? 3절(하)~4절. “ ...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그 연못은 가끔 물이 솟아오르는데, 천사가 내려와서 목욕을 하는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구든지 물 속에 뛰어 들어가면 무슨 병이든 고침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건 아마도 미신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요즘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간헐천(Intermittent Spring, 이따금 물이 솟아오르는 온천)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혹 그 온천수 때문에 병을 고친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상황으로 추측컨대 물이 솟아오르는 것도 드문 일이고, 그런다 할지라도 불치병 환자를 고치는 치유의 역사가 나타날지는 미지수입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단 한 명만 고침 받는다는 겁니다. 마치 로또 복권 맞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이 815만분지 1이라고 하죠. 수학적으로 제로나 마찬가지의 확률입니다. 전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헛된 소망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현실이 어려워도 견딜 수 있습니다.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으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장 비참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헛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소망이라고 붙들고 있지만, 그 소망은 성취하기도 어렵고 성취해도 나중에 헛된 것임을 알게 될 때 더욱 더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그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밀리고 밀려 막장과도 같은 그곳에 온 사람들인데, 거기서도 자기들끼리 경쟁을 벌여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처럼 같은 처지끼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마땅한데, 살벌한 경쟁을 벌이며 서로를 경계해야 됩니다. 그것도 ‘헛된 소망’을 위해서 말입니다. 베데스다라는 이름이 무색합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란 뜻이건만, 자비는커녕 살벌한 경쟁만 난무하는 곳입니다.
이 베데스다에 들어간 예수님은 그들 중의 특히 한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5-6절입니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누구를 보셨다구요. 서른여덟 해된 병자를 보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 이틀, 1년 2년이 아닌 38년 동안 병을 앓면서 차도가 없었다면 절망이 아닙니까? 38년 된 병자는 어렸을 때부터 육체적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심리적으로도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생각 때문에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한가닥 실낫 같은 기대를 가지고 베데스다 연못까지 온 것, 사실이지만, 여기에 머무는 동안 그가 가졌던 기대와 소망은 이제 사라진 채, 자신도 모르게 ‘만성 의욕 상실증’에 걸린 버림받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말씀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의 이 물음은 얼핏 생각하면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가 38년 동안이나 병마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고 물으셨으니까요. 38년이나 병으로 누워만 있던 사람이 병 낫기를 바라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신 참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병이 나아 새로운 몸이 되고자 하는 ‘의지’ 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입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그의 말 속에는 두 가지 생각, 불평과 핑계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38년 동안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불평이고 둘째는 항상 자기보다 한발 앞선 사람에게 기회를 빼앗겼다는 핑계입니다. 그는 의욕상실증뿐 아니라 자기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핑계와 매사에 불만 불평하는 병까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핑계병에 걸렸던 것이 그 환자뿐이었습니까? 여기 모인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문제를 만날 때마다 남에게 책임전가와 불만 불평을 쏟아내지는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그와 나에게 연민어린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새로운, 전혀 믿을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족도 포기했습니다. 세상도 더 이상 그를 품을 수 없는 이 절망이 서려있는 베데스다 연못에 다가오신 예수, 그 분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도대체 누구이길래 38년씩이나 자리에 누워 지내는 이 사람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고 명령을 할 수 있습니까?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가 쓴 "그 이름" 이라는 시를 아십니까?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예수 오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뇌성마비에 걸려 몸을 쓰지 못하는 한 자매에게도 예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노래한 그 노래들은 지난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수없이 많은 노래들의 사연들을 보면 꼭 예수 이름 때문에 복 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오히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름과 고통의 한 복판에서 이 이름하나 때문에 위로 받고 용기를 얻었고 힘을 얻었던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떤 분은 병상에서 그 예수를 그 이름을 부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형수로 죽어가면서 뒤늦게나마 그 이름 예수를 믿은 것에 너무 감격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은 건축자가 내버린 돌맹이처럼 하찮게 내버렸지만 어떤 사람의 가슴속에는 그 것이 어느 보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귀한 보석으로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도대체 예수가 누구길래 역사 속에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불렀겠습니까? 도대체 그 이름, 하나를 위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명예와 재산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다 내던져 버릴 수 있습니까? 그 이름 속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는 것입니까?
첫째 그 이름 속에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말은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마도 TV 뉴스나 혹은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밀엽꾼들의 잔혹한 행위에 대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야생동물을 잡기 위하여 산 속에 불법으로 수십 개의 덧을 놓아서 밀엽을 하는 내용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밀엽꾼들이 설치한 덧에 걸려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발이 짤려져 나가면서 몸부림치고 있는 동물의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언젠가 새끼를 벤 어미 산돼지가 밀엽꾼들이 설치한 덧에 걸려서 발버둥 치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점점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사탄이 설치한 죄와 사망의 덧에 걸려서 신음하며, 발버둥 치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그렇게 점점 죽어 가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죽음의 덧에 걸려서, 죄악의 덧에 걸려서 발버둥 치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던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분을 보내셨습니다. 그 죽음의 덧에 걸린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그 죽음의 덧인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고, 마침내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있었던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죄악의 덧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가 메시아의 구원의 역할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임마누엘은 동행의 역할을 나타내는 이름인 것입니다. 임(im)은 함께, 마누(manu)는 우리와, 엘(El)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고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평생에 동행하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누군가 내 곁에 함께 있어줄 때, 얼마나 든든하고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 임마누엘이라는 의미 속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히13:5의 말씀에 보면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 과연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never’입니다. '결코'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겠다는 말입니다.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말입니다.
35년 전 핏덩이 채로 스웨덴에 입양된 고아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옷에는 ‘박서애’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애는 스웨덴에 도착하는 순간 더 이상 서애일 수가 없었습니다. 양부모가 이미 지어놓은 ‘아스트리드 트로직’이라는 이름으로 스웨덴에서 살다가 24세가 되던 해에 자기를 버렸던, 조국이면서도 조국이 아니기도 한 대한민국을 처음으로 찾았습니다. 그리고 조국이 아니면서도 조국인 스웨덴으로 되돌아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는데, 그 책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친 엄마는 나를 정말로 사랑했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자기를 버린 비정한 친어머니를 자기를 사랑했기 때문에 버렸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용납하고 수용하며 이해하고 납득하기까지 그녀가 삼켜야 했던 배신감과 고통의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던 고아가 설령 어머니를 용납하고 화해와 용서를 선포했다 할지라도 자기 자기자식을 버렸던 어머니의 행동은 정당화되지도 않고 정당화될 수도 없고 또 정당화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미가 자기 자식을 버릴 때 왜 사정이 없었겠습니까? 왜 이유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정과 이유가 어떠하든지 간에 부모가 자식을 버린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잖습니까?
사49:15에 보시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여인이 자기가 난 자식은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 롬8:32절 보시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무슨 말씀인가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는데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무엇인들 안 주시겠냐는 말입니다. 목숨까지 던지신 분이 무엇이 아까워서 당신의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외면하시겠습니까? 이것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역시 이 자리에 아직도 예수를 모르는 분이 계시면 혹시 그 예수를 믿고 싶지 않으십니까? 내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 살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예수를 우리가 어떻게 영접을 할 수가 있습니까?
요1: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마음의 문을 약간만 열어도 됩니다. 그다음은 걷잡을 수 없는 은혜가 밀고 들어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들어오시기 위해 마음의 문을 노크하고 계십니다. 마음 문을 열기만 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의 물결이 밀고 들어올 것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아직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내 힘과 노력으로 하려고 힘겹게 살아가던 분들이 있다면 오늘 이 순간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초대하시고 영접하십시오. 결단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시고 자녀됨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며 살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분의 나의 자격을 묻지 않습니다. 너 어디 출신이냐, 어 어느 학교 나왔, 무엇을 했고,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기만하면 내 인생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기 38년 동안 세상도 가족도 등진 이 인생은 이제 정말 화려한 외출을 합니다. 그를 에워쌓던 모든 거추장스러운 짐을 다 벗어던지고 진리이신 예수로 인해 자유함을 얻습니다. 물이 동하는 연못에 들어가지 않아도 됩니다. 이젠 누굴 핑계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자유합니다. 오늘 그 절망하던 한 인생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여러분을 초대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축복하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도 그 복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젠 새로운 인생의 길을 주님과 함께 걸아가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연약함이 있습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인해 염려가 있습니다. 불안한 우리의 미래를 앞에 놓고 두려움에 갇혀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마져도 꺼뜨리시기를 심히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그 예수를 내 인생에 동행자로 삼아 보지 않겠습니까?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분은 내 인생에게 다가와 우리를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38년만의 외출, 그것은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의 걸음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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