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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우리가 힘 써야 할 일 고전9:16-19. 2014년 9월28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9-28 | 조회: 1683
‘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에서 지난 2005년 한국 갤럽과 공동으로 한국 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실태를 조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10년전에 자료라 여러 가지 변수는 있겠지만, 아마 그 때보다 지금의 상황이 더 어렵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 조사에 의하면 ‘나는 지난 1년간 누군가를 전도하여 교회에 출석하게 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설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개신교인이 26,4%였고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한 교인들이 무려 73,6%에 달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가운데 전도하는 이들은 4사람 중 1사람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4분의 3의 교인들은 소위 전도의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보고서가 한국 교회의 평균을 잘 반영하고 있다면 금년도 터치 153 새생명 축제에서도 우리 교회 출석자중 전도에 능동적 노력을 하리라고 기대되는 교인들은 안타깝지만 4분의 1정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예상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전도안하는 교인의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기대를 이루는 전도의 열매를 맺는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물어야 할 더 중요한 근본적인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복음 전도는 도대체 왜 중요한 것입니까? 바울 사도는 오늘의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만일 자신이 전도를 안 한다면 스스로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비장한 고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바울을 통해 본 복음전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복음전도는 의무입니다.
본문 16절의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 그는 여기서 복음 전도를 ‘부득불 할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좀 소극적으로 들리지 않나요? 그런데 이 대목을 NIV 영어 번역에서는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표현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전도를 피해갈수 없는 거룩한 의무로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바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대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구원은 자기 한 사람에게서 머물러야 할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나를 통해 또 다른 이웃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야 하는 것-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 전도를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사건이 되게 하시지 않고 복음 전도를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사실 바울만큼 자신의 모든 생애를 복음을 위해 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의 이야기가 9장부터 28장까지 나옵니다. 여기에 나타난 바울의 사역은 기독교 역사상 엄청난 업적입니다. 이 정도면 정말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랑할 수 있지만 자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랑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랑할 것이 있지만 그 자랑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랑할”이란 말은 헬라어로 ‘카우케마’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취한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느끼고, 그로 인해 갖는 즐거운 감정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행동에 도덕적 가치가 있다면, 그로 인해 즐거운 감정을 가진다면, 이것은 나쁜 것도 아닙니다. 좋은 것이나 잘한 것에 대한 도덕적 가치를 가지고, 즐거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이런 것마저도 포기한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4:2에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의롭다 하심’만입니까? 자신의 출생이나, 배경이나, 외모나, 지식이나 이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양 가운데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좋은 가사가 있습니다. 자랑할 것이 내게 없고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혹시 자랑할 만한 것이 생각나더라도 자랑하지 말고 자랑할 것도 다 포기하세요. 아들 자랑, 딸 자랑, 남편 자랑, 이 모두가 사실이지만 안 하는 게 덕이 됩니다. “우리 아들 아무개대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딸 수시 합격했다”, “우리 남편 이사로 승진했다” 이런 것들이 다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안 하는 게 좋습니다. 남의 아들, 딸은 재수하는데, 남의 남편은 명예 퇴직했는데 우리 집 자랑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2. 복음전도는 사명입니다.
1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바울은 물론 자의로, 자원하는 즐거움의 심정으로 전도하고 있지만 때로 이런 즐거움의 마음이 동반되지 않는다 해도 전도는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그의 사명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사명’(oikonomian)이라는 말은 본래 집안일을 위해 맡겨진 청지기적 사명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집 주인이 집안일을 믿을만한 청지기에게 신임하여 맡길 때에 쓰여 지는 말입니다. 바울은 전도를 하나님이 당신을 신임하셔서 하나님의 가족된 자신에게 맡기신 특별한 과업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의 과업은 천사에게도 맡기지 아니하신 사명입니다. 오직 그의 자녀들에게만 맡겨 주신 과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의 작시자는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찬508장)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찬송가의 작시자 엘라이져 캐슬(Elijah Cassel)은 본래 의사였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의사요 평신도 지도자로서 자신의 직업의 장에서 모범적인 삶을 살고 그가 출석하던 네브라스카의 한 교회에서 모범적으로 봉사하던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는 특별히 전도에 특별한 사명을 느끼며 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전도하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는 복음 전도라고 고백하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그는 돈 버는 것보다도 전도 하시는 것이 그렇게도 좋으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렇구 말구요. 결국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가 아닙니까. 나그네 인생에서 영혼 구원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도는 천사도 흠모하는 일인데요”

옆에 있던 부인이 ‘천사도 흠모하는 일’이란 그 말에 감동을 받고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그 말을 시로 쓰면 자신이 작곡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의 부인은 본래 음악 전공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부의 고백으로 탄생한 찬송이 바로 이 찬송가 270장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그런데 그의 나이 60을 넘기면서 그의 마음에 파트타임이 아닌 훌 타임으로 자신의 전 시간을 드려 복음을 전하고픈 불타는 마음을 견디지 못해 마침내 목회에 헌신하게 됩니다. 더 이상 돈은 못 벌고 인간적인 대접도 못 받게 되었지만 그는 너무 기쁘고 너무 감사해서 그의 첫 부임지인 콜로라도 덴버의 한 작은 교회에 목사로 부임하면서 이 부부는 취임 예배에서 취임사를 대신해서 이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 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그런데 캐슬이 이 교회 목사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부인은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누군가가 장례식에 와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되신 것 후회가 안되시느냐고? 목사 안 되시고 의사하셨으면 부인이 그렇게 빨리 가지 않으실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캐슬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 아내는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찬송을 작곡하면서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그네 인생길에 행복한 전도자의 곁에 머뭄이 자기의 행복이라고. 혹시 자기가 먼저 이 세상을 앞서 가는 일이 있으면 난 변함없이 당신의 하늘의 응원자가 되어 함께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부인의 장례식에서 다시 회중들이 이 찬송을 불러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 복음의 증인 이는 사명을 말합니다.




3. 전도는 종의 심정으로 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19절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려면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종의 의미를 바울이 몰라서 그랬습니까?

당시 노예의 몸에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노예라는 낙인이 찍혀지면 그는 어디를 가든지 노예라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노예가 이유 없이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도망친다면 그 노예는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주인이 가만 둘리도 없거니와 당시 사회에서는 도망친 노예를 다른 사람이 죽인다 하더라도 죽인 사람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조선시대에도 초기 200년 동안,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우리나라에 양반은 전체인구의 약 10%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우리나라 신분제에 일대 동요가 일어나게 됩니다. 양반들은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도망치기에 바쁜 반면, 일반 농민과 상민, 서민들이 의병을 조직해 관군보다 더 큰 전과를 올리게 되자, 백성들 사이에 양반과 지배층에 대한 회의와 저항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비롯한 지배층이 한양을 비우고 평양과 신의주로 떠나자 가장 먼저 불태워진 것은 노비문서가 보관되어 있던 관청이었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에는 전체인구의 40%에 달했던 노비의 숫자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10% 이하로 떨어지게 되었고, 반대로 양반의 숫자는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조선 초기 양반의 숫자는 10%에 지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약 100여년이 지난 숙종 때에는 양반의 수가 30%정도로 증가했고, 그 후 약 150년 정도 지난 철종 때에는 양반의 수가 무려 50%를 넘게 되었다고 합니다. - 그런데 자신은 사람의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이 그 지긋지긋한 종의 자리에 서서라도 감당해야 한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유일한 소망은 영혼 구원입니다. 영혼을 구원한다면 무엇이든지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자존심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율법 없는 자처럼 산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지만, 섬기는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영혼구원은 최선이요, 나머지는 차선에 불과하기에 유보할 수 있고, 잠시 보류할 수도 있고, 양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안면식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길이건, 시장이건, 어디서라도 그냥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안부를 묻고,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약속하시고, 다시 만나자고 하시고, 그의 장점을 찾아보시고, 칭찬하시고, 그의 아픈 부분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물어보시고, 한 영혼을 생각하시면서 만나야 합니다. 사람을 기피하면 전도하지 못합니다. 말을 붙인 사람이 주도권을 잡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를 구원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는데 무슨 이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바울의 고백도 그런 차원의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바울 사도가 기꺼이 자신의 방법과 자신의 생각, 자신의 스타일까지 버리고 이웃들에게 다가 설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웃들을 스스로의 관점이 아닌 이웃들의 관점에서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는 자신과 자신의 주관적 기준, 자신의 주관적 방식 그리고 심지어 나 자신의 자존심까지도 포기하고 다가 설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1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종이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맞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여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종된 삶, 즉 섬김의 명료한 한 초점을 볼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섬김으로 우리 이웃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20절에서 그는 율법이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율법아래 두겠다고 합니다.

22절에서는 약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는 기꺼이 자신을 약한 자의 자리에 던지겠다고 합니다. 직접 22절을 읽어 보실까요?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 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쉽게 말해 볼까요? 그는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방식, 자신의 스타일도 포기하고 이웃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포기 하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치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와도 직분을 가져도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빠지지 않은 사람치고 변화된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저에게 복음의 감격을 아는 사람들을 보여 주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복음만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처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복음을 믿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합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무력과 과학, 철학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력도 과학도 철학도 한 영혼을 구원하거나 변화 시킬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마다 변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명자는 반드시 자기희생이 들어갑니다.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인도의 간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에게 그는 가히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일대기를 서술한 자서전이 400권이 넘습니다. 그의 어록만도 80권이 넘습니다. 1948년 1월, 그가 어떤 미치광이에 의해 피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도 전역에서 그를 따라서 자살한 사람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많이 잡으면 100만 내지 200만 명이고, 적게 잡으면 20만 내지 60만 명이라고 합니다.

간디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진정 내 마음을 드리는 대상이면, 정말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간디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 수십만 명이었다고 한다면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 몸으로 받고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게 2010년에 북한 접경 지역에 갔을 때, 연변 과기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김진경 총장을 만났는데 이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 무슨 말입니까? 오늘날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 심각한 경고의 메시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성경을 여러분이 주의깊게 살펴보시면 믿음이라고 다 믿음이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산 믿음이 있는가 하면 죽은 믿음이 있습니다. 깨어있는 신앙이 있는가 하면 잠자는 신앙도 있습니다. 단순히 머리로만 고백하 는 이론적인 믿음이 있는가 하면 머리와 가슴과 몸으로 고백하는 생동력있는 믿음도 있습니다. 날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비로운 믿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헛된 제사만 드리는 믿음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교회의 등록교인이되었다고 모두가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는 피아노를 가졌다고 모두가 피아니스트라고 불리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명칭입니다.? 가끔가다가 피아노 건반 위에 앉아서 뚱땅거린다고 모두가 다 피아니스트가 아닌 것처럼 가끔 교회에 들락거린다고 모두가 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으로, 잠자는 신앙이 아니라 깨어있는 신앙으로, 이론으로가 아니라 사람으로 실천하는 믿음, 정말로 예수님을 가슴으로 사랑하는 믿음, 예수님이 내 사람의 주인이 되셔서 나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고백하며 매순간 그분의 은혜 아래에 나를 맡겨 드리는 사람이라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전히 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빨리 가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잃은 양들을 찾아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들지 않으면서 이웃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내 가족이 구원받기를 원합니까? 이 부패한 한국 사회가 치료받기를 원합니까? 희생 없이 말입니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하는 것은 보통 큰 희생이 아닙니다. 제가 몇 사람을 놓고 시간을 내어 기도를 해보니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쁜 일과를 끝내고 피곤에 지쳐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시간인데, 몇 사람을 생각하면서 계속 엎드려 기도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만한 대가도 치르지 않고 어떻게 죽은 영혼이 살아나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인격적으로 멸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돈을 써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돈을 쓸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바쁜 세상에 중요한 약속이나 스케줄을 뒤로 미루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만나 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의 형편을 이해해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조그마한 수고 하나 하나가 희생의 제물이 되어 활활 타오르며 향기를 토할 때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그런 희생을 통하여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도 우리 자신의 그와 같은 희생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린도 교인들에게 만일 자신이 전도를 안 한다면 스스로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비장한 고백을 남기고 있는 이유, 그것은 단순히 의무감이 아니라 받은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자기 한 목숨을 아낌없이 드려도 후회없는 그 삶이 배여 있는 고백입니다. 오늘 전도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거룩한 책임입니다. 우리는 전도인의 사명을 받고 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 전파해야겠습니다. 전도는 값없이 전해야 합니다. 거저 받았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거저 주어야 합니다. 이제 일어나십시다.

오늘 여러분! 주를 위해 미치고 싶지 않습니까? 저 역시 예수님께 미치 고 싶습니다. 완전히 미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에 미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에 취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전도를 마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격으로 하십시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 안에서 소망이 완성될 것을 의심하지 말고 온전히 주어진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날마다 즐거워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소망을 붙들고 낙심하지 않고 복음과 함께 걸어가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일어납시다. 그리고 하나님 내게 맡긴 이일을 힘써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할 수 있다 전도! 하면 된다 전도! 내가 한다 전도! 지금 한다 전도. 하자! 하자! 하자! 할렐루야 아멘” 기도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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