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하나?신34:4-12. 2014년 8월 17일 주일 설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8-17 |
조회: 1464
지난 3-4개월 동안 온 국민의 관심을 끌었던 구원파의 교주인 유병언씨가 사람들이 왕래하지 않는 한 야산의 들판에서 객사함으로서 그의 삶은 끝났습니다. 숲속의 그의 시신을 벌레들이 먹어치워 거의 뼈만 남은 상태였어요. 도망다니느라 그는 심신이 매우 지쳤고 조력자 없이 외로움으로 떨었고 누군가 자기를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가장 저주받은 죽음은 시신이 짐승이 밥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외로움, 두려움, 불안 속에 떨다가 유충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아내는 감옥가고 자녀들은 도망다니거나 잡히는 등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한 가족의 최후가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한 때 화려하게 살았지만 더 이상 그의 삶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 때 인기를 누렸지만 더 이상 그를 축복받은 삶이라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생을 화려하게 살았어도 마지막 부분이 비참하면 잘 산 인생이 아니라 불행한 삶입니다. 사람은 끝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복됩니다. 현재 살아있는 대통령 중에 끝이 비참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때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지만 지금은 국민의 조롱거리, 분노의 대상,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쯤되면 살아도 산 인생이 아닙니다. 인생의 끝은 결과를 말합니다. 초기에 잘 살았어도 끝이 불행하면 실패한 인생입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죽음에서 예외인 인생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문제는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느냐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가 그 백성을 약속의 땅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느보산까지 인도한 후 임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 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여기 느보산은 모압 땅 아바림 산맥 중 최고로 높은 해발 835m에 위치한 산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를 ‘비스가’(히브리 말로 ‘꼭대기’라는 뜻)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리더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백성들과 죽음으로 작별을 고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120년 생애를 마치고,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고별 설교를 마친 후 느보산(山) 최정상인 비스가봉(峰)에 올라가 있습니다. 거기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본 후 임종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한편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있습니다. 물론 모세가 실수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충성을 다한 그인데 하나님이 어쩌면 그토록 매정하게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게 훌쩍 불러 가시나? 그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이고 얕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사랑하시고 그를 충분히 축복하시고 상을 주십니다. 그러면서 모세 개인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이뤄 가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생각은 접고 본문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모세는 아름다운 영혼의 모습으로 떠났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이 세상을 떠나는 임종의 순간은 하나님을 뵙는 날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 살 동안에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육안으로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고전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뵙는 그 순간을 위해 준비해야 됩니다. 마치 시집 갈 날을 잡아 놓은 신부처럼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면 즉시 천국 갈 수 있지만, 시간을 두고 성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겁니다. 마치 안경알을 닦듯이 우리의 영혼을 맑고 투명하게 갈고 닦으며 수련을 해야 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가 인생의 말년을 어떻게 끝맺었나를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모세는 끝맺음을 잘했습니다. 120년의 인생 가운데 처음 40년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았고 40-80까지는 후회와 고통의 삶을 살았으며 나머지 40년은 의미있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았고 자기 민족을 지옥 같은 애굽으로부터 끄집어내는 보람찬 삶을 살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이 그를 지지하셨고 그를 도와 주셨으며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게 끝마무리를 잘 하고 120세 되었어도 여전히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에 온 이스라엘 백성이 30일 동안 슬퍼 울었더라.’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인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도록 했습니다. 모세의 끝이 좋으니 후손까지 좋더라... 할렐루야! 여기에 성공한 삶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힘듭니까? 잘 이겨내세요. 아직 끝을 아름답게 장식할 시간이 있잖아요? 결혼생활, 신앙생활, 직장생활을 끝까지 잘 하시길 바랍니다. 끝을 아름답게 끝내세요.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 절대로 넘어가지 마십시요. 하나님을 끝까지 잘 믿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세요. 하나님 말씀과 교회, 그리고 가정을 더욱 사랑하세요. 그러면 끝이 아름다워집니다. 끝을 아름답게 만들며 승리자가 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 인생엔 속도도 중요하지만, 방향에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유병언씨의 끝이 비참한 이유를 아시나요? 그의 삶의 태도와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삶의 태도와 방향이 잘못되면 인생의 끝이 안 좋습니다. 유병언씨는 정직하게 돈을 벌라고 자기 신도들에게 말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돈벌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위험한 생각을 품었고 횡령, 배임, 탈세 등 각종 불법을 저질렀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이 사회는 혼탁과 불법이 난무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소위 목사라고 자칭하면서 온갖 죄를 저질러 결국 세월호 침몰 같은 불행한 사태를 불러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는 처음엔 자기 의가 강했어요. 자기 의로 백성을 구하겠다고 살인죄를 저지르기도 했다가 애굽에서 살인자가 되어 쫓겨났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올 때에도 성질이 급하여 인격의 바닥을 드러내곤 했어요. 그런데 광야에서 혹독한 세월을 겪는 동안 올바른 태도가 그의 삶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급한 성격, 자기 의가 사라집니다. 온유하고 겸손해졌고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사람들이 속을 썩이면 사람들과 싸우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문제를 들고 가서 울며 기도했습니다. 한번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다 죽이시겠다고 하자 모세는 차라리 저를 죽이시고 그들을 용서하시며 살려주소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그에겐 올바른 인격, 올바른 태도, 올바른 삶의 모습이 날마다 성장했습니다. 그 결과는 아름다운 인생의 결말을 얻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완전한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구나의 인생에도 ‘성공과 실패’, ‘영광과 치욕’이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인의 치명적 약점의 하나는 어떤 사람이 한 가지를 잘 하면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으로, 또 반대로 한 가지를 잘 못하면 마치 모든 것을 잘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평가하려는 흑백 논리적 사고의 틀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찬할 때는 거의 신화적 수준으로 칭송하다가 뭘 하나 잘못하면 그 순간 죽어 마땅한 인생으로 매장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 땅에 완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것은 잘하고 어떤 것은 잘못할 수 있는, 어떤 때는 잘하다가도 또 어떤 때는 잘 못하는 두 가지 가능성을 언제나 갖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잘 할 때 오히려 우리의 이웃들을 조심하도록 경고해주고, 잘 못할 때 오히려 그를 북돋아 주는 격려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분명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흠 없는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죽음의 순간이 바로 이런 그의 인생을 결산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모세의 죽음을 보도하는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백성을 약속의 땅이 보이는 지점까지 인도했지만 그는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4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참, 안타까운 일 아닙니까? 한때 한 순간의 결정적인 혈기, 반석을 두 번이나 지팡이로 때린 그 실수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후회하였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백성을 거기까지 인도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백성의 리더로서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그의 믿음의 영광스런 결과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모세의 믿음을 결산하면서 더 이상 모세의 이런 실수를 거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그 백성을 인도하는 사명을 완수한 것만을 기록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실수의 가능성에 긴장하고 살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인생을 사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죽음의 순간 우리는 영욕을 초월한 후회 없는 인생이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이란 뭐냐 삶의 자세가 올바른 방향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내 태도에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하나 하나 버리며 교정해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저주의 조짐이 사라지고 축복의 조짐이 나타납니다. 올바른 태도로 살아가면 큰 부자가 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이름이 유명해지지 않을 수가 있어요. 하지만 올바른 태도로 살아가면 반드시 끝이 좋습니다. 동의하시면 아멘합시다.
며칠 전에 서울의 어느 골목길에 값비싼 이제차 아우디 차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골목길을 한 할머니와 손자가 리어카를 끌고 가다가 그 비싼 차를 굵었습니다. 비싼 차임을 직감한 손자가 울먹이며 당황해 하자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렸습니다. 한 사람은 소년을 가리키며 “이제 너 큰일 났다”했습니다. 소년은 굵은 눈물을 떨어트리며 어쩔 줄 몰라했어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아우디 차주부부가 나와 보더니 깜짝 놀라며 얼른 할머니에게 사과를 구했습니다. ‘제가 여기다 차를 세워서 이렇게 마음에 불편을 드렸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소년을 향해서 아가야 미안하다. 네 마음이 무겁겠구나 내가 차를 여기에 세운 것이 잘못이야 용서해 주겠니?’ 하면서 사과했고 얼른 차를 빼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이 감동을 받고 인터넷에 글을 올렸습니다.
이 글을 읽은 아우디 회사 사장은 이 노신사 부부가 차를 고치러 오면 무료로 고쳐주겠다고 했습니다. “내 차를 긁었으니 당장 물어내!” 하고 반응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하지만 이 노신사 부부는 거꾸로 반응했습니다. 이 놀라운 태도, 믿을 수 없는 겸손한 태도, 약자를 배려하는 태도에 대한민국 누리꾼들이 감동을 입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본받을 만한 태도였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닮아가고 싶은 태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올바른 태도나 옳지 않은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옳은 태도에 사람들이 감동을 합니다. 내 속에도 옳은 태도가 있고 옳지 않은 태도가 있습니다. 옳은 태도로 반응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태도입니다.
가정생활하는 데에도 올바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예배드리는 데에도, 돈을 버는 방식에도 올바른 태도가 요청됩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는 데에도 올바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살다가 싫으면 헤어지지 뭐” 하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끝까지 잘 사는 태도가 옳습니다. 좀 힘든 일 생겼다고 뜻을 포기하거나 멈추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힘들어도 견디는 태도가 옳습니다. “필요하면 거짓말도 하는 거지 뭐” 하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항상 진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습니다. “난 너를 이해할 수 없어. 난 네가 싫어!” 하는 말을 쉽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이해하고 가능하면 사랑하는 태도가 옳습니다. 돈을 적게 벌더라도 바른 길을 가는 태도가 옳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하며 살아야지 하는 태도가 옳습니다.
이 세상에는 올바른 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가면 축복이요 끝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옳지 않은 길도 있습니다. 그 길로 가면 아픔이요 후회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항상 옳은 길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길 로 가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하나님 내 삶의 자세가 항상 바르게 되도록 인도하시고 행여 잘못하면 고쳐주시고 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며 나아가면 올바른 태도가 습관화 되어서 반듯한 인생길을 가게 됩니다. 이 삶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III.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성공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유병언씨가 옳지 못한 태도로 인생을 살고 끝이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구원을 이야기하고 천국을 이야기 하지만, 그래서 추종자가 수십만이 모였지만, 그 가운데는 정계, 제계, 법조인, 외교관 체육인, 연예인등 정말 정말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이 땅에 지성인들이 거기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기성 교회를 비난하고, 자기들만이 진리인냥 과신하며, 나름대로 거기다 삶을 ?았지만, 그게 사이비 집단이요. 악한 영의 세계인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교묘하게 풀어서 사람을 현혹하고, 그들을 세장에 새처럼 영혼을 가두고 삶을 가둔 것입니다. 도저히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는 성공주의에 사로잡혔기에 불법을 저지르고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성공에만 초점을 맞추면 쉽게 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는 성공에 집착한 나머지 위험한 불법의 생각을 실천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온 자녀들에게도 이 생각을 퍼트렸고 결국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이 땅에 집착하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이 땅에 집착하기보다 영원히 살게 될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살 것을 가르칩니다. 신약에 보면 베드로와 두 제자가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제자들은 그곳에서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대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예수님보다 1500년전 사람이지만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은 겨우 100여년이지만 저 하늘나라는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는 100여년 동안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집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을 잘 사는 것입니다.
모세의 삶이 아름답고 부러운 것은 그의 삶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광야생활 40년 동안 한시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불법을 저지르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했습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그들은 항상 원망, 불만, 불평이 끊이지 않았어요. 모세는 그러한 그들을 다독이며 참고 견뎠습니다. 그들이 모세를 죽이려할 때에도 모세는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참으며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선도하였습니다. 광야생활 동안 모세는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이끌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이 보이는 곳까지 인도했습니다. 그는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이 땅에서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고 천국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모세의 아름다운 삶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위하여 얼마나 충성했는지 성경은 증언하길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다 했습니다. 얼마나 신실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는지 성경은 증언하길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셨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가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이 모세를 아낌없이 사용하셨습니다. 모세는 아낌없이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모세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얼마나 신실하게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한 인물을 극찬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아름답게 산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얼마나 최선을 다했나를 인정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것은 다 사라집니다.
본문이 모세의 죽음을 보도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사건 하나를 지적합니다. 5-6절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벳부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더라” 그가 장사지낸 무덤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설명이 시도되어 왔습니다만 가장 유력한 신학적인 설명은 이렇습니다. 모세가 워낙 출중한 지도자여서 하나님은 그가 우상화되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위대성은 모세 자신의 위대성이라기보다 모세를 그렇게 사용하신 하나님의 위대성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의 증언처럼 아무리 모세가 위대했어도 그는 결국 ‘여호와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주인은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이 그의 평생을 인도하셨다면 이제는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죽음은 바로 이런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높이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모세의 마지막 따나가는 뒷모습이 ... 저는 정말 부럽습니다. “아! 나도 저렇게 살다가 저렇게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에 솟구치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이제 나의 뒷모습이 어떤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그것이 장차 하나님이 부르실 때 떠나갈 ‘나의 뒷모습’에 대한 예고편인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만족하십니까? 모세 같은, 아니 비슷하게나마 아름다운 뒷모습입니까? 그렇다면 더 아름답게 가꾸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혹시 나 자신조차 안타깝게 여길 만큼 부족한 모습입니까? 그래도 아직은 괜찮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시간을 더 주셨기 때문입니다. 남은 생애가 있습니다. 이제 결실의 계절에 뒷모습이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 하리라 새롭게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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