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겔37:1-14. 2014년 10월 26일. 주일 설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10-26 |
조회: 1893
지난 번 중미에 있는 아이티에 강도 7의 지진이 났습니다. 아이티 인구가 그당시 900만이 되는 아주 조그마한 나라죠. 이 나라에 지진이 일어나니까 한 순간에 2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땅속에 건물더미에 깔려 주검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30만이 넘는 사람들이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제가 1년 후에 그곳을 가보았는데 그 참혹상은 그대로였습니다. 페허가 된 도시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는 잿빛 도시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울고 웃던 마을 주민들이 한 순간에 싸늘한 주검이 된 그 절망의 현실 앞에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인생의 허무감.. 의욕상실감 같은 극단적인 것들이 밀물처럼 밀려 올 것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살아남은 사람도 콜레라가 거세게 휘몰아칠 때, 더 이상 버티기 힘든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의 일행이 콜레라가 창궐하는 ‘부즈’라는 1200m 고지 속에 있는 마을에 갔을 때입니다. 그 깊은 산속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마치 원시 시대로 돌아간 느낌을 받은 것처럼 마을의 광경을 보고 아픔을 느꼈습니다. 물이 귀하다보니 콜레라가 마을 전체를 덮는 그런 고통이 와도 손도 못쓰고 죽음을 운명처럼 바라보는 그들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눈의 초점을 잃어버린 채로 여기저기 누워 쓰러져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것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삶을 차라리 포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젊은이도 있었어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희망이 되십니다. 외쳐도 ‘Jesus is your hope’ 예수님은 당신의 희망이 되십니다. 외쳐도 ‘No hope, No hope’ 희망 없어요. 희망 없어요. 이런 현지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제 숙소에 들어와서 며칠간의 일들을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 사람들이 죽음 앞에 저렇게 무덤덤할까, 아마 지진의 피해로 수많은 죽음을 보고 이젠 그것이 낮설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은 우리의 모든 희망을 빼앗아 가는 사건입니다. 일체의 희망을 등진 죽음의 상징은 마른 뼈일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어느 날 하나님의 신에 이끌려 간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이 가득 차 있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풍화되면서 바람만 불어도 가루로 날아갈 것 같이 마른 뼈들이 골짜기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즉각적으로 그것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인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에스겔이 이 환상을 접한 주전 580년경 이미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패망하여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채 모든 희망을 접은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 환상의 골짜기에서 주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의외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선지자의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 셈이 되고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너무 현실성이 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절묘한 제 3의 대답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3절)였습니다. 속으로는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뼈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말라도 너무 말랐습니다. 너무 오래되어 최악입니다. 1%의 가능성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죽은 자들에게 전도하고 설교하라는 것입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여기 건대 캠퍼스나 로데오 거리에 가서 전도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벽제 화장장이나 서초동에 있는 화장장에 가서 화장한 후 남은 그슬린 뼈들을 향해 전도하라고 하면 그것이 할만한 일입니까?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이 왜 우리를 모르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신 의도는 이 뼈들을 살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정말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답변을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을 보면 마찬가지 답변을 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절망뿐입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을 살아갈 때, 영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에는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많아지는데 이 세상에는 술집이 늘어가고, 우리가 전도한다고 사람들이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 안에 똘똘 뭉친 오만이 복음을 전혀 받아들일 것 같지 않습니다. 자아의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것 같습니다.
우리는 현대판 마른 해골골짜기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철저한 절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비관 속에서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관적 낙관주의자입니다. 절망을 절망으로 결론을 내고 만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 것은 절망을 확인하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희망을 가지도록 하신 질문입니다. 어떤 최악의 상황도 최선의 상황으로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그 일을 시작하느냐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다면 그 상황은 한순간에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마른뼈들을 살릴 수가 있습니까?
첫째, 말씀만이 이 뼈들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4절)
4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마른 뼈들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이야기입니까. 막막하고 엄두가 안 납니다. 해골들이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가끔 말씀을 전하거나 전도할 때 상대를 고려할 때가 있습니다. 이 상황과 조건을 볼 때 “전도할 때가 아니다. 저 사람이 준비가 안 되어 거부하고 있다. 저 사람은 얼마나 박해하는지 모른다.”라고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볼 때 그것은 고려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황과 여건을 보지 말고 그냥 말씀을 전하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에 경계선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도구에 불과해서 아무리 기가 막힌 말을 전한다고 해도 우리의 힘으로 예수를 믿게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주는 일,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편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우리는 그 대상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7절 말씀에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대언할 때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연결되었습니다. 에스겔이 한 것은 딱 한 가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위력입니다. 우리가 할 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다른 머리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능력이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언변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에스겔이 한 것은 말씀을 대언한 것뿐입니다. 그대로 전달했는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 시대는 진리에 굶주려 순수한 복음을 듣고 싶어 합니다. 진리를 그대로 전하면 진리가 죽은 영혼을 살릴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여러분 안에 일어나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성령께서만이 이 마른 뼈를 살리실 수가 있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말씀의 대언을 따라 마른뼈들이 맞추어 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가죽이 입혀짐으로 사람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둘째 처방이 지시됩니다. 9절입니다. 이번에는 생기에게 대언하라는 것입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생기가 누구입니까? 이 생기는 14절에서 정확하게 말씀해주십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 영’은 성령입니다. 10절에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마침내 마른 해골 떼가 군대가 되었습니다. 명확한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는 환상적인 그림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생기가 들어가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말씀과 성령을 통해 이런 엄청난 역사를 맛보는 현장이 아닙니까? 저는 사실 이런 기적을 주일마다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주일은 완전히 공동묘지에서 해골들을 향해 설교하는 심정일 때가 있습니다. 설교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입신중인 교우들이 적지 않게 보입니다. 심지어 코까지 고는 분들이 있어요. 이 예배가 방송으로 나가는데 그 코소리가 나면 어떻겠습니까? 제 눈에는 그분들이 마른 뼈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그래도 주의 말씀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 저의 소명이니까 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말씀 선포가 진행되면서 여기저기서 깨어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머리가 들립니다. 얼굴에 홍조가 돌아옵니다. 눈에 광채가 나기 시작하고 어떤 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입에서 찬양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끝까지 무표정한 시체로 들어왔다가 축도와 함께 다시 꼭같이 무표정한 시체로 나가는 분들도 없지 않아 눈에 띕니다. 이런 분들의 유일한 소망은 축도가 빨리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체들의 행렬 곧 상여 행렬사이로 살아난 성도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예배당에 들어 오실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얼굴에 성령의 빛이 있습니다. 걸음걸이에 새 힘이 있습니다. 입술에 찬양이 흐르고 있습니다. 부활한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 보람 때문에 목회합니다. 저는 이 보람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동일한 보람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생명은 신비합니다. 같은 씨앗이라도 생명이 있는 씨앗은 자라지만 생명이 없는 씨앗은 썩습니다. 생명이 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봄이 오면 생명이 있는 것들이 바람이 불 때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성령이 바람처럼 불처럼 일어나니 생명들이 반응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게 된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입니다. 내 안에 생명의 부활이 있다면 말씀을 받을 때 반응을 합니다. 시들한 나무에 물을 주면 살아나듯이 주일에 말씀을 들으면 생명이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이 살아나는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죽을 것 같이 괴로웠어도 주일에 그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반응할 때 비상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이 살면 죽어도 살겠고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내 안에 부활의 영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 안에 생명의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기 바랍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생기가 들어가야 산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들어가 생명이 되어 내 영혼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전천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른 뼈가 군대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모습입니다. 바람이 불면 먼지처럼 휩쓸려 다니던 소망이 없던 뼈에 살갗이 붙고 뼈들이 맞춰지고 생명이 들어가 군대가 된 것은 부흥의 환상입니다. 여러분도 예전에는 마른 뼈와 같았지만, 생기가 들어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되고 회복되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쓰임 받는 도구가 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13절의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이것이 부흥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바라보면 그 안에 진정한 희망이 있습니까? 겉으로는 평안해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거짓 평안에 속아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고, 살아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은 자와 같이 사는 사람들의 실상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자녀, 가족, 이웃을 바라보십시오. 에스겔이 본 비전은 가장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회복과 부흥이 일어나는 꿈입니다. 도무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행하기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 부흥의 기운이 식어지고 있고, 이러면 안 된다는 자성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겉으로는 돌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살아있지 않아 죽은 상태로 있는 혼란한 시대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은 생명의 역사,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일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고, 복음의 능력과 진리가 우리 안에 들어와 내적인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내 인생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이전에는 마른 뼈와 같고 소망이 없었지만 이제 내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변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입어야합니다. 행2: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한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환상을 보든, 예언을 하든, 꿈을 꾸든, 이 세 가지 표현은 한 가지 의미를 삼중으로 표현하며 강조한다고 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고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무언가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꿈이 있다는 겁니다. 미래가 있다는 말입니다. 목사의 꿈이 무엇이겠습니까? 성도의 꿈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꿈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수님 탄생 수백년 전에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바라보면서 예언한 내용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기쁜 소식을 듣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병들고 상한 자들이 고침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갇힌 자가 놓임을 받고 눌린 자가 자유를 얻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상처입고 고통 당하는 자들이 위로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이루어지고 완성되어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영광스러운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지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이 꿈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요, 이 꿈은 성령이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꿈입니다.
이 꿈은 너무나 황홀한 꿈이기에 이 꿈 때문에 한 생을 완전히 주님 앞에 자신을 몽땅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꿈 때문에 숨을 쉽니다. 우리는 이 꿈 때문에 기뻐합니다. 우리는 이 꿈 때문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꿈 때문에 세상에서 기가 죽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꿈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독특한 삶을 선택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젊음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야망이나 세상적인 꿈을 접어두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을 위해서 한평생을 불태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도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건강마저도 돌보지 않다가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꿈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를 활활 태우다가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신앙은 더 이상 옛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마른 뼈와 같은 인생 안에 생명의 말씀을 불어넣어 다시 살아나게 하고 하나님의 군대로 쓰임 받게 하는 일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에 콜레라가 창궐하는 아이티 한 산속에서 ‘No hope, No hope’ 희망 없어요. 희망 없어요. 라는 절망의 소리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날 거기에 함께했던, 유엔 짚차에 탔던 5명의 사람들 가운데 원더걸스의 선애 자매는 거기서 복음을 전하던 한 전도사와 결혼을 하고 걸그룹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그 자리를 내려놓고 목회자의 사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엔 직원으로 함께 왔던 헬렌이라는 분은 아이티 임기를 마치고, 뉴욕에 있는 본부에 사표를 내고 다시는 가고 싶지 않는 아이티에 평신도 선교사로 들어와서 엄청난 사역을 합니다.
이번에도 한국에 14명의 어린이 심장병 환자를 데리고 와서 연대 세브란스와 삼성병원에서 수술을 성공적으로 하는 일에 헌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와 통역을 하던 쥬디라는 청년은 이번에 양평에 있는 아세아 연합 신학대학원에 석사 과정의 인터뷰를 마치고 아내와 함께 3년 동안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연예인 가운데 김원희 집사님을 위시해서 공부를 마칠 수 있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숙소를 전주 안디옥 교회가 무상으로 집을 내 주었습니다. 마치 무덤을 가르고 나온 자들이 주 앞에 이처럼 귀하게 쓰임을 받는 모습을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주님께서 도전하십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주께서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공동체를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죽었던 자에게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라고 이 명령을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이 땅이 예수의 땅, 소망의 땅, 부활의 땅으로 바뀌는 축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이제 이 소망을 끌어 않고 새벽 날개를 펴서 내일부터 시작하는 새벽기도회에 나오십시오. 반드시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응답으로 역사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세상에서 복된 복음을 힘 있게 전하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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