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의 노래 시126:1-6. 2014년 8월10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8-10 |
조회: 1680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에 힘입어 선교사역을 은혜가운데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막상 돌아와 설교를 준비하려니까 이번 주일이 광복절 주일로 예배를 드리는 시간임을 알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간 필리핀도 스페인에게 오랫동안 지배 받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얻은 자유를 몇몇 부패 관리로 인해 너무도 큰 어려움을 겪고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번 금요일에 우리는 광복 69주년을 맞이합니다. 일제로부터의 민족 해방에 대한 강렬한 소망을 격정적이며 직설적으로 노래한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입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 날이
/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 두 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이어질 듯 하거든
/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이 시를 쓴 시인 심훈은 상록수라는 소설로도 잘 알려진 분입니다. 그러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6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이 시어 속에는 어두운 식민지를 살아가는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짐작하게 합니다. 옥스퍼드 대학 교수 바우라는 ‘시와 정치’라는 책에서 이 시를 세계적인 저항시의 예로 들면서 일제의 어떤 압제도 한국 시인들을 죽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 가운데 자유와 주권을 빼앗겼던 일제 36년은 가장 불행한 시기입니다. 우리는 말을 빼앗기고, 자기의 이름도 잃어버렸습니다. 일본은 국모인 명성황후를 죽이고, 왕을 폐위시킨 후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케 했습니다. 젊은 남자는 징용으로 전쟁터에 끌려가고, 여자들은 종군 위안부로 잡혀갔습니다. 모든 곡물은 전쟁용 군수물자로 공출해갔습니다.
당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천황을 향해 절을 강요했고, 모세오경과 요한 계시록은 읽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어기는 자들은 모조 리 잡아 가두고, 죽였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36년 동안 일본에 의해 자유와 주권을 유린당했습니다. - 이 땅에 자유를 위해 한 생을 바쳤던 숱한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뜻을 꺾고 절개를 버리고 일본에 굴복을 했던 것은 이 민족이 다시는 해방을 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이 땅에 해방이 온다는 것은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만큼 절망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해방이 온 것입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진 것입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 함석현 선생은 우리나라 해방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우리나라 해방은 도둑 같은 해방이었다, 예기치 않았다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이었다. 그리고 이 해방은 하늘에서 온 것이었다. 어느 누가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해방을 스스로 할 능력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고 그는 평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일제의 핍박 속에 3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보내면서 모든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도저히 일어난 것 같지 않은 이 민족이 해방을 맞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을 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시 126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A Song of Ascents)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 포로 귀환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우상 숭배를 거듭하다 바벨론에게 멸망합니다. 많은 엘리트 그룹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약속대로 70년이 지난 후 가나안 땅으로 귀환합니다. 몇 번에 걸쳐 귀환하게 되는데, 시편126편은 1차 귀한 직후에 기록된 것입니다. 포로 귀환은 바벨론이 바사(Persia)가 되고 초대 왕 고레스가 즉위한 원년(B.C. 537)에 단행되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온갖 멸시와 고초를 당하면서 얼마나 조국을 그리워했을까요? 문자 그대로 오매불망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며 귀환을 갈망했을 겁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소망은 사라지고,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전격 귀환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포로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속속 귀환의 길을 떠납니다. 그 때 그들의 모습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바렐론에서 70년 만에 해방을 맞게 되었을 때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1-3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 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당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에 빠졌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상상도 할 수없는 현실이 그들의 눈에 펼쳐진 것입니다. 해방입니다. 그것도 7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엄청난 해방을 보면서 1절에 보니까 ‘고향 땅 예루살렘에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빠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겨지지 않아서 마치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착각을 했을 것입니다. 서로 꿈인가 생신가 해서 얼굴을 꼬집고 허벅지를 꼬집었을 것입니다!
2절에 보니까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웃음'과 '찬양'이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남의 나라에서 종노릇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 당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니 이들이 크게 웃고 기쁨의 찬양을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해방도 이와 같았습니다.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끌려갔던 재일 동포들이 광복이 되어서 고향 땅으로 돌아왔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사할린에 강제 징용 갔던 동포들이 고국 땅을 밟았을 때의 감격을 그려보십시오. 그 기쁨과 감격은 그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너무 기뻐서 너나할 것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웃고 또 웃으며 기쁨의 찬송을 크게 불렀습니다.
2. 그런데 보십시오. 그 해방의 기쁨을 안고 70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기쁨도 잠시입니다. 고향 땅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현실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은 잿더미가 되어서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의 제사를 드렸던 예루살렘 성전은 형편없이 허물어져버렸습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마음대로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 눈앞에 비쳐진 현실의 모습이었습니다. 자기 가족들이 살던 옛 집 옛 동네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은 기뻤겠지만 현실은 참담했을 것입니다.
건물들은 다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고 먹을 것 입을 것 마져 여의치 않을 때 그 좌절감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예외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에 왔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모습은 눈을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다 무너지고 황폐화가 되었습니다. 뭐, 우리의 현실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광복은 주어졌지만, 남북이 갈리는 고통을 갖다가 5년이 지난 후 6.25라는 전쟁을 맞게 됩니다. 이때의 참상은 말로 다 감당키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절망의 나날을 보내었고, 모두가 내일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70년만에 조국에 돌아 왔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절망이었습니다. 이에 이와 같이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4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운명을 과거에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셨던 것처럼 다시 한번 구원해달라는 것입니다. 고향 땅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너무나 처참하오니 제발 옛날처럼 도와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라 '남방 시내들' 같이 넘치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남방 시내'는 이스라엘 헤브론 남쪽의 네겝(Negeb) 시내를 말하는데 중동 사막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기(雨期)를 제외하고는 늘 물 없이 말라있던 시내를 말합니다.
흔히 '와디스'(Wadis)라고 부르는 이 시내들은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아서 말라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폭우가 내려서 강둑이 무너질 정도로 쏜살같이 흘러내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가 '남방 시내들 같이' 우리를 돌리라는 말은 그 옛날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해주셨던 같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쏜살같이, 그리고 넘치도록 풍성하게 자기들을 구원해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지도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이방 땅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이 속히 하나님의 은혜 앞에 이 참된 기쁨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광복 69주년을 맞는 우리는 일본의 방자함 앞에 분노하고 있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분단의 아픔을 제공한 일제의 상처 중에 하나가 남북의 분단의 아픔입니다. 저 북한 땅은 어떻습니까? 북한은 의식주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풀뿌리를 캐먹고, 나무껍질을 벗겨먹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육을 먹는다는 보도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아이들 대부분이 영양실조에 걸려서 평균 키가 1m 60cm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북한 정권은 2005년부터 지금까지 세계에서 기독교를 박해하는 국가 1위입니다. 전 세계 유례없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삼대 세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을 닮기위해 6번이나 성형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독재자들을 우상화하고, 신격화하는 북한은 가장 비이성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집단입니다.
69년째 북한을 스탈린처럼, 히틀러처럼 지배하는 평양의 김정은은 지금 이 시간에도 북한동족들을 굶겨죽이고, 때려죽이고, 얼어죽이고, 수용소에 보내어 죽이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지하기독교인들 수십만 명이 있고, 부모와 함께 수용소에 던져진 어린 아이들이 수십만 명이 있습니다. 그 불쌍한 사람들이 참다못해, 죽다못해 이렇게 신음하며 통곡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왜 남한 땅에만 있고 북한 땅에는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 우리가 인간입니까, 짐승입니까?”... 이 이야기는 우리의 동포인 북한 지하 교인의 절규입니다. 우리도 북한 동포들이 저 억압된 정권으로부터 풀려나는 길은 우리의 힘이나 지혜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셨던 것처럼 북한 동포들을 해방시켜 주셔야 합니다.
3. 그리고 이제 시인은 마지막으로 미래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노래합니다.
5-6절을 보세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현재 엄청난 시련에 봉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미래의 소망인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예루살렘 성이 폐허가 되어서 비참하게 되었지만 실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은 이렇게 형편없이 비참하지만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씨앗을 뿌리고 가꾸라는 격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36년의 세월 속에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그러나 그 고통의 현장에서 8·15 해방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분들이 피를 흘렸습니까. 얼마나 많은 분들이 눈물로 기도를 하였습니까. 해방은 어느 날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은혜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나라 국화가 무슨 꽃입니까? 얼마 전에 마당에 무궁화가 새벽 기도를 마치고 나서 보니까 밝은 햇살을 받아 피어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실 무궁화는 장미꽃 같은 정열은 없습니다. 벚꽃 같은 화려함도 목련화 같은 우아함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백합화 같은 수려함도 코스모스 같은 청순함도 없습니다. 무 쳰 왠지 촌티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궁화가 마음에 끌립니다.무궁화는 은근과 끈기의 꽃입니다. 하루의 첫 시간인 새벽 4시쯤 피기 시작해서 질 때는 다섯 꽃잎이 하나가 되어 얌전히 오므라들어 꼭지 채 떨어집니다. 다음날 아침에 수없이 피어 있는 무궁화는 전날의 꽃이 아닌, 모두 새롭게 피어난 꽃들입니다. 매일 모두 새로운 꽃을 100여 일 동안 끈질기게 이어 피우는 꽃입니다. 또 토지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잘 자랍니다.
저는 이 무궁화를 보면서 이 꽃이 괜히 우리나라 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는 931번 외세의 침략을 받고도 살아난 전 세계 유일한 민족입니다. 은근과 끈기를 상징하는 대한민국 국화로 무궁화는 적절합니다. 무엇보다 무궁화를 사랑하는 것은 샤론의 장미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무궁화의 영어 이름(rose of sharon)은 샤론의 장미, 샤론의 꽃이라는 뜻입니다. 찬송가 89장 “예수 샤론의 꽃 나의 맘에 사랑으로 피소서”에서 샤론의 꽃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아 2:1)에서 사론의 꽃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애국가에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은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로 생각이 되니까 이 무궁화가 더 사랑스럽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가 엄청난 어려움이 있는 것 사실입니다. 이 아픔은 대부분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바르게 지키지 못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이제 겸손하게 일어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맡긴 사명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26편 5-6절은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미래를 향해서 활짝 열려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큰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고 있다면 오늘, 이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십시오.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나는 아무것도 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 속에서 그 주의 힘으로 사랑의 씨를 뿌리고, 섬김의 씨를 뿌리고 희생과 헌신의 씨를 뿌리고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생명을 담은 씨는 수분을 공급 받아야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신앙의 성장과 열매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미래는 오늘 수고자만 얻는 것입니다. 땀 흘린 자만 미래를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 오늘 눈물을 흘리며 심는 자만 기쁨으로 거두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가나안은 저절로 어느 날 쉽게 편안히 도착하면 안 됩니다. 먼저 애굽을 탈출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애굽을 뒤로 하고 떠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애굽을 반드시 분명하게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젠 죄의 멍에를 벗겨내야 합니다. 사망의 올무를 걷어차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부르신 그 부르심 앞에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명의 길로 가야 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일제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얼마나 갈망했습니까. 얼마나 희망했고 기다렸고 고대했습니까. 그러니까 해방이 반갑고 기쁘고 행복했던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고 수고가 없었으면 그 해방이 무슨 기쁨이 있습니까. 일제에 앞장서서 아부하며 살았던 친일파들이 해방을 얼마나 방해했습니까. 얼마나 해방되지 못하게 걸림돌 노릇을 하였습니까. 그 사람들에게 해방은 끔찍한 날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해방은 아주 두려웠던 날이었을 것입니다. 남들이 기뻐하며 보따리를 들고 고향을 향하여 돌아갈 때 그들은 얼마나 침통했겠습니까. 기다림이나 사모함이나 수고가 없으면 기쁨도 없는 법입니다. 해방은 기다린 사람들의 것입니다. 사모한 사람들의 것 입니다. 수고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인 시편 126편 5절과 6절은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 灌蔑 미래를 향해서 활짝 열려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큰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고 있다면 오늘, 이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십시오.
오늘, 이곳에서 뿌린 저와 여러분들의 눈물이 씨앗이 되어서 미래 어느 시점에, 우리가 생각하거나 상상하지도 못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을 저와 여러분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의 입술을 닫지 아니하고 찬양을 계속할 수 있기를, 우리의 두 무릎을 꿇어서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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