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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우리의 삶에 풍랑이 일어날 때 막4:35-41. 2014년 8월24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8-24 | 조회: 1845
저는 요즘 세월호의 사건을 보면서 “인생은 항해와 같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 배에 탔던 학생들은 얼마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까? 누가 그런 참혹한 아픔을 당할 줄 알았다면 그 배에 탔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이 인생의 바다의 항해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풍랑이 일어나는 바다입니다.

이 앞에 서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고 해도 우리 인생 역시 나약하고 작은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주체하지 못하는 슬픔 앞에서 몸부림치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서운 고독 앞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심각한 질병 앞에서 하얗게 질려 버리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나 가엾을 정도로 나약하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모두들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이런저런 이유들로 사람들은 그 마음마다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살아가면서 생기는 문제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능력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내 자녀가 어떻게 될지, 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내 남편의 회사는 어떻게 될지, 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내 남편의 회사는 어떻게 될지 짐작하기 어려운 내일을 걷고 있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면 불현듯 엄습하는 공포가 우리를 덮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의 쳇바퀴를 멈춰 세울 수 있을까요? 멈추고 싶다면, 정말 그것을 원한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깊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함께 본 본문은 인생의 위기 앞에 서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는 도중에 큰 광풍을 만났습니다. 37절을 보겠습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지금 제자들이 만난 바람은 보통 바람이 아닙니다. 그들이 만난 것은 그냥 광풍이 아니라 큰 광풍이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보시면 이 '큰'이란 형용사, 수식어가 '메갈레'라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메가톤급의 풍랑이예요. 거대한 풍랑. 내 삶의 근저를 흔들어 버리는 풍랑, 그리고 내 삶의 존재를 위협할 수 있는 풍랑, 이 거센 풍랑이 덮친 것입니다. 그 큰 광풍으로 인해 제자들이 탄 배가 이리저리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배안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큰 풍랑이 일 때마다 물이 배안에 점점 차들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 갈릴리 바다는 일종의 신비스러운 바다입니다. 언제 어디서 폭풍이 불어 닥쳐 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상한 바다입니다. 갈리리 바다에는 일기 예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형 자체가 폭풍이 몰려 올 어떤 조짐도 없이 갑자기 불어닥치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파도를 일으키는 강한 바람이 불어오면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됩니다. 이 파도를 이겨 보려고 애를 써도 1m도 전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상황을 만난 것입니다. 이 엄청난 위기는 제자들이 수습하기엔 너무 힘이 든 일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여러분 역시 인생의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파산을 당할 때도 있고, 사업이 실패할 때도 있고, 사랑하는 이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도 있고, 아침에 멀쩡하던 아이가 불행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한치 앞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비극을 당하여 몸부림 칠 때 하나님께서는 무관심한 것처럼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을 바꾸어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로 빠져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 같이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 누구나 “야! 정말 모르겠다” 하고 말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잘 모릅니다. 사실 인생의 사사건건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요구한다면 약간의 대답은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온전한 진리는 될 수 없습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불행을 당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의 친구 세 사람이 찾아와서 위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욥의 어려운 형편에 대하여 각자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전부 다 잘못된 견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중에 그들을 향해 진노하셨습니다. 완전히 아는 것처럼 떠든 그들을 좋게 보셨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할 때마다 인간적인 설명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더 미궁으로 빠지고 맙니다. 불행과 행복이 공존하고 의와 불의가 함께 병행하는 이 땅의 상황을 우리는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에서는 양식이 남아서 버리는데 다른 한 모퉁이에서는 하루 한끼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아 상태에서 죽어 가는 현실의 모순을 우리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고층 아파트가 서있는 그 맞은 편에 한숨과 탄식이 끊이지 않는 음습한 지하 셋방에서 살아가는 이 현실의 세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경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절대로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미 없는 고통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C. S. Lewis 교수는 옥스퍼드 대학의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고 나올 때, 한 학생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증거 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째서 이런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고통을 허용하시는 겁니까?? 그 때 루이스 교수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고통이 있어도 교만한 인생인데, 만약 인생의 길에 고통마저 없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교만하겠습니까?”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통이란 귀먹은 세상 사람들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확성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들이 말썽 부리지 않고 잘 커갈 때, 남편이 다른 사람들보다 승승장구하며 승진을 잘 할 때, 손대는 일마다 잘 되고,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 가운데 폭풍이 불고, 풍랑이 밀려올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C. S. Lewis는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본문은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서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폭풍을 만난 그들에게 예수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진 분이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만이 인생의 신비를 밝혀주실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빛이십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왜 풍랑 앞에 당당해야 하는지를 말씀을 합니다.




2. 이 풍랑 앞에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바로 믿음이 아닙니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 40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깨어 일어나면서 풍랑이 일어나고 있는 바다를 향해서 명하십니다. 바다야 잠잠하라 그리고 바다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고요한 바다로 변화되었습니다. 자, 이 사건 직후에 예수께서 두 마디 말씀을 하세요. 하나는 ‘너희가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그리고 또 하나는 뭐에요 40절에 보시면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전혀 믿음이 없었다 그렇게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부의 직업 포기하고 예수님 좇아 나섰을 때 예수께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야다, 구세주다, 저 분 따라가면 인생이 변한다, 우리 인생이 희망을 얻을 수가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풍랑이 일어났을 때, 이 순간 이 현장 속에서만은 제자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거에요. 저는 이것을 신앙인의 불신앙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어느 한 순간, 인생의 어느 한 사건 앞에서, 어떤 특수한 한 현장에 서만은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있는 것이지요. 저는 제자들의 입장이 그런 입장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제자들은 당황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흔들어 깨웁니다. ‘선생님, 선생님 일어나셔 야죠. 우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째서 잠만 주무십니까 일어나서 뭔가를 좀 하십시오. 하십시오’ 당황하니까 예수님 보고 지시하고 있어요. 예수님 보고 막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생의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언제나 일어 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대하는 본문 앞에 나오는 사건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배에 오르셔서 해안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겨자씨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마치신 후에, 그 배를 그대로 타시고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호수 동쪽에 있는 거라사 지방으로 이동하셨습니다. 35절에 보면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 분명 이 항해는 주님의 요청에 의해서 가는 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 믿고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풍랑이 면제된다 - 이렇게 가르치신 적이 없어요.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세상 에서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라' 풍랑의 면 제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풍랑은 오지만 풍랑을 뚫고 나아갈 수가 있다. 마지막 승리자가 될 수가 있다. 여러분 이 약속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라'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 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말을 원어 성경에서 보시면 여러가지 색깔이라는 말 입니다. 인생은 형형색색의 시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시험을 대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만약 불시험을 당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우리는 평범한 시 험도 있지만 어떤 시험은 불같은 시험, 그런데 이런 불같은 시험을 경험할 때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라 이렇게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이 풍랑을 겪어가면서 까지 항해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5장에 거라사 지방에 한 귀신들린 불쌍한 영혼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5:4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가족들은 이웃 사람들과 힘을 합하여 그를 쇠사슬로 묶고 발에 고랑을 채워 놓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한 번 발작을 시작하면 쇠사슬과 고랑을 손쉽게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시 고랑과 쇠사슬로 묶어 놓았지만, 그 때마다 다 깨뜨려버렸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2절에 보면, 그가 더러운 귀신에 들렸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귀신들린 이 사람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귀신에 사로잡혀 스스로 절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를 묶고 있는 더러운 귀신은 그를 분노하게 하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광기를 부리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으신 후, 이어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은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9절). 여기 ‘군대’라는 말은 헬라어로 ‘레기온’이라는 단어인데, 6000명으로 이루어진 군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귀신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지배하고 있는 수많은 귀신들을 향해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귀신들은 거라사 지방에서 내어 쫓지 말고, 산기슭에 있는 돼지 떼에게로 보내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군대귀신들은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한가롭게 먹고 있던 돼지 떼들이 갑자기 미처 날뛰다가 비탈길로 내려가서 결국에는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다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한 마리만 물에 빠져도 난리가 날 텐데, 20마리도 아니고 200마리도 아니고, 무려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에 빠지는 모습은 굉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그 “돼지”를 바다 속에 집어넣으면서까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2,000마리나 되는 많은 돼지 떼를 희생시키셨습니다. 요즘 돼지 한 마리에 얼마 정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100Kg 돼지 한 마리 값이 50만원이라고 한다면 총 얼마가 됩니까? 10억원이나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르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경제원칙에 어긋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행동은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많은 효과를 얻으려는 경제원칙과 분명히 맞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이 외에도 경제원칙에 맞지 않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한 생명을 포기 할 수 없는 주님께서 이 길을 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이야기는 거라사에 귀신들린 이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넘어지고 실수하는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를 끝까지 믿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실망 어린 나를 품에 안으시고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나의 강팍한 가슴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불꽃으로 임하셔서 내 함께 하시는 성령님, 이와 같은 주님의 은혜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 하나를 구원받은 자녀로 삼기 위해 치루신 그 십자가의 사랑은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 앞에 선 우리는 이제 하나님나라의 꿈을 안고 사는 인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바다 저편으로 가자는 사명의 자리에 우리가 부름 받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살아가는 이 현장은 영적 싸움의 자리입니다. 제자들에게 닦친 거센 풍랑이 우리를 휘몰아치는 예측 불허의 상황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놀래기도 하고 두려움 속에서 주저 앉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끌어안고 부르짖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과 분노를 갖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풍랑 앞에 선 주님은 39절에 바다에 일고 있는 바람을 예수님이 꾸짖으셨다 이런 특이한 단어가 사용됩니다. 바람을 꾸짖으셨다. 본래 이 꾸짖는다는 단어는 복음서에 읽어 보시면 예수께서 악령들을, 귀신들을 꾸짖을 때 사용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풍랑의 배후에는 어쩌면 악한 세력, 사단의 역사함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고통이 악마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고통은 사탄 때문에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나를 좌절시키고, 나를 낙망 시키고, 나를 주저앉게 만드는 일의 배후에는 악한 영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럴때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일어나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권세를 의지하고 꾸짖으셔야합니다. ‘파도야, 잠잠하라. 고통아, 사라져라. 문제야, 극복될지어다.’ 예수님의 권세를 갖고 나아가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고통은 극복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시간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을 가랑잎처럼 흔들어 놓는 인생 풍랑 가운데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한분의 인격자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모든 것을 처리하시는 한 인격자가 필요한 것이지 어떤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설명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잘 모릅니다. 아이를 길러 본 들은 잘 아시겠지만, 아이들이 두려울 때, 엄마 품을 찾거나 치마폭에 숨습니다. 그게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피하는 지혜임을 알기 때문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이 시작되는 맨 처음에 보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자, 오늘 본문의 시작에는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그 항해를 제안하신 분이 누구예요?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계획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 바다를 건너가자. 제안한 분이 그분이십니다. 그는 이 바다를 건너갈 계획 을 갖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풍랑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어요. 우리에게 항해를 제안하신 분, 그리고 이 항해 속에 함께 하시는 저분, 저분이 항해를 계획하셨다면, 이 풍랑도 하나님의 계획의 한 부분일 수가 있습니다. 고난은 뜻이 있습니다. 풍랑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주님만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이 풍랑도 우리에게 플 라스를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바다 저 편을 향해서 우리는 다시 용기있게 일어나 우리는 비젼의 항해를 시작할 수가 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파도를 극복하고 인생의 위대한 새로운 창조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우리의 신앙의 고백의 시작입니다. 사랑하시 는 여러분, 이 위대한 고백을 붙잡으십시요.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즐거울 수가 있습니다. 왜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 배에 주님이 함께 타고 계십니다. 그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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