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행13:21-23. 2014년 10월19일 주일 예배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10-19 |
조회: 1586
저는 인물 설교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부흥회를 인도할 때마다 요셉이라든지 야곱, 그리고 엘리야, 삼손, 올해는 요나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우리를 감동을 주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참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헌신짝처럼 팽게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다윗은 특별히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다윗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라는 이름이 995회 나옵니다. 컴퓨터로 조사해 보니까 995회, 그만큼 다윗이라는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에 사람의 이름 중에는 최고로 많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말씀을 22절의 말씀을 보면 다윗을 무엇이라 소개합니까?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여기에서 '마음에 합한다'는 말은 '마음이 맞는다', '마음에 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듯이 마음이 맞는 사람과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 없어도 잘 통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하여 그와 같은 마음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다윗이 어떠한 사람이길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부러운 마음마저 듭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영웅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그가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어 나라를 통일하는 큰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그도 치명적인 실수를 한 인물이 아닙니까? 밧세바와의 불륜으로, 정말 하나님 앞에 불충한 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도 인간관계에서 느껴서 아시지만, 직장 생활이라든지, 회사에 다니면서 상관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일하는데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면 굉장히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니 너무나 부러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자신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큰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위해서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하면서 아브라함을 들고, 그 다음에는 다윗을 들었습니다. 3,000년 이상 되는 구약의 긴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혈통이 이어져 내려 왔는데, 그 혈통에 관계되는 모든 사람을 제외하고 오직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만 언급합니다. 즉 다윗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 길을 닦아 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같이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은 다윗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다윗이 한 일을 우리가 대신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만 특별히 맡기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보면서 한 가지 욕심은 낼 수 있습니다. '나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없을까?‘ 이런 소원은 성경을 읽으면서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그럼 이 시간 도대체 다윗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란 인정을 받았습니까?
1. 하나님 마음에 합했다는 것은 회개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큰 죄는 밧세바와의 간음사건이 아닙니까? 그 여인은 자기의 충성스런 부하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그런데 후에 밧세바에게로부터 아이를 배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놀란 다윗은 자기의 죄를 가리려고 우리아 장군에게 휴가를 주어서 집으로 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아는 자기의 부하들이 전쟁에서 싸우고 있는데 자기만 집에서 편히 쉴 수 없다고 하면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문 밖에서 잠을 잤습니다. 당황한 다윗은 우리아를 최전방으로 보내서 전사케 했습니다. 그리고는 밧세바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완전 범죄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왕궁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비유를 들어 왕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던 다윗의 범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순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면전에서 얼마나 많은 모욕과 무안을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 죄를 인정할지라도 이처럼 직선적으로 그것도 면전에서 모욕을 당하게 되면 누구든지 펄쩍 뛰며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렇게 직언을 하는 사람을 원수처럼 생각하기 쉬운 것이 우리 사람들의 좁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가리켰을 때 나단 선지자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권세의 칼을 들었으나 왕의 체통과 모든 위신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믿음이요, 이것이 참된 용기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완벽한 인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도,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적 타락의 존재인 우리가 그래도 이 정도 살아가는 것, 그거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범죄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사울 왕도 역시 하나님께 범죄 하였습니다. 사울이 범한 죄를 보면 다윗보다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가지고 오지 말라는 전쟁 노획물을 가지고 왔고, 그는 하나님께서 제사장이 드려야 될 제사를 자기가 성질이 급해서 드렸을 뿐입니다.
다윗의 죄와 사울의 죄를 비교하면 윤리적으로 보면 다윗의 죄가 훨씬 더 큽니다. 그런데 다윗은 죄짓고도 망하지 않고 흥한 사람인데... 사울은 그가 지은 죄로 인하여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 있습니까? 다윗은 회개할줄 알았습니다. 정직하게 자기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자기를 고치고... 곪아터진 상처를 아프게 잘라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끝내 왕의 체면 때문에 자기의 죄를 지적하는 사무엘 선지자를 대적하고... 그의 마음은 더욱 강퍅해졌습니다. 결국 사울은 하나님께 버린 바가 되고 말았습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있다면 그것은 회개하지 않는 죄입니다. 어떤 면에서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강퍅한 마음이 되는 것은 마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어떤 사람이 갑니까?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의로운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지만, 예수님의 피로 정결케 된 의인들이 가는 곳입니다. 의로와서 의인이 아닙니다.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거예요. 의롭지 않지만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의롭다고 칭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죄를 지으므로 망하는 게 아니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망한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지었지만 내 마음이 더 겸손해지고 더 애통하게 되고 내 마음이 더 하나님 앞에 고통하는 마음이 된다면, 하나님은 그를 더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성령이 역사하시고 예수의 피가 그를 씻어 주십니다. 죄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수 안 하는 사람이 없어요. 의인 노아도 포도주를 마시고 그의 자녀들 앞에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브라함을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혈기가 왕성해서 사람을 쳐서 죽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수없이 주님을 부인하고 배반했으며, 바울도 화를 내고 싸움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쓰신 것은 제 2의 기회, 제 3의 기회, 제 4의 기회를 주셔서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회개는 그 누구보다 더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다윗이 완벽해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아닙니다. 그는 왕이지만, 겸손한 자리에 있었고, 선지자 앞에 책망을 달게 받을 줄 알고 그 부끄러움 앞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했기에 하나님이 그를 이처럼 기뻐 받으신 것입니다.
2. 무엇보다 그가 하나님 마음에 합했다는 것은 기도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대부분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을 보면 대부분 탄식으로 시작을 하다가 찬양으로 마치는 것을 봅니다. 다윗은 젊었을 때부터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들을 수없이 지나쳐 왔습니다. 오랜 시간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면서 인생의 밑바닥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그는 어린 소년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입니다.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싸움터에서 그가 세운 전공으로 모든 이스라엘 앞에 추앙을 받던 영웅이었습니다. 너무 특출해 버리니까 왕으로부터 질투를 받아서 한 순간에 ?겨 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연단하기 위해서 주신 한 때의 괴로움이었는데 그 한때라는 것이 수십 년처럼 보였습니다. 그 당시 그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그가 쓴 시편의 한 구절에서 당시 그의 심정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시102:6,7절에 보면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광야의 당아새, 황폐한 곳의 부엉이, 밤새도록 외롭게 앉아 떨고 있는 지붕위에 참새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그 감정은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고독하고 처절하였는가를 쉽게 느낄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 처절함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기 쉬운데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자리입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과 거짓믿음을 가진 사람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처음에는 좌절하고 항의도 하지만 얼마 후에는 진지하게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탄식에서 기도로 돌아서는 것은 고통 속에서 가장 먼저 체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기도 시간을 통해서 드디어 ‘내게 무슨 죄가 있나’ ‘내가 무엇을 회개하지 않았는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다윗은 시13:3절에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에는 육신의 병을 치료해 달라는 것 뿐만 아니라 고난의 자리에서 영혼이 몹시 어두워져 있으니 영혼을 밝게 해 달라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육간에 사망의 잠을 자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다윗이 비참하게 죽어버리면 하나님을 안 믿는 원수들이 기뻐하며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탄식으로 버무려진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니까 지금의 환경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문제는 그대로 있는데 견딜 수 없는 찬양이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하는 중에 다윗은 지금까지 지내온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 온 것을 자신의 완전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도 후대하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반드시 후대하시리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그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찬양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신비스런 현상입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과 자기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행동하시는 것은 무엇보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믿음을 갖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찬송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구원과 인자하심을 찬송하게 하는 신비스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탄식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의 탄식은 기도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그 기도가 당신을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의 자리로 인도하고 있습니까? 그 확신의 믿음이 당신을 찬송하는 천사로 만들고 있습니까? 세상에는 당신의 찬양을 멈추게 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병도 실패도 죽음도 심지어 마귀도 당신의 입을 틀어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 求 이런 다윗을 어떻게 하나님이 싫어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3. 무엇보다 그가 하나님 마음에 합했다는 것은 하나님 모시기를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삼하7:2절에 보면 그가 왕으로 있을 때 세상의 것을 다 누릴 수도 있는 그 자리이지만, 그 마음이 편하지 않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 무슨 말입니까? 나는 팔자 좋게 호의호식하면서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초라한 휘장 안에 거하시는 것이 늘 죄송했고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할 만큼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자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떠났고, 그 결과 이 언약궤는 적군인 블레셋의 손에 넘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 이 언약궤가 블레셋의 손에서 다시 돌아왔지만, 어느 누구도 언약궤를 돌아보지 않아 기럇여아림에 무려 70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그곳에 성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왕궁에 앉아 있는 이 다윗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아직도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는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기는 도중에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운반하던 도중 운반 책임자였던 웃사가 실수를 저질러 죽는 사건이 발생하여 3개월이 지체되었지만, 다윗은 재차 율법의 절차를 따라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오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청년 서너 명만 보내도 메고 올 수 있는 책상 크기만한 언약궤를 옮기기 위해 무려 3만 명이나 동원했습니다. 만약 오늘날 3만 명이 아니라, 3,000명, 아니 300명을 동원해서 책상하나만한 언약궤를 옮긴다면 아마 여기저기에서 별의별 소리가 다 나올 것입니다. ’이렇게 조그만 것 하나 옮기는데, 이렇게 전교인을 동원할 필요가 있느냐, 또 성가대를 동원하고 오케스트라를 동원하는 이유가 뭐냐, 청년들 몇 명 동원하면 될 텐데, 꼭 이렇게 해야 하느냐‘ 등의 말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조그마한 언약궤 하나 옮기는데, 무려 3만 명이나 동원했습니다.
다윗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백성들과 함께 크게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덩실 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속살이 드러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기뻐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정을 봉헌해 드리는 소망이 얼마나 얼마나 컸던가를 보게 됩니다. 자신의 시대에 성전을 봉헌해 드리지는 못했지만, 다윗은 정말 40년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쌓아놓은 보화와 재물,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지을 성전을 위하여 하나도 남겨놓지 아니하고 다 바치고 갔습니다. 자기 것을 남겨 놓고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을 다 쏟아 놓는 헌신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헌신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매일 신실하게 사는 삶을 말합니다. 헨리 나우웬의 말을 빌리면, 가장 위대한 도전이요, 매 순간마다 결정해야 할 신실한 삶입니다. 그는 덧붙여 말합니다. "당신이 먹고 마시고 일하는 것이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 그만 둬야 합니다." 곧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리고자 하는 신실한 자세가 헌신인 것입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 자신과 우리 모든 지체를 그분에게 거룩하게 드리도록 하기 위해서 구원했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우리는 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사랑 하는 여러분!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인생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은 골리앗을 죽인 영웅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그가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어 나라를 통일하는 큰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그에게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잘못을 저지른 후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 중심의 삶을 통해 얼마나 멋지게 살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현재 이스라엘 국기에 다윗의 별이 새겨져 있을 만큼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인물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가득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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