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맺는 가을이기 위하여 눅13:6-9. 2014년 9월 21일 주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9-21 |
조회: 1745
말씀을 나누기 전에 먼저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소개할까 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저는 이 시를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 시의 문학적인 주제나 사상을 잘 알지 못합니다. 또 이 시의 배경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느껴지는 것은 도 이 시가 주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은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피어나지 않습니다. 봄에 심기운 씨가 한 여름의 천둥번개와 비바람을 맞고 가을의 찬 서리를 맞은 후 비로소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열매를 맺는 가을이 오기까지는 무척 힘들고 아픕니다. 하지만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면 그때 정말 고운 빛깔과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날 것입니다. 그 때 누리는 마지막 기쁨은 환희 그 자체입니다.
가을은 열매를 거두는 결실의 계절입니다. 그런데 이 비옥한 시간을 가꿀 수 있는, 내가 거두어 드릴 열매가 없다면, 그건 왜 그럴까요? 무엇이 내 인생을 이렇게 황폐하게 만들었을까요? 저는 오늘의 본문 눅 13장의 본문을 같이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 누가복음 13장을 흔히 우리는 열매 없는 무화가 나무의 비유, 이렇게 일컬어 말합니다. 6절에 보면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열매를 얻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기 전에 앞서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왜 내 인생에는 열매가 없는가? 내 인생에는 왜 열매가 없을까? 우리가 먼저 이 대답을 찾기 위해서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 열매 없었든 무화과나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Ⅰ. 그 첫째 이유는 자신의 책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어디에 심겨 졌습니까? 포도원에,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더니” 이스라엘 땅, 이 팔레스타인 땅은 사막의 한 부분이죠. 그렇게 좋은 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가보면 포도 재배를 참 많이 합니다. 이 포도원은 사막지대이긴 하지마는 그래도 팔레스타인 땅 안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선택하여 포도원을 일구게 됩니다. 거기에다 무화과 나무를 심습니다. 그러니까 이 포도원의 무화과나무는 좋은 땅에 심겨진 것이에요. 이건 뭘 얘기하느냐 하면 그것은 특권입니다. 그래도 좋은 땅을 선택하여 거기에 심겨졌다. 그러면 좋은 땅에 심어졌으면 좋은 열매를 맺어야하지 않습니까? 무화과나무의 책임은 열매 맺는 게 책임입니다. 그것이 무화가 나무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라는 것은 장식용으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예수님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요즘은 뭐 꽃꽂이가 발달해 가지고 별거 가지고 그것을 어떤 데코레이션에, 아름다움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지마는 적어도 성경이 쓰여진 예수님 당시 만 해도 무화과나무는 절대로 장식용은 아니였습니다. 재목용도 아니에요 뗄감용으로도 쓰여 질 수가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유일한 존재 이유, 목적 그것은 열매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인생은 왜 존재할까요? 저는 무화과나무의 존재이유와 인생의 존재이유가 같다고 생각합니다. 열매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에 서울역 광장에서 노숙자를 위한 사랑의 콘서트에 다녀왔습니다. 한때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다가 실직을 극복하지 못한 채, 부부간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다양한 인생의 삶의 현장에서 무너진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들조차 상상치도 못한 길거리에 자리를 펴고 널부러진 그 삶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삶의 방향, 목적을 잃은 희망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만약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인생을 마친다면 이 얼마나 허무한 인생입니까?
어느 기독교 가정 잡지에 실린 글을 읽었습니다. 아버지와 딸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가 기록되어 있더라구요. 아버지는 마약 중독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딸에게 자기의 그 라이프스타일(Life style)을, 삶을 변명하는 편지를 썼고, 딸은 그기에 대해서 자기가 느낀 반응을 쓴 그런 편지였습니다. 간단히 내용이 이런 내용이에요. 아버지가 쓴 편지에는 ‘나는 내가 당연히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도 어쩔 수가 없단 말이다. 마약은 나에게 기쁨을,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 이란다 이 마약마저 없다면 내 인생에는 아무런 위로가 없구나’ 이것이 아버지가 쓴 편지구요.
이런 아버지에게 딸은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빠는 무책임 하십니다. 아빠는 자신을 포기하고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빠는 자신만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딸인 저의 인생도 간접적으로 파괴하고 계십니다. 아빠는 아빠의 눈앞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 파괴를 보지 못하고 계실 따름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아버지와 딸의 편지를 읽으면서 이것이 비단, 미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는 특이한 아버지만의 문제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우리세대는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것 같아요. 장가는 들어놓고, 시집은 가놓고,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나서도 그 가정을 책임질 줄 모르는 아버지들 어머니들, 얼마나 많아요? 서약하고도 하나님 앞에 서약하고도, 아내를 향한, 남편을 향한,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이세대의 무책임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공동체 생활할 때도 교회생활 할 때도 뭐 제직이 되어 놓고도 아무런 책임도 감당하지 않아요. 누군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현대를 가리켜서 3 무(無)의 시대다 그랬어요. 3가지가 없는 시대다 첫째로 무책임한 세대, 둘째로는 무 관심한 세대, 무관심한 세대. 세번째는 무감각한 세대. 세가지 무(無)에요. 무책임, 무관심, 무감각한 세대다, 이렇게 표현하신 분이 있습니다.
2.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 또 한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망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현대를 가리켜서 3 무(無)의 시대다 그랬어요. 3가지가 없는 시대다 첫째로 무책임한 세대, 둘째로는 무 관심한 세대, 무관심한 세대. 세번째는 무감각한 세대. 세가지 무(無)에요. 무책임, 무관심, 무감각한 세대다, 이렇게 표현하신 분이 있습니다.
본문에도 이 비유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은 이런 좋은 땅과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포도원에 심기웠는데 그 의미를 몰라요. 이것이 바로 무관심입니다. 때로 저는 열매가 없다는 것에 관해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고민이나 하는지, 아니 고민조차도 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는 이런 고민을 합니다. 이 본문에 보시면 아주 흥미 있는 말씀을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7절, 한번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어찌해서 땅만 버리느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땅을 버린다, 무슨 말입니까?
삶의 가치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우리나라에 보면 거제도의 외도를 보면 쓸모없는 섬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거기는 정말 가치없는 땅, 불모지와 같은 땅에 거기 피어나는 꽃하나, 나무 한 그루가 다 나름대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매년마다 그 엄청난 사람들이 그 먼 곳을 관광하지 않습니까?
이 본문의 비유는 우리에게 너는 정말 성도로서 가치 獵 인생으로 살고 있는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존재는 나라는 사람의 존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우리는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며 살고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의 영향력, 대단했죠. 숫자는 현대보다는 훨씬 크리스챤의 숫자는 적었어요 그러나 영향력은 무서웠습니다. 이 무서운 영향력을 나타내는 단어 중에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은,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부쳐진 여러가지 별명이 있었는데 그 별명 중에 하나가 뭐였느냐 하며는 염병이 였어요. 염병, 생각나십니까? 우리 어렸을 때는 옘병이라고 그랬습니다. 옘병, 전염병이란 말이죠. 전염병,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염병이라는 별명이 붙었을까요? 그 영향력 때문에, 확산되는 영향력, 녜, 한 사람이 예수 믿으면 그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아요. 그 사람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이 예수 믿고 또 다른 사람이 변하고 이 무서운 영향력의 확산, 저들은 염병이다! 저들은 염병이다!
또 사도행전에 보면, 일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쳐진 또 하나의 별명가운데 이런 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왔다! 데살로니가에 바울사도 일행이 들어갔을 때 그런 말을 했어요. 그렇죠?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왔다. ’ 천하를 어지럽힌다는 이 말이 본래 원문 그대로 읽어보면, ‘데이 해브 턴 더 월드(They have turn the world)’ 세상을 이렇게 턴했다, 틀었다. 그 다음에 엎사이드 시켜서 다운 시켰다 이런 뜻 입니다.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이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끼쳤든 놀라운 영향력을 상징하는 그런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그것이 긍정적이든 그것이 부정적이든, 내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까요? 나는 땅만 버리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다른 나무에게 필요한 수분마저 내가 빼았고 있으니까, 그 광물질의 자양분은 내가 다 빨아드리면서도 열매는 맺지 못하고,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가면 좋을 텐데, 이런 종류의 종교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정확하게 표현하신 이런 아주 경고의 메세지가 있습니다. 바리세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도 천국에 못 들어가면서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생각나세요? 자기도 못 들어가면서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 그러니 의도적으로는 아니죠.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렇단 말입니다.
3. 자신의 위기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책임을 망각했고 자신의 상태를 망각하고 땅만 버리고 있는 자신의 상태도 보지 못하는 위기를 깨닫지 못함을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저는 문자적으로 좀 적용해서 이 교훈을 받고 싶어요. 7절 한번 읽겠습니다.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여기서 몇 년 얘기하셨어요? 3년, 저는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가 3년 가르쳤으면 너희도 열매 맺어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꺼냐?’
오늘 이 주님의 이 엄숙한 경고 앞에서 이 가을, 인생의 결실을 생각하는, 추수를 생각하는 거두어드림을 생각하는 계절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결실할 수가 있을까요? 이 가을이 열매 맺는 계절이기를 위하여, 저는 이 세 가지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책임.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지? 나의 상태, 현제 나의 삶의 상태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그리고 내 앞에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 기회 앞에 준비가 되어 계신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목적,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존재의 이유, 생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열매를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열매일까요? 성경에 열매라는 이 단어를 가르칠 때는 항상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생명의 열매, 재생산의 열매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예수 안에 있었든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면 나를 통해서 또 다른 어떤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있는가? 쉽게 말하면 전도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지막 교훈, 그것을 가리켜서 지상명령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 제자들에게 무얼 부탁했어요? 제자들에게 ‘제자 삼으라’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좋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내 삶의 목적과 의미와 초점을 줄 수가 있었다면, 그러면 이 생명을 어떻게 나 혼자 간직할 수가 있어요? 사람들에게 전도할 수밖에 없죠. 우리가 신앙생활의 열매, 인생의 열매인데 내가 교회당 드나든 회수가 얼마가 되었느냐 이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이게 전도의 열매요. 생명의 열매에요.
자, 한해가 저물어 가는데 금년 한해 동안에 여러분을 통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름을 델 수가 있습니까? 누구입니까? 그러고도 우리가 예수를 생명이라고 예수를 구원이라고 정말 예수가 소망이라고 증거 할 수가 있을까요? 예수가 구원이시고 생명이시고 소망이시고, 내 삶을 바꾸었고 나에게 저 영원한 삶을 보증하신 주님이라면, 이렇게 좋은 주님이라면 어떻게 그 주님을 침묵할 수가 있느냐 말이에요. 전도 열매가 있느냐? 실제로 전도의 열매가 있느냐 말이죠.
또 하나, 성경에 열매라는 단어를 다룰 때 늘 일상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뭐냐하면 인격의 열매입니다. 인격의 열매, 우리가 잘 아는 성령의 열매는, 뭡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하고 말할 때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그 열매란 단어는 복수가 아닙니다. 단수에요. 성령의 한 열매는, 하고 9가지가 나와요. 그런데 한 열매 속에 있는 9가지의 특성 이렇게 보는 것이 좋아요. 그러니까 그 한 열매는 한 인격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 한 인격 속에 9가지의 특성이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한 인격을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인격은 누구의 인격일까요? 예수님의 인격이에요. 사랑으로 가득 찼든 분,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든 분, 화평, 진정한 평안으로 그의 내면의 인격이 견고했든 그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그리고 정말 오래참을 줄 알았든 그분, 이러한 것들을 완벽하게 갖춘 대표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인격이 바로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열매를 맺느냐는 것은 내가 그것도 신앙생활의 연륜이 얼마나 되느냐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그 예수님을 닮아올 수가 있었느냐?
금년한해를 결산해 가야할 이런 시점 앞에 서서 우리는 이 질문을 물어야 합니다. 내가 금년한해 동안 예수님을 얼마나 더 닮았을까? 작년하고 비교해서, 바울사도의 권면처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내가 얼만큼 영적으로 성숙했느냐 하는 것은 내 인격에 얼마나 변화가 있었느냐 이 말입니다. 자, 금년 한해를 또 마무리 해야 할 이 중요한 계절의 시간 앞에 서서, 여러분과 제가 자기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야할 질문이 바로 이 열매입니다.
자,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이 비유에서 과원지기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주인 앞에, 청지기의 책임을 지고 있었든 과원지기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인하여 찍어버리겠다고 주인이 선언하니까 8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그런데 이 번역이 조금 약해요 더 달리 번역한다면, ‘금년 한번만 봐주세요 한번만 봐주세요.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내가 두루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않으면 찍어버리셔도 저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한번만 봐주세요. 물론 주인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이 비유에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우리를 책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를 변호해주십니다. 못난 우리를 믿고서는 또 한 번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하며 청원하십니다. 그리하여 내년에는 땅을 파고 거름을 주는 수고라도 해서 반드시 열매 맺도록 만들어보겠다는 아름다운 꿈을 꾸십니다.
여러분, 못난 우리를 믿어주시고 대신 변호해주시고 기어코 또 한 번의 기회를 허락하시는 예수님이 고맙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된 것은 거저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눈물의 기도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려주고 내 대신 고생을 한 까닭에 오늘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고 ㉪聆瞞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한 한 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한 해를 선물로 부여받은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땅을 파고 거름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 때문에 또 한 번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감사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풍성한 열매를 맺는 한 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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