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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차든지 덥든지 계3:14-22. 2014년 10월 12일 주일 예배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10-13 | 조회: 1582
요즘 국제간의 영토를 둘러싼 갈등은 전쟁까지 초래할 만큼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지금 중국과 일본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센까꾸 열도문제, 그리고 우리의 독도를 일본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치열한 국제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엄청난 얼마 전에 한반도 크기의 7배에 달하는 엄청난 섬이 바다 한가운데 생겼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땅을 발견했으니 얼마나 흥분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조사에 착수하고 인공위성에서 사진을 찍어 급히 확인해 본 결과 그것은 쓰레기가 저절로 모여서 만들어진 섬이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전 세계에서 버려진 쓰레기들이 바다의 조류에 저항 없이 이리저리 휩쓸리다 한곳에 모여 섬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조류가 만나는 곳에 쓰레기 더미는 난파선의 무덤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법칙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조류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쓰레기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시대의 조류에 흽쓸리고, 세상의 힘에 굴복해 떠다니다 보면, 저절로 쓰레기 섬, 난파선들의 무덤에 도착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 조류에 저항 없이 쓸려 다니는 자의 종말은 세상조차 외면하는 무익한 존재가 되는 것뿐입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잊은 채, 그 사명을 망각하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 사라져 간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계시록에 나타난 7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마음 판에 잘 새겨듣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5-16절 말씀을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여기 토하여 버리리라는 이 단어는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이는 당신의 핏값으로 사신 교회를 향한 주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란 무엇입니까?
1)주님이 사랑하시는 우리입니다./
2)죄에서 구속해준 우리입니다. /
3)하나님을 위해 그의 나라와 백성으로 삼으신 우리입니다./
4)하나님을 위해 그의 제사장으로 삼으신 우리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님은 설 혹 교회가 조금 잘못된다 해도 절대 실망하지 않으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부터 3장까지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십시오. 한 두 교회는 그런 대로 괜찮은 교회지만 나머지 다섯 교회는 형편없는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런 교회들을 놓고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마지막 기대를 걸고 회개하라 고 촉구하셨습니다. 회개하고 이기기만 하면 이러이러한 상급을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시기까지 했습니다. 교회를 그 만큼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주께서 얼마나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토하여 내치겠다” 이런 단어를 사용을 하셨겠습니까? 왜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그들에게 말씀하셨을까요? 다시 말하면 라오디게아교회가 어떠한 상태이기에 주님께서 그들을 이처럼 책망하셨을까요? 오늘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1. 이 교회의 문제는 생명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15-17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이 말씀은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이 극심하게 형식화되었음을 질타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라오디게아는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교통의 요충지였고 모직공업단지가 있었고 의과대학까지 있는 도시였습니다. 또한 그 당시 10여km 떨어진 히에라볼리라는 곳에서 온천수를 끌어다 온수를 사용할 정도로 발전한 도시였습니다. 또 기원 60년에는 대지진이 발생하여 로마가 재건을 돕겠다고 나섰지만 자력으로 재건하겠다며 거절했을 정도로 자존심과 부요와 풍부를 누린 도시였습니다. 거기다 다른 교회와 달리 그 시대의 핍박도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라오디게아교회는 신앙이 미지근하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 아니면 내 입에서 뱉어버리리라”고 한 것입니다.

실제로 히에라볼리에서 끌어온 온천수는 10km를 흘러오면서 미지근하게 됩니다. 게다가 물속에는 철분과 석회질이 많아서 그 물은 마시기에 역겨웠습니다. 그래서 내 입에서 내치리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는 아주 무서운 책망입니다. 이것이 비극이 아닙니까? 열정이 사라진 교회 그래서 토객질하고 싶은 교회 - 정말 고통이 아닙니까? 삶을 살아가면서 최대의 저주는 ‘이제 더 이상 쓸모없는 인생이 되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 다닌다고 다녔는데 쓸모없는 교인이 되어 주님의 입에서 토하여 내쳐진다면 그것처럼 비참한 상태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교인인줄 알고 온 맘과 삶을 다 드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라오디게아 교회로 드러난다면 그 교회를 다니며 삶을 바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2. 그리고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17절)

17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사람이 아무리 망가져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아상찰의 능력만 있으면 우리는 그에게 아직도 희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최후의 비극은 자신을 돌아 볼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즈음 말로는 “자정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신을 돌아볼 이 안목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학자들은 교만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들을 둘러싼 외적인 풍요의 환경이 자신을 살피는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자신과 교회가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이만하면 자기들을 따라올 자가 없고 모든 면에서 넉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같은 자만에 빠진 이들을 주님께서는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부자라고 떠들고 다니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 먼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벌거벗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실상은 영적으로 피폐해져 있고 엉망인데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성도 여러분! 요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신앙의 절박함이 점점 식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전보다 많이 풍요로워지고 유식해졌다고 당연히 신앙도 좋아졌으리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옛날 한국초대교회 성도들은 가난하고 무식했지만 순수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한겨울 추위에도 수십 리, 심지어 수백 리를 걸어서 교회에 갔습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핍박과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산에서 소나무를 붙잡고 온 밤을 새우고 금식까지 해가며 메달렸습니다. 말씀대로 성결하게 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유혹이 와도 눈앞의 이익 때문에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신앙의 양심을 지켰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 우리가 이만큼 살고 있는 겁니다. 그 덕분에 부유해졌고 그 덕분에 유식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부요함과 그 유식함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혹시 라오디게아교회 교인들처럼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요? 아니, 이미 그런 가운데 젖어 있는 것은 아닌가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어디 한 구석도 칭찬을 받을만한 구석이 없는 이 열정을 상실하고 자만에 빠져 정말 토하고 싶은 이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십시오. 이 교회를 향해 주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이가 이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충성됨 그리고 참됨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신실성을 뜻하는 단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신실하지 못했던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가장 도전적인 주님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의 근본으로 나타나신 그분의 인상은 만일 이 교회가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고 응답하기만 하면 아직 창조의 중보자이신 그분의 창조의 능력으로 새로워질 희망을 보여주시기 위한 모습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이 바로 우리의 새 창조의 희망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이가 우리를 다시 새롭게 고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분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그리고 우리 교회를 향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19절에 말씀을 합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여기 이 미덥지 못한 자들에게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을 합니다. 토하고 싶을 정도의 역겨움이 있는 이들을 향해 지금 주님이 뭐라는 것입니까?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의 본심입니다. 지금 이들이 첫사랑, 첫 열심 다 식은 것 사실입니다. 그리고 토해내고 싶은 역겨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놓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뭐라고 책망하십니까?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 이것이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아침! 이것 하나 잊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에서 실수도 실패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능력은 자주 너머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에서 얼마나 빨리 일어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빨리 회개하고 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18절에 보십시요.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교만하게 만든 3대 산업을 염두에 둔 풍자적 표현입니다. 여기 ‘불로 연단한 금’ 즉 온전한 신앙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리고 ‘흰옷’은 예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얻은 의의 옷(칭의)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영적으로 벌거벗은 겁니다. 그런 상태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안약’은 바르라는 것은 영안의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열리지 않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거기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내 삶과 내 가정과 내 인생속의 가정에 공동체에 얼만큼 영향을 미치는지 볼 수 없습니다. 그 눈이 열려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 합니다. 내 눈앞에 전개되는 것 일어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다 인줄 압니다. 우리는 평안히 살고 돈 잘 벌고 일이 잘되면 괜찮구나 그렇게 생각 합니다. 하나님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우선순위는 하나님은 그 사명을 따라 사느냐 그렇게 안 사느냐 그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영의 눈이 열린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 합니다. 영의 눈이 닫혀버리면 자기 속에 어떤 모습이 있는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잘 알지 못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을 하십니다. 20절을 다 같이 보세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문 밖에 서 계십니다. 여기 ‘서 계신다.’는 것은 벌써 오래전부터 쉼 없이, 계속하여 서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마음 문 밖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먹을 수 있습니다. 여기 ‘더불어 먹는다.’는 것은 함께 식사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비싼 식사 한 번 먹는 비용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점심식사 한 끼 먹는데 22억 원을 내야하는 식사가 있습니다. ‘투자의 귀재’라고 불리는 워렌 버핏은 매년 자신과 점심식사 하는 것을 경매로 붙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수익금을 빈민구호단체인 글라이드에 기부하는데, 버핏은 15년 동안 이런 일을 해 왔습니다. 올해에는 그 경매에서 약 217만 달러(약 22억)를 써낸 싱가포르의 앤디 추아라는 남성이 낙찰을 받았습니다. 낙찰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친구 7명을 대동하고 워렌 버핏과 뉴욕의 한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점심을 먹으며 3시간 동안 버핏으로부터 투자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7명의 친구를 데리고 버핏과 점심식사 하는 것이 22억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많은 돈을 주고 버핏과 식사를 한 사람들은 그에게서 투자에 대한 조언을 듣고 점심식사 값으로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20억이 넘는 돈을 주고 점심식사 한 끼 하는 것도 괜찮은 투자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투자할 돈을 가지고 있지만 어디에 어떻게 투자해야 할지를 몰라 고민하는 사람에게 20억이 넘는 점심식사는 가치 있는 또 하나의 투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싼 금액을 준다고 해서 음식이 맛있는 것은 아닙니다. 20억이 넘는 점심식사는 식사가 주목적이 아니라 버핏으로부터 조언을 듣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냥 3시간 동안 어떤 사무실이나 강의실에서 투자에 대한 강연을 듣는 조건으로 20억을 지불할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점심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듣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조용한 강의실이나 사무실이 이야기를 나누는 데는 훨씬 더 좋은 환경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이야기에 더욱 집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강연의 자리와 식사의 자리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의 자리는 마음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유명인사와 함께 식탁에서 이런 거금을 내고 함께 식사를 해도 흥분이 되는데 그런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과 더불어 식탁에서 음식을 한다는 것, 정말 근사하지 않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회개하고 열심을 내면 어떻게 해주신다고 했습니까? 21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무슨 말씀인가요? ‘예수님의 측근’이 된다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세상에서 조금 높은 사람의 측근만 되어도 거들먹거리는데, 예수님의 측근이 된다는 게 얼마나 복된 일이겠습니까? 반드시 세상에서 승리하고, 저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상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태신자를 세우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있습니다. 이 태신자를 세우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막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불모지를 생명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나무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친 돌과 메마른 흙 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모래먼지 밖에 보이지 않는 황무한 곳이지만, 이미 심는 자의 마음속으로는 꽃을 보아야 하고, 새가 깃든 우거진 나무를 보아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영혼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으로 끈기있게 복음을 심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정말 눈물과 정성, 그리고 상상도 못하는 희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세상을 복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계절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며칠 전에 제 메일에 한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목사님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존경합니다.

바쁘신 일정 중에도 시간을 내어 회신을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또 하나의 인도하심인 줄로 믿고 소중한 인연으로 늘 기도하겠습니다. 제가 동성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된 것도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살고 있는데 지난5월부터 한국과 관련된 비지네스가 있어서 추진할려고 서울에 출장을 자주 가는데 매번 호텔을 이용하는 것을 친구가 알고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건대역 원룸을 하나 제공받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주일이 겹치는 일정이라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일과를 맞추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 건대역에서 어느 집사님이신지 권사님이 이신지는 모르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주보를 나누어 주시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외면하는 눈치였지만 그것을 받아서 숙소에서 위치 등을 확인하니 가까운 곳이라 안심이 되어서 다음날이 주일이라서 동성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건대역 주변에는 음식점의 상권으로 형성된 곳이라서 저녁에는 젊은이들의 천국이 되어 술취한 청년들이 대부분 늦은 시간까지 시끄럽게 들리는 환경이란 것을 그곳에 숙소를 만들고야 알았습니다.

주일 2부 예배를 처음 참가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하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일주일동안 그 지역의 술취한 젊은이들의 시끄럽게 느끼던 소리가 아닌 찬양을 인도하는 젊은 청년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지며 찬양 속에 거친 내 마음을 녹여짐을 느꼈습니다. 이후에 성가대 지휘자의 손끝에서 이루어 내는 할머니들(실례) 의 목소리는 내 귀와 마음을 열어 폭포수 같은 감동 이었습니다. 정말 한분 한분을 축복하며 기도했습니다. 일본에서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지만 한동안 교회를 못나가고 있었는데 동성교회 예배시간을 통해서 회복하고 있습니다. 정말 주님께 감사 드림니다. 매월 방문 할 때마다 동성교회 예배에 함께 하는 것으로 기쁨이었습니다.

자 보세요. 우리 교회 성도 어느 분이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돌렸습니다. 그 작은 섬김이 이렇게 세상을 살맛나게 한다면, 오늘 우리 한번 태신자 작정에 동참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십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이제 열정을 가지고 주의 일에 힘을 다하는 인생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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