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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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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정말 행복한 인생입니까? 시1:1-6. 2014년 8월 31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8-31 | 조회: 1405
한 소년이 신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를 따라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청년기에 교회를 떠나 세상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작가가 돼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대신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듯했습니다. 그는 성공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1961년 7월 2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칭송받던 바로 그 사람이 자신의 몸을 엽총으로 쏴 자살했습니다.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것입니다.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방전된 건전지와 같은 존재다. 전원을 찾지 못한 고장 난 코드다. 인생의 공허와 고독을 달랠 길이 없구나.”

이 고백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세계적인 작가 헤밍웨이의 비극적인 마지막 모습입니다. 저도 헤밍웨이가 마지막까지 살다가 자살한 키웨스트에 있는 그의 집을 가 본적이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부와 명예 그리고 노벨 문학상까지 거머진 당대의 최고의 복을 누린 자입니다. 그리고 신앙인의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입니다. 어디를 들여다보아도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고 말았을까요?

오늘 우리가 보는 시편 1편에 보면 인생이 그토록 갈망하는 복 있는 인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기) 과연 성경이 말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구약성경에서 복을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는 2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라는 단어로 구약에만 415번 정도 쓰였습니다. [바라크]는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축복하시거나, 신적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줄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사람들의 선행, 즉 착하고 복되게 살든 말든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인해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입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은혜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은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나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 [아시와르]가 구약성경에만 44번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시편에 26번, 잠언에 8번, 그리고 욥기와 전도서에 각각 1번씩 나옵니다. [아시와르]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가진 삶의 자세와 태도로 인해 복된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바라크)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의 태도에 따라서 얻을 수도 혹은 얻지 못할 수도 있는 복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 함께 생각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복, [아시와르]입니다.

자! 옆에 분들과 인사를 나누시길 바랍니다. “당신을 보니 참 복이 많게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참 복이 많습니다!'라고 말씀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혹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복이 많다‘는 말을 들으십니까?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복이 많다’는 이야기 합니까? 제가 관찰해 보았더니 주로 연세 많고 건강하여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복이 많다고 합니다. 자녀 교육에 매달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자녀가 잘 되거나 또는 불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사업이 잘 되어 자금사정이 좋은 사람들을 보고 그렇게 말합니다. 혹은 높은 지위에 앉게 되거나, 미모가 뛰어나거나 몸매가 예쁜 분, 공부를 잘해서 좋은 성적을 얻은 사람에게도 말합니다. 제 경우에는 많이 먹어도 살이 안찌는 사람들을 보고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바로 주어진 좋은 조건 때문에 불행과 파멸로 끝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좋은 환경이 오히려 자식들에게 독이 되는 예가 한 둘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복의 조건들이 행복의 진정한 조건이 되지 못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또 어떤 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불행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날 때가 있습니다. 가난한 부모를 만나 공부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잘 생긴 얼굴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유전자를 받아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이 불행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불행한 조건이 더 복되고 활기찬 인생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복이나 소유의 기준도 행위의 기준에 따름이 아니라 어떤 존재로 살아가느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은 선택에 따라 달라집니다.



1. 복 있는 인생은, 첫째 복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의 태도.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본문 1절을 보세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복을 만들어 가고, 복을 받을 수 있고, 복을 창조할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세 가지의 동사가 있습니다. ‘좇다’와 ‘서다’와 ‘앉다’입니다. 이 세 가지 동사는 사람이 악에 빠져드는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따르기만 합니다.

타락의 시작은 ‘악인의 꾀’를 좇기 시작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어떤 것을 좇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인’이란 말은 ‘어지럽게 하는 자, 소란케 하는 자, 위반케 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 악인이 있는 자리는 늘 음모를 꾸미고 분열을 조장하고 어지럽게 하고, 소란케 하며, 정로에서 탈선하여 위반케 합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꾀를 좇아가면 결국은 파멸입니다. 처음은 멋있게 보이는 넓은 길이지만 갈수록 협착한 길이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처음 넓다고 편하다고 좋아하지만 결코 그 길이 복된 길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의 길’이란 푯대에 어긋나게 나아가는 길입니다. 목표점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생각과 방법대로 살아가는 자의 행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질서에 어긋난 삶을 사는 자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오만한 자’란 자기를 절대화시키는 자요, 자기보다 못한 자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를 의미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타인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부정하고 업신여기는 행동이야 말로 오만한 자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에서 '앉는다'는 말은 아주 절망적인 죄악의 생활습관이 완고함으로 굳어져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인생에 물들지 않고 복있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2.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 ‘묵상하는 자로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묵상의 ‘하가’라는 단어는 단순히 조용히 마음에 되새긴다는 뜻이 아니라 힘을 다해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을 말하는데 말씀을 귀중히 여기고 말씀대로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합니 다. 묵상은 마치 되새김질로도 저는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소를 끌고 나가서 풀을 먹이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눈만 뜨면 소를 끌고 나가서 한두 시간 풀을 뜯깁니다. 그 이른 시간에 소에게 풀을 뜯기지 않으면 소가 하루 종일 굶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풀을 먹고 나서 10시, 11시가 되어 해가 뜨거워지면 소는 그늘에 앉아서 되새김질을 시작합니다. 먹은 것을 다시 끄집어내서 잘근잘근 씹기 시작합니다. 되새김질을 해서 두 번째 위에다가 착착 채우고 두 번째 위가 가득 차면, 세번째 위에 채우고 세 번째 위가 가득 차면, 네 번째 위까지 가득 채웁니다. 그러면 소의 침과 풀이 잘 섞여 위를 통해 흡수되고, 그 흡수 된 영양분이 피를 통해 온몸에 공급됩니다. 되새김질을 잘하니까 소는 풀만 먹고 자라도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건강해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사십 분 동안 설교를 계속해서 듣고 나면 말씀의 되새김질을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되새김질하듯 곰곰이 되뇌어 봅니다. 그런 시간에 성령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그 깨달은 말씀으로 영혼을 가득 채워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영혼의 혈관을 통해 공급되면 영적 피곤이 싹 가시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안에서 새 힘이 솟는 것을 우리 모두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김질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당연히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숱한 문제에 휘둘려서 무너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마음에는 무거운 짐이 항상 짓누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가 없어지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늘 무언가 ?기는 자처럼 불안해하고 짜증을 자주냅니다. 그리고 매사에 불평과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용서할 줄을 모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게 정말 행복한 인생입니까? 아니죠? 얼마나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했는데 생각하지 않고 인생을 사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자리에서 돌아서고 일어서는 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자입니다. 잠언 3장 18절은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잠언 24장 3절은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라고 말씀합니다. 돈으로 집안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집안을 세운다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지혜가 중요합니다. 지혜는 경험이나 세상의 모든 학문, 또는 우리가 존경하는 분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지혜, 보배처럼 값진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습니다.

한 예로 '가시고기'라는 소설을 써서 아주 유명해진 작가 조창인의 실화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일을 하다가 '이제는 소설만 써야 되겠다.'고 결단하고는 96년도에 전업한 작가입니다. 처음에 한두 권 소설을 썼을 때는 그런대로 잘 팔려서 자신감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세네 권정도 책을 썼을 때 이상하게 책이 팔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점점 부수가 떨어지고 나중에는 제로상태까지 미끄러졌습니다. 작가로서의 길을 걸게 되었는데 자기가 쓴 책이 안 팔리자 한동안 좌절과 번민을 거듭하면서 복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불치의 병을 안고 있는 아들과 씨름하면서 고생스럽게 살고 있는 친구를 찾아가 그 친구의 형편을 옆에서 보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힌트를 얻게 되었습니다.

'병든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을 소설로 한번 그려보자.' 이렇게 해서 '가시고기'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아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던 아버지가 급기야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각막을 기증하겠다는 데까지 소설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어떻게 이 소설을 마무리해야 될 지 도무지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기도도 하고 부르짖기도 했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생각은 허공을 헤매고 있는데, 출판사와 약속한 날짜는 자꾸 다가와 피를 말리는 진통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조용히 펴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날 읽은 성경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수난의 장면이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우리 죄를 짊어지고 말없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희생하는 모습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번쩍하고 지나가는 아이디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영감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것처럼 소설 마무리를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완전히 죽어서 희생하는 것으로 끝맺어라'는 착상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설을 마무리를 했습니다. 다 쓴 원고를 출판사에 들고 가면서 '한 만 권만 팔렸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IMF가 터진 어려운 때에 생각 이상으로 140만 권이나 팔리게 된 것입니다. IMF 이후에 실직을 당한 아버지들이 가족을 위해 마음을 태우고 고생을 하는 사회적 상황과 맞아 떨어져 많은 아버지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 소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면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이라도 당장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의 형편을 돌려 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놓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하나님과 깊이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마다 지혜를 주십니다. 성경은 지혜의 보고입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저 사람이 솔로몬에 대해서 좀더 깊이 읽고 묵상을 했더라면 저렇게 어리석은 인생을 살지는 않을 텐데.' '저 사람이 가룟 유다에 대해서 연구하고 배웠더라면 저렇게 어리석은 인생 결말을 맺지는 않았을 텐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배운 지혜를 마음에 담고 그 지혜를 활용하면 절대로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게 않습니다. 실패자가 되지 않습니다.



셋째, 복 있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축복의 열매를 베풀며 사는 태도로 인생살아갑니다. 본문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세요. 1)시냇가의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게 하실 것이다. 여기서 ‘시내’ 라는 단어는 저절로 형성된 시내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를 의미합니다. 누군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마른 땅을 파서 수로를 만들고 그 수로에 물을 흘려보내는 시내입니다. 인생 속에 복 받을 요소가 없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 있는 삶의 태도로 살아갈 때에는 당신께서 메마른 광야 같은 인생을 뚫고 파셔서 생수를 흘려보내시고 아름다운 열매로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즉, 불행을 불행으로 마치도록 두지 않으시고 불행의 자리에 새로운 소망의 열매들을 맺게 하십니다.

여기 또 ‘나무’라는 단어도 그저 잡목을 뜻하는 것이 아닌 목적과 의미를 두고 구한 나무를 가져다가 그 곳에 심은 것을 말합니다. 별 볼일 없는 인생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복 있는 삶의 태도로 살아갈 때에, 바로 그 삶을 들어 의미 있고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 이곳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보혈을 터뜨려서 마르지 않는 시냇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이곳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 강수의 시냇가에 옮겨 심기운 자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혈을 마신 우리의 삶은 이제 묘목이 아닌 독야청청 흔들림이 없는 거목으로 자라나야합니다.

2)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 번영과 축복을 말합니다. - 잎사귀는 열매를 맺게 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요즘 ‘젖은 낙엽’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퇴직하거나 은퇴한 남자를 일컬어 ‘젖은 낙엽’이라고 한답니다. 젖은 낙엽을 보셨죠? 낙엽은 줄기에 붙었다면, 싱싱한 생명이지만, 이미 신세이고 그렇다고 젖지 않았다면 태우는 연료라도 쓸 수 있겠지만, 아무데도 쓸데는 없으면서, 쓸어버리려고 해도 빗자루에 딱 붙어서 귀찮게 하고 처치 곤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잎사귀는 줄기에서 떨어지면 끝입니다.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것은 자양분을 마음껏 받아들여 성장을 지속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형통한 인생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나는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복 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 있는 인생의 태도는 형통한 삶의 열매가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힘듬이 있다할찌라도 또 상처가 있을찌라도, 어떤 자리에서도 그것을 전화위복으로 바꾸어 놓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하나만,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까지 행복을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이 복 있는 사람은 그의 시각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기에 항상 시선이 하늘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항상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가 바뀝니다. 지난 주에 우리 교역자 9분이 1600만명이 보았다는 ‘명랑’을 보러 갔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억울한 누명을 벗고 다시 3군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 선조는 현지 상황을 보아 수군에 가망성이 없으니 포기하고 권율이 이끄는 육군에 합류하라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상유십이 순신불사” “아직 배 12척이 남아 있고 이순신은 죽지 않았다”는 말로 수군을 일으켜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적과 싸워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일을 당해도 긍정적으로 보면서 행복을 찾습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상황을 어둡게만 보아 스스로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봅니다. 생명이 자리에서 죽음을 봅니다. 세상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투정을 부리고 도망치려고 합니다. 사실 어려움이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려움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정말 가진 것 때문에, 배운 것 때문에 나보다 뭐가 더 있어서 행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인도를 좆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그런 인생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빨리 지나갑니다. 남아있는 짧은 생애에서 그저 한다는 것이 늘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서 악인과 어울려 다니며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거스리는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나와 이웃과 하나님 나라에 유익한 축복의 통로로 사시겠습니까? 자!! 우리 다시 이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시편 1편 함께 읽기.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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