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놓쳐서는 안 될 일 - 기도 엡 3:14-21절 2014년 9월 7일 주일 설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9-07 |
조회: 1431
오늘부터 추석 때문에 마음들이 바쁘리라 생각을 합니다. 지난번에 심방 때문에 평택쪽으로 가면서 도시에서는 볼 수가 없는 넓디 넓은 들녘에 벼들이 익어가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추수 때가 되었습니다. 최근에 농촌 들녘을 한번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농부들의 표정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비록 햇볕에 그을렸어도 환한 웃음을 띤 얼굴이 있는 반면 깊게 패인 주름 골에 근심이 가득 담긴 표정들도 있습니다.
웃음이 있는 자들의 들녘은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잘 익은 나락들이 깊게 고개를 숙이고 있고 바람이 불어 허수아비가 흔들릴 때마다 온 들녘이 황금물결에 춤을 춥니다. 그 들을 바라보는 농부의 얼굴! 뉘라서 그 기쁨을 짐작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근심이 있는 농부들의 논은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식사를 하고 한 시간여 들녘을 걸었습니다. 주변에 태풍을 견디지 못한 많은 벼들이 다 누워버렸습니다. 다리에 마비가 온 듯 다 쓰러져버린 겁니다. 그리고 손 쓸 사이도 없이 까맣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퍼내도 퍼내도 쏟아지는 비로 인해 질퍽한 논에서 썩어 가는 곡식들, 모두가 농부들의 한숨이요 눈물입니다. 그러나 아무 관계가 없는 관중인 저에게도 그 썩어 들어가는 논은, 그 벼들은 슬픔이었습니다. 누렇게 익어 가는 벼와 까맣게 썩어 가는 벼!
우리 인생에도 추수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들녘을 바라보는 두 가지의 표정들! 수많은 관중들이 우리 인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농부 대신 하나님이 바라보시는가 하면 주위의 성도들과 사람들이 우리 인생을 바라봅니다. 어떤 인생은 누렇게 익어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삶이 있는 반면, 어떤 인생은 검게 썩어버려 뭇 사람들에게 근심을 안겨주는 삶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 가을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봄직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인생인가! 1년 농사는 다시 지어도 되지만 우리 인생은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인생의 농사는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족들과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오늘 이 시간에, 이 가을에, 2014년 추석의 가을을 맞으며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그 표정들이 어떠할까요?
오늘 바울은 감옥에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택함을 받은 것도 감사한데 자기처럼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자를 자격시비를 걸지 않으시고 사도로 불러 주신 그 은혜는 아무리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다 표현 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임을 바울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3년동안 밤낮 쉬지 않고 기도하며 성경 공부를 가르친 에베소 교회를 생각할 때 눈물이 납니다. 이들이 좀 더 성숙해지고 잘 자라 주었으면 하는 아비의 심정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막연히 의자에 앉아 조용히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걱정스럽고 답답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형무소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엡3:14-15절에 보면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여기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 사도의 13 냅 서신서에는 곳곳에 기도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표현은 여기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만큼 이 기도는 너무나 중요한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무릎을 끓고 간절하게 기도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둘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셋째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기도이기에 이 아침에 성령께서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셔서 이 말씀을 받을 뿐 아니라 나의 기도제목이 되 달라고 간절히 구해야 할 것입니다.
첫번째 우리기 결코 놓쳐서는 안될 일은 영적 성장입니다.
여기 16절에 ‘속사람’이 나오죠. 그렇다면 속사람의 반대적인 용어가 무엇이겠습니까? 겉사람입니다. 아마도 현대인들의 초미의 관심사, 최대의 관심사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사람들이 외모에 특별히 신경을 썼던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유행하는 신종어(新種語) 가운데 '외모산업'이란 말이 생겼습니다. 사업 계획을 생각하고 계시다면, 외모 사업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미용실, 피부관리실, 네일 메이컵, 스포츠센터, 각종 화장품회사, 이 모든 것들이 다 외모를 관리하는 외모산업입니다. 최근 가장 호황을 맞는 병원 중 하나가 성형외과입니다. 옛날에는 흉터 정도를 고쳐주는 병원이었지만, 지금은 멀쩡한 것을 다 고치는 공사를 합니다.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쳐서 예뻐진다면 공사하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옷도 깨끗하게 입고, 자기 가진 것에서 최고로 예쁘게 보이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몸매도 가꾸어야 하고, 자신을 아름답게 보일 권리가 있고, 어떤 면에서는 책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외모에 신경을 쓰는 만큼 마음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상당한 돈과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여 외모를 가꾸지만, 속사람을 가꾸는 사람은 참으로 발견하기가 힘이 듭니다.
아무리 열심히 치장하고 바르고 두들기고, 맛사지를 하고 운동을 해도... 그 육체는 결국 늙고 병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그러므로.... 썩어져 가는 겉사람, 후패해 가는 겉 사람을 위해서만 노력하지 말고, 속사람을 위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내 안에 들어와 거기에 접붙이면 우리 안에 새사람, 속사람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53장 말씀처럼 연한 순처럼 자랍니다. 보기에 흠모할 것이 없는 것처럼, 도살장에 끌려가는 모습처럼, 털 깍이는 잠잠한 양처럼,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속사람입니다. 이것은 눈에 별로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생명입니다. 복음의 씨앗, 사랑의 씨앗을 심으면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속사람이 중요하다고 바울은 느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이 자라도록 기도해 주고 있습니다. 속사람이 잘 자라려면 겉사람이 깨어져야 합니다. 겉이 단단하면 속에 있는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옵니다. 깨어지지 않으면 나올 수 없습니다. 옛날의 가치관, 잘못된 사고방식 이런 것들이 깨어져야 합니다. 속사람이 자라나기 위해 겉사람이 깨어져야 하고 속사람이 더 강건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성령의 단비가 내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진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딱딱하던 모든 껍데기들이 부드러워지고 하나둘 깨어집니다. 이것을 우리는 보통 ‘깨졌다’ ‘무너졌다’고 말합니다. 옛사람이, 이기심이 깨어져야 그 다음에 속사람이 나올 수 있습니다. - 이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기 결코 놓쳐서는 안될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세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여기서 '계신다'라는 단어는 우리가 쉽게 말하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 하는 정도의 표현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계신다'는 단어는 존재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문에 보면, 매우 독특한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첫 번째는 '손님으로 존재한다'는 뜻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인이 되어 거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고도 손님처럼 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주장합니다. 내가 주인이고 주님은 손님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성도는 주님이 주인이 되어, 주님의 뜻대로 결정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주님은 우리 안에 오실 때 손님으로 오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내 삶의 모든 영역, 내 생각의 모든 영역들을 온전히 지배하는... 그런 주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주장하시는 분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삶이 바뀌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인이 되고 내가 주장할 때는 모든 것이 불안하고 불확실하고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심령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오십니다. 그분이 내 마음에 주인으로 오신다면, 내가 그분을 향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주인님, 마음대로 다니면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정중하게 인사하면서 그분에게 열쇠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의 열쇠뿐만 아니라, 모든 열쇠가 다 있는 열쇠 꾸러미를 드려야 합니다.
영국에 '줄리안 모리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미아가 되어 걸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청년이 된 어느 날, 그는 어느 굉장한 부자 집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막대한 유산을 받게 되고 졸지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부자가 되고 나서도 걸인 행세를 지속하는 유별난 행동을 했습니다. 날이 밝으면 걸인의 옷차림으로 비누, 샴푸, 좀약 같은 것을 집집마다 팔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도 한 달에 한 번쯤은 자기 소유의 최고급 리무진을 타고 런던의 초호화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1년에 한 두 번은 파리를 비롯한 구라파의 다른 도시들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튿날이면 다시 비누와 샴푸를 팔러 다녔습니다. 그는 그런 생활이 좋은 것입니다. 좋다기 보다는 그런 거지생활이 자기에게 맞았던 것입니다. 다 떨어진 남루한 옷차림, 초점 없이 방황하는 눈동자를 보면 그는 영락없는 거지 중에도 상거지인 것입니다.때로 저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그와 흡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순간에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왕자다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주께서는 엄청난 하나님의 기업을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감격해 하며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 딸, 곧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구체적인 삶의 장에서 무력해 하고, 좌절하고, 방황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영락없는 거지 신세입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내 사고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온전히 나를 지배하십니까? 여러분이 만약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기꺼이 여러분의 마음의 중심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아직도 그런 삶의 모습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히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거짓입니다. 위선입니다. 자신을 속이는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를 무릎꿇고 기도한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기 결코 놓쳐서는 안될 일은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17절 하반 절에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사랑에 대한 표현이 네 가지 나옵니다.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길이입니다. 이 사랑의 길이는 사랑의 영원성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높이는 사랑의 지고성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깊이는 사랑의 심원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느 성경주석은 그리스도 사랑의 너비는, 전 세계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사랑이고, 길이는,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내려가신 무한한 긍휼의 길이이고, 깊이는, 무덤에 내려간 자와 같은 고통과 고난을 담당하는 것이고, 높이는 , 지금도 살아 계시어 우리를 위해 중재 기도를 드려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성경 주석가는 "나는 이 구절을 실감 있게 주석하기 위해 힘썼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여러 세기에 걸쳐 여러 주석가들이 그렇게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다 담아 낼 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찬송가 404장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은 다 기록할 수 없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을 유한한 인간이 제대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의 사랑을 측량하려고 하는 것은 태평양 한복판에서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재보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사랑은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깨달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체험하는 것입니다.
마치 젊은이들이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을 아무도 이기지 못합니다. 부모든, 형제든, 자식이든 사랑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을 아무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빠지면, 우리를 이길 자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인생의 짐이 무거워도 그 무거운 짐 앞에 꺾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 마음이 고통스럽고 비참해도 그 비참한 운명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경험하는 사람은 그 사랑의 힘에 꽉 붙들려서 절대로 쉽게 꺾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꽃이 아름다움을 넘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 그리고 가을의 무서리를 경험해야 합니다. 꽃은 훈풍으로 피지만 열매는 고통과 인내로 맺힙니다. 무더위와 장마와 태풍을 겪어야 합니다. 세찬 바람에 흔들려야 하고 서로 부대껴야 하며 가뭄과 홍수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제 결실의 계절입니다. 얼만큼 성장했습니다. 나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경륜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성장했다면 주님과 동행하는 영적 교제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세상과 나는 간 것이 없고 그 하나님의 사람 앞에 내 삶을 기꺼이 드리려는 열정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 질문을 드림으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기도하십니까? 기도한다면 어떤 기도를 드려 보셨습니까? 미국의 포드 자동차 선전을 보면 멋있는 말을 합니다. '최근에 포드 자동차를 몰아보셨나요?' 최근에 기도해 보셨습니까? 그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질문에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무능한 영적 생활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도하고 있다면 올바른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까? 당신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바울처럼 나의 사랑하는 믿음의 교우들이 더불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지배하도록,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알기를 원하는 이 진실한 기도를 드리는, 그래서 또 하나의 열매를 맺는 축복의 계절이 오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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